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저 멀리 빛이 비치는 방향을 향하여 그가 수습한 랜슬럿의 주검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주저앉았던 몸을 어찌어찌 일으킨 그도 그것을 보았다. 울음 삼키기에 여념 없던 얼굴에 찰나의 격통이 스미는가 싶더니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차마 바라볼 수 없어, 울음으로 바르르 떨리는 턱이 고개를 모로 떨구었다. 그러나 외면에의 노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행렬을 따라 그가 걷기 시작했다. 천근만근인 발걸음으로 그래도 걸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형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얼굴을 하고.

그러나 닿지 못했다. 망자는 그를 두고 멀어져갔다. 그렇게 형제가 떠났다.

 

다음 차례도 이별이었다. 운명은 이별 뒤에 이별을 점지해두었다. 가혹하게도.

“카멜롯으로 돌아와 줘.”

앞서 형제를 보낸 그가 청했다. 고개 젓는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그러쥐면서.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투박한 장갑을 미처 벗지도 못한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난 이미 용서했어.”

눈을 마주하고 음성을 겹쳐가며 그가 애원했다.

‘하지만 끝은 비극.’ 붙잡아도 잡히지 않을 것을 곧바로 예감한 그의 노래가 이별이라는 이름의 운명을 타고 울음이 되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가도 보았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갑옷의 무게를 견디고 가누기 힘든 몸을 이끌어 겨우겨우 따라 걸었는데, 랜슬럿도 기네비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정도, 사랑도 따라가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별은 망설임조차 없이 그를 혼자 남겨두었다.

 

이윽고는 운명의 차례였다.

기어이 모두를 물리치고 그의 옆에 혼자 남은 운명의 차례가 되었다.

 

젖은 시선이 검에 닿았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유일한 것. 가라앉은 손길이 검으로 향했다. 천천히, 검의 형상을 한 운명을 그가 들어 올렸다. 

무릎을 꿇은 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검을 말없이 바라보는 얼굴이 시간을 돌려보고 있었다. 

운명이 그에게 얼마나 가혹하였나. 그러나 고요해진 눈동자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따져 묻지 않았다.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울음도 설움도 어느샌가 모두 갈무리된 얼굴이 침착했다. 겸허한 눈동자는 그저 보고 또 들여다볼 뿐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운명이 이끌어온 작금의 자신을.

 

이윽고 몸을 완전히 일으키는 그에게서 보았다. 운명의 한 귀퉁이를 단단히 쥔 손을. 어떠한 운명이 앞에 놓이더라도 받아들이겠노라, 스스로의 의지로 표명하는 듯한 미소를.

멀린의 권유로 올랐던 산을 이제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오르는 등에서는 또 보았다. 

겨울바람에도, 분노에 찬 바다에도 물러서지 않는 영웅을.

막다른 길 앞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한 사람을.

운명에 맞서는 동안 부서지고 깨진 삶의 파편에 상처 입은 얼굴이 되어서도, 자기파괴적인 연민에 휩싸이지 않은 고결한 영혼을.

 

*

 

음향이 다시 리셋되었다. 6월 27일 1막의 음향은 환영이었나? 소리는 다시 멀어지고 울림은 증폭되었다. 사람의 소리, 악기의 소리가 합쳐질수록 뭉개지는 음향.. 뭉개지는 현상보다도 안타까운 부분은 소리가 멀어진 것이다. 사람은 눈앞에 있는데 소리는 저 멀리에서 찾아야 하는 감각, 극을 통째로 저 멀리로 보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역시 〈난 나의 것〉과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어떤 음향에서도 살아남는 넘버 톱2. 아니, 시아준수가 살려내는 넘버 둘. 가창의 승리이자 배우로서의 아우라와 연기가 삼위일체로 이루어내는 흡입력의 승리였다. 뜬구름 잡는 음향으로 동동 떠 있는 분위기를 한 번에 극 안으로 끌어온 오늘의 일등 공신이기도.

특히 좋았던 부분은 ‘내 삶은 여기 있어’ 라며 두 손으로 자신이 살아온 터전을 가리키던 때. 두 팔 안에 감긴 아더의 유년 시절이 보이는 듯했다. 단 한 차례의 손짓으로 알 것만 같았다. 곁에서 늘 편이 되어주는 아버지, 혈기왕성한 친구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자라온 아더가. 새삼 멀린이 그런 아더의 터전을 허물러 온 방해자처럼 보이기에 왈칵 아더에게 이입해버리기까지.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굴리면 구르고, 구르는 것도 늘 데구르르 참 열심히 하는 아더인데 오늘은 굴려서 구르다가 아예 그대로 바닥에 발라당 누워버렸다. 밀쳐진 반동으로 높이 솟았던 다리가 그대로 바닥에 풀썩 고꾸라져서는 한참을 일어나지 않았다. 어휴, 못 말려. 하는 것처럼, 귀엽게. 

