검에 빗물이 고여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검을 들자 검날에서 빗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한 방울씩 연이어 떨구어지는 빗물이 꼭 검의 눈물 같았다. 

 

공교롭게도 기네비어를 막 보낸 그의 숨결이 아직 고르지 못한 때였다. 비극이 된 사랑의 잔물결이 가쁜 호흡에 역력했다. 검을 향하여 무릎을 무너트릴 때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검을 들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잠깐 사이에 변화가 있었다. 울음을 갈무리하여 겉보기에는 평정을 찾은 그의 얼굴 너머로 이제는 그의 검이 빗물을 뚝, 뚝 눈물처럼 흘리고 있었다.

 

이 순간의 목격자가 된 기분을 뭐라 하면 좋을까.

눈물을 떨구는 검, 고요해진 얼굴의 그. 마치 검이 그의 눈물을 대신 가져간 것만 같았다.

천 년 동안 누구도 뽑지 못했던 검, 어느 순간 불쑥 아더의 운명이 되어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틀어버린 검, 곧 검의 형상을 한 운명 그 자체, 엑스칼리버가 그를 대신하여 울어주고 있었다.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을 ‘지난 역사’로 만들어버린 운명이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선택받은 아이가 운명을 겪으며 만신창이 된 모습에 한 방울, 그럼에도 다시 검을 들어 올린 그의 의지에 또 한 방울. 

검은 그와 함께 울었고, 그를 대신하여 울었고, 그의 곁에서 울었다. 

 

내가 그만 울컥했다. 같이 울어줄 요량이었다면 차라리 울리지를 말지, 싶었다. 하지만 따져 물을 수 없으니 방도가 없었다. 지켜볼 밖에는.

 

검의 눈물이 곧장 많은 것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바위산을 오르기에 앞서 무거운 숨을 두어 차례 고르며 의지를 다졌다. 각오는 여전히 그의 몫이었다. 바위산을 오르면서도 몇 번이나 고꾸라지고 휘청였다. 정상까지의 아득히 먼 길은 앞당겨지지도, 순탄해지지도 않았다. 정상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밟아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공연들과는 달리 그가 철저하게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일상에서 의식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공기처럼 운명이 그와 함께 있음이 느껴졌다. 바람 속에, 파도의 물결 속에, 무엇보다 그의 손안에서 검이라는 형태로.

 

작지 않은 위안이었다. 아버지도, 형제도, 사랑도 떠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남겨두고 사라졌지만, 그를 떠날 수도 없고 떠나지도 않을 단 하나가 있음을 확인한 기분이었다.

 

오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나아갈 다음 장의 역사에 설혹 지난 역사만큼의 눈물이 산재하더라도, 운명은 그 곁을 항상 지킬 것임을. 그리고 오늘과 같이 그를 대신하여 울어주리란 것을.

그 앞에 펼쳐진 길에 그의 운명 있음을.

눈부시게 하얀 빛으로 모든 것을 지워가는 운명 속에서 결연히 눈을 감는 그는 오늘만큼은 혼자이되 혼자가 아니었다.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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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7

엑스칼리버 오늘도 아더를 대신하여 울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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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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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생각이 나. 검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지고서부터 고요해진 아더의 얼굴이. 원래 검을 들고도 종종 감정이 울컥 치밀곤 했는데 어제는 전혀. 엑스칼리버가 아예 아더의 눈물을 가져간 것처럼 고요했다. 바위산 앞에 서서는 웃음도 울음도 없었다. 두어 차례 숨을 크게 들이마쉬었을 뿐. 검의 눈물을 그도 느낀 걸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과 이런 연기가 가능한가? 이런 상황은 만들래야 다시 만들 수도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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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7

엑스칼리버 오늘은 왜 안 울어줬어. 검이 울지 않아서 아더가 울었잖아. 웃다가 결국 울었잖아.. 검아 왜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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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8

그런데 검이 울지 않을 것을 아더는 어떻게 알았을까. 시아준수는 정말 어제(0726) 검과 연기를 한 것이었던 걸까.. 검이 대신 울어주지 않으니 그의 몫으로 되돌아온 오늘의 울음 또한 검과 나눈 연기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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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9

역사적인 7월 28일에는 검날을 따라 눈물을 흘려보냈다. 검이. 또 검이 울고, 그는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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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9

검이랑 연기하는 그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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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8.07

7월 26일, 7월 28일, 8월 3일, 그리고 8월 4일. 엑스칼리버마저 울었던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