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회 중 한 번쯤은, 전지적 바수니적 감상이어도 좋겠지. 그조차도 모르게 그가 오늘 내게 준 것을 기억하고 싶으므로.
 
극도로 예민했다. 예민해진 신경이 공연 외적인 것에도 쉽게 반응했고 좀처럼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 상황이 야기된 것에 대한 스트레스와 그것에 곧장 영향받는 나 자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꾸만 공연으로부터의 이탈이 초래되는 상황 전부가 예민해진 감각을 부추겼다. 1막은 그래서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뭘까. 이 고통을 안다는 것 같은 그였다. 2막이 시작하자마자 넌 누구에서 내 시선에 못을 박아둔 채 걸어오는 얼굴은, 그래. 마치 고통의 1막에 대한 보상 같았다. 내 시선 안에서 눈썹을 이지러뜨리고, 위험한 미소를 그려 넣고, 매혹적인 울림으로 초상화를 조롱하는 그가 눈 아플 정도로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눈맞춤의 번호가 아니었음에도 나를 찾아온 그 눈앞에서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사랑의 당신. 사라진 아름다움과 도리안 그레이ㅡ죽음 직전에도 치유의 쐐기를 박듯 내 눈 안으로 되돌아온 그에게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사랑에는 사랑으로 화답할 뿐이야.
 
*
 
1. 등장
그냥, 도리안이라고 불러주세요ㅡ의 억양이 다소 달랐다. 조금 더 소년만화 같았다고 해야 할까. 귀여웠어.
헨리 워튼이 남기로 결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 배질을 흘긋이는 시선을 오랜만에 보았다. 찰나에 그치는 눈길이지만 다시 보고 싶었는데 기뻤어. 심지어 오늘은 다소 새침하기까지.
 
2.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영원한 젊음을 갖고 싶어ㅡ에서 허공으로 한껏 뻗은 자신의 양손을 찬찬히 훑어내리는 시선이 대단한 갈망을 표현해내고 있었다. 젊음을 그러쥐듯 한껏 뻗은 팔이, 그 팔을 차례로 쓸어내리는 요동치는 시선이.
 
3. 최악의 줄리엣
연신 입가를 가리고 웃는 브랜든 부인을 목격하고는, 샐쭉해져서 '웃지 마요' 하는 입 모앙을 보았다. 내려간 입꼬리가 축 처져서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어. 브랜든 부인이 도리어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자꾸 웃는 것 같았을 만큼.
 
4.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시빌 베인의 죽음으로 고통받아 움츠려진 어깨와, 찬란한 아름다움에 홀려 곧게 펴진 등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시빌 베인의 죽음이 옥죄여 오는 영혼의 고통에 한껏 웅크려진 채 바들바들 떠는 어깨가 가여웠고, 찬란한 아름다움에 홀려 모든 고통을 씻은 듯이 잊어버린 채 사르르 일어선 등이 초연하여 아름다웠다.
 
5. Against Nature
Against Nature의 사운드가 이제 일정 궤도에 오른 것 같다. 그가 늘 절정이어도 오케스트라와 합창, 공연장의 음향이 함께 절정으로 수렴해야만 빚어지는 환희가 있는데 어제오늘 계속 같은 극점을 찍는다. 짜릿해.
특히 '황홀한 절정'의 사운드는 정말.
 
6. 무엇이 기다릴까
계단 끝 난간에 기대어 나른하게 몸을 늘어트리는 모습이 돌아왔다. 오늘은 그 상태로 연기를 흘려보내기까지.
 
무엇이 두려워서 그 그림을 보고 싶은 거죠? 어제에도 있었던 변화. 두려워'서'에 숨을 흘려 넣어 어미를 미끄러트린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듯 하강하는 끝음이 음악 같았다.
요즘의 귀여움은 담배를 톡, 안쪽으로 여미듯 쓰러트리는 손가락. 구르지 않도록 야무지게 넘어트리는 손이 새침해.
 
찬란한 아름다움은 오랜만에 13일의 주문이었다. 포복하는 것 같던 날갯짓. 단 '후회 없으라'에서는 28일의 퇴폐에서 보여준 강세를 이어갔다. 특히 '라'의 어미에서.
이어지는 끝음들 역시 어제의 강세를 그대로 이어갔다. 배질의 덜미를 움켜쥐는 것 같았던 할큄음들. 그 갈퀴 같았던 음성들.
 
7. 또 다른 나
해결은 분노였던 걸까. 화가 남은 마음에 격렬하게 치솟는 현장감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가 음을 박아넣을 때마다 찾아오는 희열이 의아하기까지.
Against Nature, Life of Joy와 함께 삼대 산맥으로 아름다운 사운드였다. 단단하고 큰 울림. 귓가 깊숙하게 스며드는 음성. 황홀했다. 좋았어. 오늘 공연의 넘버들은 전부가 요목조목 다 좋았다.
 
