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비어.”

비켜난 시선에 그가 고개를 한껏 숙였다. 그녀의 얼굴을 연신 들여다보며 눈맞춤을 시도했다. 그 바람에 이미 지친 어깨가 잔뜩 굽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 마주쳐주지 않았다. 

“카멜롯으로 돌아와 줘. 제-발.”

그의 애원에도. 

“흐르는 눈물로 상처를 씻어낼 순 없나.”

이별의 노래가 시작되고서도. 

잡으려 할수록 흩어지는 꿈처럼 그의 눈앞에서 흐려질 뿐이었다. 

끝내 외면받나 싶었던 눈맞춤에의 노력은,

“여기 우리의 사랑 기억해.”

노래와 울음이 더는 분간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러 그녀에게 닿았다. 꼭 마지막 인사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겹쳐졌다. 

“하지만 끝은 비극.”

잔인하게도. 

 

혼자 남은 이의 울음은 짙고 길었다. 한 손으로는 검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놓아버린 그가 터벅터벅 걸었다. 회한과 울음으로 범벅된 얼굴이 하늘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모든 것을 놓아버린 쪽의 손이 천천히 두 눈의 울음을 덮었다. 

커다란 장갑이 얼굴을 전부 가렸다. 

 

이윽고 손을 내렸을 때는 울음이 있던 자리에 가까스로 피워낸 미소를 보았다. 희미하고 아프게, 애써서 웃는 얼굴이었다. 따끔하게 웃어 보인 얼굴이 등 뒤의 바위산을 돌아보았다. 돌이킬 수 없는 걸음, 벗어날 수 없는 굴레, 피하지 않을 운명. 산을 올려다보는 등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정상은 멀었다. 산을 오르며 그는 몇 번이나 고꾸라졌다. 비틀비틀 위태롭다 싶으면 어느새 중심을 잃고 쓰러져 검을 지지대 삼아 겨우 버티고 섰다. 하지만 그래도 나아갔다. 헤매면서도 엉금엉금 걸었다. 

 

정상으로의 이정표는 오직 스스로의 눈뿐이었다. 휘청이고 고꾸라져도 두 눈은 결코 정상에서 비켜나지 않았다. 성체 성혈을 곧바르게 바라보던 대관식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형형함이 눈 안에서 반작였다. 비틀대는 몸을 보면 그만 말리고 싶다가도, 타오르는 두 눈을 보면 차마 말릴 수 없게 하는 힘이 있었다. 

 

기어이 정상에 다다랐을 때에야 두 눈이 후련한 듯 깜빡였다. 산 아래의 만상과 먼 곳을 바라보는 얼굴이 울 것처럼 웃었다. 울음도 웃음도 그 어느 쪽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전부인 얼굴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으나, 이제 다시 모든 것을 향하여 나아갈 이의 미소였다. 

 

*

 

음향이 실시간으로 물 먹는 것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연대송의 첫 소절이 매우 또렷하고 깨끗하여 기뻤으나, 그 순간뿐이었다. 그래도 29일보다는 나았다는 점에 위안을. 

문제는 오케스트라였다. 사실 이 극의 주인공이 오케스트라였던 건 아닐까 싶은 연주였다. 어떻게 오케스트라의 박자가 튀지 않는 넘버가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도대체 드큘 때는 어떻게 원미솔 음악감독의 지휘를 견딘 걸까. 그때는 정박이었던 단 하루의 연주조차 없어서 그랬을까? 오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케스트라는 사실 매회의 도전과제 같은 것일까, 연주에 맞추어 무사히 완창하기가 매일매일의 퀘스트일까..

 

모든 넘버가 위태로웠으나, 가장 돋보인 오늘의 곡은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이었다. 바위산을 오를 때부터 급격하게 내달리기 시작하는 오케스트라 덕에 산을 오르면서 박자와도 맞서는 그를 보았다. 달리는 연주에 맞추어 노래의 박자를 늘렸다가 당겼다가, 밀었다가 끌어왔다 하기를 내내 반복했다. 그래도 충분하지 않자 급기야는 일전과 같이 새 음절을 추가해야 했다.

‘저’ 엑스칼리버 앞에 나 맹세하리.

이 소절에서 경악과 경탄이 함께 왔다. 단지 음절만 추가한 것이 아니었다. ‘저’를 강하게 박아넣으며, 순간적으로 상체를 뒤로 빼고 엑스칼리버를 향하여 그가 한쪽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곧은 검지는 정확하게 엑스칼리버를 가리키고 있었다. 원래 있는 소절, 원래 있는 동작처럼 느껴지게 하는 임기응변이었다. 대단한 순발력이었다. 그가 선사한 아찔한 안도감에 만감이 교차했다. 배우의 기지를 목격한 것은 기뻤으나, 배우를 자꾸만 시험에 들게 하는 연주에는 속상했다.