 

“원하는 게 뭡니까.”는 아무래도 존대로 정착이 된 모양이다. 오늘은 그간의 ‘뭡니까’ 중에서도 가장 단정하고 어른스러웠다.

 

〈이야기 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멀린의 도움으로 용의 불길을 갓 다스릴 때, 아더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조명은 역시나 예쁘다. 연노란빛 은하수가 별을 품고 아더에게로 쏟아지는 광경의 신비로움. 앞으로도 이 장면은 꼭 맨눈으로 볼 것. 사람에게 신탁이 내리는 장면이 이렇지 않을까. 천년 숲의 선택을 받은 생명이 이렇지 않을까. 신성하게 아름답고 고결하게 신비롭다.

 

〈검이 한 사람을〉. 케이가 또.. 다다다다 달려와 아더를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읏챠, 기쁨의 포옹을. 매번 이 장면에 대하여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마음 촉촉해지는 순간.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고대하던 첫 애드립. “멀린, 혹시 마법사가 아니라 점쟁이였어요?”

 

〈이렇게 우리 만난 건〉. 아니, 대체 어떻게 했길래 지난번에 이지훈 랜슬럿이 목검을 부러트렸나 싶어 오늘은 칼싸움도 주의 깊게 보았는데, 아니 뭐야. 기대도 하지 않았던 장면을 목격했다. 대련을 지켜보던 아더가 갑자기 와다다다 두 사람을 향하여 뛰어나와야만 했던 이유ㅡ기네비어와 랜슬럿이 서로의 검을 막으며 대치할 때 랜슬럿이 장난식의 입맞춤을 시도해서였구나. 그래서 아더가 화들짝 놀라서 달려 나왔던 거였구나. 랜슬럿 뭐야, 캐릭터 너무 별로야. 애초부터 관심 있는 여성이었다면 무례하게 대하지나 말든가. 흥. 

그런데 이지훈 랜슬럿.. 몰래 숨어서 볼 때 오늘따라 아더를 너무나 품에 폭 안고 있더라. 물론 발각될 시에 아더의 양팔로 항복을 표시하려는 큰 그림을 위한 준비 자세였겠지만, 형의 품에 폭 싸인 아더가 너무 귀여웠던 것.

 

〈왜 여깄어?〉. 이제 막 회복기에 들어선, 성치 않은 몸인 게 훤히 보였다. 오늘따라 걷기도 유독 휘청휘청. 멀린과 모르가나 사이를 가르러 갈 때도, 처음 만난 누이를 위로할 때에도. 입술 색도 옅게 바랜 분홍빛이라 더 수척해 보였다.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심신의 회복에는 마음의 안정도 중요한데..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이나 섬세했다. 노래의 절정에서 쓰라린 옆구리를 넌지시 부여잡는 디테일까지 완벽했다.

 

〈기억해 이 밤〉. 중앙의 시야에서 가장 짜릿한 넘버. 특히나 초반의 연설에서 그가 검을 정면의 얼굴로 맹세하듯 가져갈 때. 정면에서는 완벽하게 얼굴의 정중앙에 검이 와닿는 각도가 되는데, 이 순간에 검과 한 얼굴이 된 듯 결의에 찬 눈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세상에. 김준현 멀린이! 왕관을 예쁘고도 알맞은 각도로 씌워주었다! 짝짝짝.

 

〈오래전 먼 곳에서〉. 잔을 들이키고 나서 ‘한 잔 더?’ 기네비어에게 묻는 초롱초롱한 눈을 오랜만에 보았다. 웃는 얼굴로 끄덕여주는 김소향 기네비어의 허락에 신이 나서, 곧장 짠 부딪치고 들이키는 모습이 귀여웠다. 어엿한 청년왕인가 싶다가도 이럴 때면 소년왕 같다.

 

〈눈에는 눈〉. “너도 나가.” 이제는 기네비어에게 말할 때도 무섭게 격양된 목소리다. 그르렁 긁힌 음성에서 화가 숨겨지지 않는다. 초반, 그녀에게만은 비교적 나직하였던 음성은 더는 없다.