8. Life of Joy
도리안 그레이를 제외한다면 오늘의 넘버. 찬란한 아름다움의 기운이 돌아왔다. 그래, 이 소리가 듣고 싶었어. 하강하는 배질의 기세를 뚫고 치솟는 타락의 이중창. 배질의 양심에 결코 잡히지 아니하는 타락한 순결들. 날개 돋힌 듯 일어나는 음들이 기뻤다. 지독하게 아름다웠어.
 
오늘의 대사는 행복과 불행ㅡ여기서 정말로 사로잡힌 듯이 벌려졌던 두 팔. 잔뜩 확장된 동공.
 
마지막 절창, life of joy를 내지른 후 씨익 웃은 얼굴은 마치. 오늩 짱이지? 하는 것 같았당.
 
그런데 오늘 배질 너무 그를 뒤로 잡아 팽개친 건 아닌가! 그대로 날라가버리는 줄 알았어. 저만치 내던져진 그도 만만치 않은 기시로 팽그르르 돌아 배질과 대치했고.
 
9. 너를 보낸다 reprise
배질, 제발 내 선행을 폄하하지 말아 줘요ㅡ에서 좋아하는 억양의 '배질'이 돌아왔다. 한 박자 쉬고 타이르듯 경고하듯 낮게 읊조리는 '배질'이.
다신 날 보지 않겠다고?ㅡ에는 새로운 동작. 되묻기 전 고개를 부르르 좌우로 떨어 보였다. 내가 지금 무엇을 들은 거지? 하는 것만 같았다.
 
칼을 가지러 뛰쳐나가는 오늘의 모습은 꼭 동아줄을 붙잡으려는 모습 같아서 마음 아렸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탁한 눈동자가 방향을 잃고 끝으로 내몰린 것만 같아서.
'저 도리안 그레이가!'는 그래서 유난한 비명이었다. 나를 부정하지 말아 달라는 경고이자 애원.
 
배질의 넌 구원 받을 수 있어↗가 돌아왔다. 안간힘으로 쥐어짜내 올린 어미에 안도했다. 그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그의 구원에 대한 긍정처럼 들렸으므로. 어제처럼 어미가 낮게 떨어지면(있어↘), 그저 바람에 그치는 것만 같아서 먹먹하다.
 
정신이 돌아온 얼굴이 오늘은 화들짝 놀라며 칼을 훑어보았다. 손안의 칼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아래위로 보는 눈동자가 잔뜩 흔들렸다. 끝내 손에서 떨구어진 칼은 그 언젠가 스스로 칼을 밀쳐내 버렸던 그 날과 같았다.
 
10. 사라진 아름다움
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가장의 순수. 오늘 또 너무도 아름다웠네. 자꾸만 이죽이는 웃음을 머금다가도 금세 굳어버리는 동공이 그의 위태한 정신을 드러내 주었다.
 
심장이 없는 얼굴ㅡ에서 가슴을 그러쥐던 한 손. 울먹임이 깃든 떨림.
만약에 내가 배질을 죽였다면요? 는 오늘은 울음이 가신 절망의 어조였다. 시빌 베인의 죽음에 자책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헨리. 내가, 배질을 죽였어요.. 하는 것처럼 들렸어.
 
오늘 그의 오른 볼의 눈물을 훔치는 헨리 워튼을 보면서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어제는 왼 볼이었는데, 오늘은 객석을 향한 볼의 눈물이라 훨씬 그 움직임이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여서 더욱 묘한 느낌. 실패라 선언한 후에 눈물을 닦아주는 건 뭐야.. 순간적으로 그랬네.
 
11. 도리안 그레이
무릎 걸음이 돌아왔다. 구원에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은 그 무너지는 걸음이 눈에 말뚝을 박았다. 그러나, 구원에의 의지로 가득한 그 몸짓에도 불구하고 눈은 웃지 않았다. 아름다운 소년을 향하여 간신히 뻗어낸 손끝에도 무엇도 맺히지 않았다.
 
언제쯤 레퀴엠이 꿈이 아닌 현실인 얼굴을 만날까. 구원이여, 언제까지 그를 외면할 생각이니.
 
 
(+) 헨리! 아, 이게 그 배질이 말한 나쁜 영향? 변태.
세상이 바뀐 시간. 브랜든 부인은 오늘 런웨이를 걸으셨다. 동에서 서로, 씩씩이며 돌진한 끝에 멱살을 잡고 '아니야! 난 헨리의 꿈을 응원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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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10.06

이 글은 '오로지'의 333번째 글이구나. 꽃의 글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