 

사실 첫 소절ㅡ‘내 안에 불타고 있는 분노’에서 입술 콱 깨물며 주먹 쥐는 그를 보았을 때, 오랜만의 B에서 형형하게 살아있는 눈이 의지를 입어가는 모습을 정면으로 보면서 오늘의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이 이미 남다르다 생각했었는데 이런 절정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반드시 그 여파로 인한 것만은 아니겠지만, 엑스칼리버를 뽑은 후의 정적을 만났다. 박수 없이 고요한 건 이번이 두 번째. 이 순간의 고요는 역시 신성한 느낌을 준다.

 

그럼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오늘도 발라당 드러누웠다. 열심히, 귀엽게. 자유인처럼. 

오랜만의 B에서 기쁘게 본 오늘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밀쳐졌을 때, 넘어짐 몸을 일으키며 아이 못 말려~ 못 당한다니깐~ 하는 듯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젓는 얼굴. 장난스럽게 웃음 짓는 순한 광대가 소년의 것이었다. 

 

〈이야기 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용의 불길을 다스리는 아더에게로 쏟아지는 빛, 오늘은 꼭 빛의 장막이 그의 머리 위로 드리우는 것 같았다. 요정이 밤새 물 길어 모은 이슬로 올올이 꿴 아름다운 은하수빛 장막이 넘실넘실했다. 선택받은 자에게로 쏟아지는 빛이었다. 공기마저도 일렁일렁, 아름다웠다.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랜슬럿을 말릴 시간. 오늘도 두 팔을 X자로 교차하여 콩콩 부딪히며 열심히 말려보았지만 전혀 먹히질 않자 시무룩해지는데, 글쎄 X자 만들던 모양 그대로 자기 팔꿈치를 감싸 쥐며 멍을 때렸다. 귀엽게.

유난히 오늘따라 세게 부딪혀오는 기네비어의 주먹에는 어김없이 심쿵, 손 닿은 곳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다 되새김질하듯이 콩콩 두드렸다. 또 귀엽게.

바위산에 나란히 올랐다가 기네비어가 먼저 내려갔을 때, 어어? 부풀며 따라가는 눈동자는 또 얼마나 섬세하게 귀여웠는지. 공연장의 모두가 전광판으로 봐야 하는 표정 연기인데, 괜스레 맨눈으로 보는 옆 사람이 보았을까, 보였으면 좋을 텐데 신경이 쓰여서 발동동.

 

〈왜 여깄어〉. 입술이 다시 새초롬한 분홍빛이 되었다. 엷은 빛의 수척한 입술은 아더가 아직 환자라는 사실을 실감케 해준다면, 촉촉한 분홍입술은 그저 예뻐서 홀린 듯이 보게 된다..

그리고 새삼 아더가 운명론자임을 실감했던 장면. ‘이것이 너의 운명’ 멀린의 음성에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다. 곧장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생각을 가다듬었지만, 운명이라는 단어가 아더에게 얼마나 결정적인 키워드인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기억해 이 밤〉. 성체 성혈을 보는 눈의 단정한 형형함. B였기에 오랜만에 보았다. 올곧게 반짝이는 눈동자. 이 순간의 신부님은 얼마나 뿌듯하실까. 자신이 집전하는 대관식의 주인공이 이런 눈을 하고 있다니, 얼마나 기쁠까. 

 

〈오래전 먼 곳에서〉. 요정가루의 활약. 머리 위에 꽃핀처럼 내려앉은 요정가루가 정말이지 끝까지 끈질기게 붙어있었다. 털옷을 벗을 때도 흔들리지 않고 대롱대롱 그대로 달려있다가, 뒤를 도는 그의 몸짓에 이제는 떨어지는가 했더니 그새 위치를 어깨로 옮겨서 살아남지 뭔가. 다시 한번 몸을 트는 동작에 결국 나폴나폴 떨어지기는 했지만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또 귀여웠던 것. 두 사람이 가볍게 춤출 때, 아주 오랜만에 두 번 다 기네비어를 빙그르르 돌려주었다. 어쩐 일인가 싶어 눈을 반짝하고 보는데, 글쎄 세 번째 돌 차례에는(심지어 세 번째까지 가는 것도 오랜만) 기네비어와 아더 모두 서로 돌려고 해서, 그만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둘이 각자 반대 방향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마주 보는 얼굴로 되돌아와서는 서로 놓친 손을 보며 풋, 함께 어깨로 웃어버렸어. 풋풋하게 사랑스러웠다. 너무나도. 