 

〈심장의 침묵〉. 너무나도 놀라웠던 오늘의 넘버. 6월 27일의 시도를 굳힌 6월 29일의 노래. 

27일, 후반 절정부의 시작음이 원래보다 높았었지. 시작음에서부터 계단을 타고 내려와야 할 음은 내내 높이 머물렀다. 의도된 애드립이라기 보다는 내달리는 오케스트라에 맞추기 위해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 것처럼 느껴져서 대단히 놀랐는데, 오늘은 아예 이 부분을 애드립 구간화 해버렸다. 26-27일 양일에 오케스트라의 마이웨이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를 확인한 그가 오늘은 사전에 대처해버린 느낌이었달까. 오케스트라의 박자가 어느 틈으로 들쑥날쑥하더라도 목소리의 범주 내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단단히 결계를 치는 노래였다. 협업에 등 돌리는 오케스트라와 발맞추어 걷기 위한 최선의 방어이면서 공격이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27일에는 이대로 괜찮을까 싶게 불안했던 심장의 침묵이 29일에는 이다음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 아슬아슬한 오케스트라는 여전히 불안하지만, 김준수의 아더가 〈심장의 침묵〉을 어떻게든 완성해낼 것임을 목격하였으므로.

 

〈이게 바로 끝〉. 무너지는 꿈, 이게 바로 끝, 이게 바로 ‘끝’의 파열음. 공연 초반에는 ‘저’주받았어의 탁성이 이 노래의 방점이다 여겼건만, 거듭되는 공연을 따라 무게중심도 이동했다. 마지막 소절의 처절한 음성을 들으면 그야말로 ‘무너진다’는 게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음성으로 ‘무너져내리는’ 감각을 이렇게까지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는지 놀라워. 누구는 탁성이라 하고 누구는 철성이라 하는 이 결 많은 소리의 자극. 갈퀴 달린 소릿결. 고통, 배신, 절망을 결마다 아로새긴 살아 있는 소리.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올까 싶은 것. 샤아더의 이게 바로 ‘끝’.

 

그리고 여기, 아더가 죽음의 응징 대신 추방이라는 결정을 내릴 때 늘 모르가나의 표정이 의미하는 바가 궁금했는데 오늘의 신영숙 모르가나에게서 무척 또렷한 웃음을 보았다. 그리고는 혼란에 빠졌다. 왜 웃는 거지? 아더가 두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니 계획은 실패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어쨌든 아더에게 거대한 배신을 안겨 절망을 주었으니, 절반의 성공이라도 충분하다는 걸까?

 

〈이야기 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모르-가나’의 음성이 또 한 번 새로운 색을 입었다. 한 단계 더 낮아진 음성은 이제는 전혀 아더 같지 않다. 누가 봐도, 모로 들어도 아더가 아닌데 눈치 채지 못하는 모르가나를 보면, 그녀가 확실히 이성을 잃었음을 알 수 있다. ‘모르-가나’의 단 네 음절로 아더가 된 멀린을 표현하고, 모르가나의 흥분까지 전달하는 시아준수에게 박수를.

변신의 순간. 멀린이 아더의 어깨를 감싸쥐고 드루이드의 노래를 읊을 때 본 것. 동그랗게 커지며 놀라는 눈코입. 멀린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얼굴이 크게 놀랐지만, 그뿐이었다. ‘배신에는 단죄를’. 멀린의 하는 양을 지켜보는 얼굴이 그렇게 말해주었다.

 

〈왕이 된다는 것〉. 이 노래의 단단함은 그의 아더 안에, 아더 그 자체인 시아준수의 안에도 있지만 마무리에 주먹을 꽉 움켜쥐는 동작에도 있음을 재차 확인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의 볼프강이 무릎을 꿇으며 기도하듯 손을 모으는 것으로 샤차르트라는 캐릭터를 대변한다면 〈왕이 된다는 것〉은 심지 굳은 음성과 두 손을 매듭짓듯 움켜쥐는 주먹으로 아더의 진면목을 전부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인물을, 극복의 서사를, 이다음을 바라보는 엔딩을.

 

샤아더 사랑해.

 

*

원하는 게 뭡니까.

그, 그럼요. 대단했어요. 

‘랜슬럿’, 어떻게 된 거야.

멀린, 혹시 마법사가 아니라 점쟁이였어요?

신이 날 택했어.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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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01

심장의 침묵과 이게 바로 끝 계속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