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을 삼키는 도입, 울면서 웃으면서 그리는 노래, 가누지 못하여 울음이 끝내 터져 나오는ㅡ죽음을 결심하는 회한, 그리고 죽음에 이른 마무리. 오늘의 도리안 그레이를 이 넷으로 그린다.
푸른 핏줄 심장을 뚫고 날 깨운다.
죽음에 묻혀 털썩 쓰러진 몸이 파들파들 떨리더니, 비척비척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평소보다 꼿꼿한 등에 놀람도 잠시. 무언가에 이끌리는 사람처럼 그가 무릎으로 걷기 시작했다. 작은 무릎이 바닥을 쓸고 손바닥이 더듬으며 앞을 헤쳤다. 말 그대로 엉금엉금. 흡사 갓난아이의 무릎걸음처럼 뗀 몇 걸음이었다. 죽음의 환영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눈물이 글썽하여 두 눈도 입술도 잔뜩 젖은 얼굴로, 그렇게. 그 모습이 별안간에 나의 심장을 타격했다. 시린 눈이 따가웠다.
황금 빛깔 천국이 내게 펼쳐진다.
서서히 펼쳐지는 두 팔이 눈앞의 천국을 그렸다.
아름다운 소년이,
오른팔이 아스라한 저 먼 곳을 향하며 뻗어졌다.
나를,
눈부신 빛 속에서 산화되어 가는 그의 생명이 소리 없이 웃었다. 눈썹도 눈물 맺힌 눈꼬리도 노래하는 입술도 하염없이 아래를 향하여 처진 채로. 분명하게 그린 우는 웃음이 '아름다운 소년'을 향하여 아름답게 웃었다.
부-른-다.
띄엄띄엄 숨을 내뱉듯 가까스로 맺은 끝음에서 기어이 울음이 고였다. 그것으로 아름다운 하나의 생이 멎었다.
 
스러진 비스듬한 얼굴에 멈추어진 시간을 하염없이 보았다. 어둠에 잠겨 끝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린 마음에 어둠 속의 환영이라도 찾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엔딩의 말간 얼굴은 눈물의 제방을 톡 터트려내고야 말았다. 뽀득뽀득 울음 씻긴 얼굴로 말갛게 웃는 그를 심량할 수 없었다. 한참 울고 난 후의 뽀얀 얼굴이 어쩐지 다시 태어난 아이의 얼굴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보고, 하염없이 보았지. 시빌 베인을 다시 만난 오른 볼에서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배질에게 안겨있던 얼굴을 들자 그 모습을 드러낸, 잔뜩 젖어버린 양볼을. 헨리 워튼을 향하어 그 얼굴 그대로 젖은 채 웃음 짓던 쓰린 눈을.
 
그의 걸음 하나에 나의 눈물 하나. 29일의 도리안 그레이는 그랬다.
 
 
*
 
1. 오프닝
배질을 둘러싼 그의 영혼들 중에 데빌 역할의 배우도 있었구나. 익숙한 얼굴을 알아보고 다소 놀랐다. 살짝의 충격도. 그가 밟아가는 타락의 질주와 함께 그의 영혼도 데빌이 되어버린 건가 싶어서.
 
2. 등장
별무리를 헤아리는 아름다운 눈동자는 1층에서는 C에서 가장 잘 보이는구나. 심쿵♡
오늘은 살짝씩 찡긋이는 미간도 보았다. 쇼팽에 심취한 아름다운 미간에서 음악이 흘렀어.
 
3. 찬란한 아름다움
오늘의 대사는 가지 마세요, 헨리. 촉촉하고 부드러운 말씨. 향긋하여 헨리 워튼도 거절할 수 없고 배질도 어쩌지 못하게 하는 그런.
그런데 헨리 워튼이 원래 이렇게 후반부에 그에게 달려들듯이 다가서던가? 턱을 쓸어내리기 전에 오늘 거의 덤벼들듯 치고 들어와서 깜짝.
 
4.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오늘의 대사는 이게 정말 나에요? 평소와 좀 달랐어. 처음 듣는 톤이었다.
 
5. 당신은 누구일까
무대로 돌아와서의 박자 밀기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정확한 소절은 다시 들어야 알겠는데, 사랑스럽게 밀어낸 음이 폭죽처럼 사르르 귓가를 건드려왔다.
 