 

〈더 깊은 침묵〉. 춤추는 아더, 눈맞춤이 너무 예뻐요. 노을빛 드리운 눈동자가 그윽하게 반짝반짝,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시종일관 기네비어를 바라보는데, 그녀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눈썹을 내려가며 너무나도 예쁘게 웃었다. 기쁘게, 행복하게, 사랑스럽게. 춤의 맵시도 봐야 하는데 이 얼굴을 포기할 수가 없어. 

 

〈눈에는 눈〉. 오랜만의 장은아 모르가나. 아무도 이해 못해ㅡ를 극적으로 터트리며 다가오는 누이를 홀린 듯이 바라보던 그가, 그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검을 움켜쥐고 있으면서, 날카롭게 번득이는 눈을 하고 있으면서.. 얼굴은 꼭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누이가 내미는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엑터를 잃고 얼마나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으면 싶어 안타까웠다. 

 

〈혼자서 가〉. 도입 전, 이지훈 랜슬럿의 대사를 오케스트라가 따라오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랜슬럿의 대사를 가로채는 듯한 템포로 그가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노래를 시작해야 했겠지만,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평소보다 길게 남아 그럴 수 없었다. 대신 두다다다, 힘차게 달려오는 오케스트라를 기다렸다가 타이밍 맞추어 힘차게 쾅!

 

시각적으로는 ‘이 검만 있다면 두렵지 않다’면서 피식 웃을 때의 타격이 컸다. 자신만만한 비웃음 너무 잘생겼다고요. 

 

그런데, 혼자서 가를 마치고 다시 나왔을 때ㅡ괜찮다잖아, 신경 꺼, 니가 왜ㅡ오른쪽 귀 아래 목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불그스름한 빛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생채기라 놀랐다. 심장의 침묵까지 마치고, 이게 바로 끝에서 다시 나왔을 때는 살색으로 상처를 덮어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심장의 침묵〉. 오케스트라로부터 자생하기로는 으뜸인 넘버. 늘 대단하지만 오늘은 더더욱. 시아준수, 이 노래에서 숨은 쉬나? 후반의 몰아치는 부분은 심장의 절규라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오케스트라라는 과제와 노래의 표현이라는 두 가지 임무를 양어깨에 하나씩 짊어지고, 오늘은 음향의 침공도 함께 상대해야 했다. 마지막 ‘검은 심장의 침묵’에서 소리가 갑자기 물을 먹더니 ‘침’에서 음향이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순간적으로 정적을 뚫고 나오는 생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다사다난한 소절이었으나 아더의 심리상태와는 어울리는 기묘한 조화였다. 이 연결고리를 이룩해낸 그의 아더에게 박수를. 

 

〈이게 바로 끝〉의 막바지. B에서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각도를 만났다. ‘무너지는 꿈’으로 그가 단지 목소리 하나로 세상의 꿈을 모두 무너트릴 때, 그의 뒤편으로 랜슬럿과 기네비어가 사라지는 모습이 함께 보였다. 그의 세계를 지탱하던 하나하나가 천천히 그로부터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 서글펐다.

 

이어지는 ‘멀린’은 지난주와 같은 처창한 울부짖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읊조리는 것에 가까운 독백이었다. 서글프고 쓸쓸한. 

 

〈왕이 된다는 것〉. 굉장히 분명한 도약을 보여주었다. 나직한 읊조림에서 시작하여 스스로에게 끝없이 되묻다가, 울음이 스며들어 흐느끼는 듯하였으나 서서히 떨쳐내는 일련의 과정이 어느 때보다도 분명했다. 단계단계가 아름다우리만치 명료했다. 

하나씩 움켜쥐고 떨쳐내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도약하는 폭발력이 말문을 잃게 했다. 겨울바람을 지나 흔들리는 땅을 뛰어넘는 소용돌이와도 같던 음성. 도대체 어떤 소릿결에 이런 갈래갈래의 인생 여정이 담겨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노래의 끝에서 만난 단단한 얼굴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다변하는 모습을 보여준 오늘의 이 노래에서 결국 살아남은 것은 단단한 그 자신이라는 점이 좋았다. 

 

샤아더 사랑해

 

*

원하는 게 뭡니까

엑스칼리버 앞에 나 맹세하리

혹시 마법사가 아니라 점쟁이었어요?

랜슬럿, 어떻게 된 거야. 

멀린, 여기에 있었네요.

신이 날 택했어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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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04

어제 제-발 여기 너무 슬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