아, 이게 그 나쁜 영향. 쓰레기ㅡ의 경멸조를 이어갔다. 나쁜 영향, 하고 깜빡이는 동공을 향하여 오늘의 헨리 워튼은 그럼 그럼 하듯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라.
 
6. 최악의 줄리엣
생각도 안 할 거고 네 이름조차 기억에서 지워버릴 거야. 헉. 여기서의 표정이 너무 무서웠다. 비극에 사로잡힌 비통한 눈동자가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워 보였다. 사랑의 종말에는 물론,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수치를 안겨준 모멸감에 상처 입은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오늘 앨런은 다른 사람이 깨워 주었던 걸까? 졸았던 건 확실한데 그가 돌아볼 즈음에는 눈을 뜨고 있어서, 예쁘죠? 물으며 돌아보는 예쁜 미간이 찡그려질 일이 오늘은 없었다.
 
7.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오늘의 경탄은 마치, 아 역시 헨리야ㅡ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헨리 워튼이 대한 존경과 경탄이 우수수 번진 눈동자가 글썽글썽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리였던, 배질과 헨리 워튼의 논쟁 끝에 모자를 쾅 치며 퇴장하는 소리가 바뀌었다. 오늘은 모자 대신 발을 쾅 굴렀다.
 
8. 패션쇼에서는 무슨 말을 오늘따라 그리 종알종알하였지. 입 모양을 읽고 싶다. 부리부리하여 멋있는 와중에 귀여움 백만 배.
 
9. 넌 누구
고혹적인 소리의 향연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표정으로 소리로 사람을 홀려.
오늘은 타이가 베스트 아래로 삐져나오기까지.
 
10. 무엇이 기다릴까
날 사랑했던 당신의 마음을 들킬까 봐? 의 끝음이 평소보다 부드러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네가 느끼는 고통, 나도 느낄 수 있으니까.
배질을 보는 두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입술은 그대로 여유의 웃음을 그리고, 두 눈으로만 잠시 보여준 아주 미묘한 변화였다. 그건 탐색하는 눈이었다. 배질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영혼의 진실이 대해 안다고 말하는지. 살피는 눈이었어.
 
찬란한 아름다움은 28일의 퇴폐를 이어갔다. 심지어 오늘은 손목으로 관능적인 날갯짓까지 더했다. 비잉, 배질에게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퇴폐의 자태가 아름다웠다.
 
배질을 쓸어내리는 손은 그제 처음으로 허벅지에 닿더니 어제는 복부 아래의 자켓 속으로 사라졌고, 오늘 역시 그 변화를 이어갔다. 자켓 속으로 사라지는 은밀한 손이 어둠 속에서까지 섬세했다.
 
그리고, 여전히 눈에 밟히는 웃지 않는 눈. 포식자의 눈빛을 하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눈.
그 눈에 마침내의 정복감이 서리면, '저주받은 내 운명'이라는 배질의 소절이 마음에 맺힌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비밀을 은폐하려는 그의 운명의 선택이 얄궂어서.
 
11. 넌 어디로
오빠의 찰나의 매너손을 보았당.
담배를 꺼내기 전 크게 찡그려진 미간이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쾌락을 위한 쾌락에 몸을 맡긴 사람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공허함. 권태. 그런 것들이 엿보이는 얼굴.
 
데빌은 오늘 립스틱을 발랐다! 심지어 짙은 입술로 그에게 입맞춤을 보내는 입 모양을 하기도.
 
12. 또 다른 나
습격자에게 생명을 위협당하는 연기가 어쩜 이렇게 섬세하지. 골자는 어제, 그제와 같은 연기인데도 매번 감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해?
곱씹으며 또르르 굴러가던 눈.
도리안 그레이?
낯선 이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정확히 호칭되자 퍼뜩 목전으로 다가온 위기를 체감하며 요동하던 동공.
시빌 베인?
먼 기억을 되살려오며 찌푸려지던 미간. 믿을 수 없어 하던 눈동자의 떨림.
이-십-년-전?
모면의 방책을 찾아내고 살풋. 결백을 가장하며 꾸미는 웃음.
그리고 습격자로부터 해방된 이후, 닥쳐온 안도감에 그제야 휘청이며 생명의 숨을 몰아쉬는 혼란의 얼굴까지. 섬세해. 심지어 그 눈으로 빚는 모든 눈빛들이 전부 아름다워.
 
도리안 네가 나라면ㅡ의 소절에서 그가 자신을 둘러싼 영혼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는 것이 맞나? 그가 바라보는 영혼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원을 떠나 저 멀리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제대로 본 게 맞나? 내일 다시 확인해보아야겠다.
 
14. 너를 보낸다 reprise
난 그녀를 용서해주었어요. 배질에게 밀착하여 올려다보는 얼굴이 사르륵 배질의 턱을 쓸었다. 내 말이 맞잖아, 강요하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다신 날 보지 않겠다고? 는 28일과 같은 부드러운 어조를 이어갔지만 28일과 같은 나른한 한숨은 아니었다. 그 소리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그리스 신화의 이상적 인간ㅡ에서 오랜만에 울컥하는 얼굴을 보았다. 그를 사로잡아온 그 신조가 얼마나 그를 옥죄어 왔는지 느끼게 해주는 표정이었어.
 
영혼의 비밀을 드러낸 후 오늘도, '어때 아름답지 않아?' 물으며 웃음을 쥐어짜냈다. 웃음이 웃음이 아닌 얼굴. 문득 내가 묻고 싶어졌다. 그 아름답던 순수의 웃음은 어디로 간 걸까.
 
저 도리안 그레이가 아름답다고 말해ㅡ울음으로 맺은 그 문장을 들으면서는, 문득 넌 누구에서 '저 도리안 그레이'를 낱낱이 부정하던 그가 떠올랐다. 현실이 아냐, 난 인정 못 해. 그 자신조차 이미 부정해버린 진실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그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니 별안간 서글퍼졌다. 아름답다고 차마 긍정하지 못하는 배질도, 갈구하는 그도 이해되어서.
 
15. 앨런의 죽음
여미지 못한 옷차림으로 앨런을 한껏 몰아가고 나서, 오늘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한숨과 함께 나른하게 펴낸 등이 억눌린 숨을 토해냈다.
비밀은 꼭 지켜주세요. 터덜터덜 끌리는 걸음걸이. 퇴장하는 등에서 혼망한 기색이 분명했다. 안타까웠다.
 
16. 사라진 아름다움
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
'생각'의 가장된 순수는 여전히 소름이 끼칠 만큼 아름답고 기이하다.
 
특별했던 건 햄릿이었다. 점점 더 쫓겨간다. 잔뜩 궁지에 몰린 입술이 호소했다. 심장이 없는 얼굴.
헨리, 만약 내가 배질을 죽였다면요? 는 오늘 고백처럼 들렸다. 헨리, 내가 배질을 죽였어요. 나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너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결코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헨리의 대답은, 그 고백을 무참히 짓밟아버렸지.
 
사라진 아름다움. 그의 첫 소절은 분명한 호소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외면에 오른 볼에서 아픈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겨진 나약한 인간. 두 번째 소절은 분명한 울분이었다. 하지만 배질에게 그랬듯이 거센 원망은 부리지 못해. 그것까지 마음 아팠다.
 
모든 진실이 들추어진 후 고개만을 가까스로 들어 올려다보는 눈망울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눈물 고여 그렁그렁한 눈이 공포에 질려있었어.
그랬는데, 그런 그에게.
도리안, 넌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아.
헨리 워튼의 싸늘하고도 싸늘한 목소리에 떨구어진 등이 한없이 작고 작았다.
 
 
(+)
어제의 귀여움이 눈물의 고드름에 있었다면 오늘은 떼지 못한 휴지조각에. ㅋㅋ
 
세상이 바뀐 시간. 오늘은 아예 무대에 드러누운 브랜든 부인.
헨리 워튼의 오늘 헤어스타일. 거세게 세운 머리 탓에 매우 악역 같았다.
그리고 음향팀. 마이크가 적시에 켜지지 않아 나는 사소한 사고가 거듭되니 슬슬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어제 배질의 너 미쳤어? 오늘 샬롯 베인의 첫 소절, 그리고 급기야는 오빠의 누구야! 누구야! 에서까지. 같은 실수를 왜 자꾸 되풀이하는 건지 모르겠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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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30

그 격정 때문이었을까. 어제는, 다시 날면으로 목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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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30

다시 생각해도 어제의 헨리 워튼은 엔딩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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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30

구원의 엔딩에 헨리 워튼이 함께하는 것이 설령 도리안의 의지일지라도, 내 마음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헨리 워튼이라면 더더욱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