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후기를 둘로 나누는 공연이구나.. 여기서는 기억에 남는 것들을 넘버별로 짤막하게. 넘버별로 숫자를 붙여가며 쓰는 후기도 오랜만이야.


1. 조나단의 면도칼을 핥을 때 프리뷰 때는 피에 대한 욕망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할짝거린 후에 서둘러 감추려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다 혀를 내밀어 천천히 음미했다. 으음~ 그리운 이 맛 하는 듯이.


2. Fresh Blood
이 순간이 선사하는 쾌감을 한 번 맛보고 나니 더 떨리는 마음. 루마니아어 주문이 나올 때부터 쿵쾅거리는 것이 오케스트라인지 내 심장인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흥분상태였다. 두 번째 보니 그의 얼굴이나 움직임 말고도 의상의 디테일이나 동선도 제법 눈에 들어와서 흥분이 두 배! 붉은 망토 속에 붉은 상의(뒤쪽으로만 망토가 붙었다)와 검은 바지를 입었고, 스트라이프 주름이 진 상의 가운데는 보석이 잔뜩 박혀 있었다.

가장 입에 붙고 가장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던 부분은 ‘피! 신선한 피가!’ / ‘다시 찾은 내 힘!’ 하면서 장갑을 매끄럽게 빼내던 순간. 그리고 모자를 벗어내고 머리를 콱 움켜쥘 듯이 쓸어넘겼던 순간!

아아, 모자를 벗기 전에 모자가 뒤로 조금 넘어가서 젊어진 얼굴과 붉은 머리카락이 잠시 보였다. 모자가 뒤로 넘어갈까 봐 내가 다 조마조마해졌는데 시아준수 순발력.. 모자의 위태위태함을 느꼈는지 그대로 몸과 고개를 아래로 숙여서 망토 속으로 얼굴을 쏙 감추었다. 흑흑. 이것마저 멋있었어.


3. 윗비에서 미나와 재회, 빨간 롱코트.
벽 너머로 사라지면서 미나를 향해 웃던 얼굴. ‘꼭 다시 만날 겁니다’ 하면서, 이제 시작이라는 듯 벅차 보이는 매력적인 미소. 젊음을 되찾고 나서부터 불그스레함이 더 진해진 눈가가 매끄럽게 휘며 웃음 짓는데, 으으.


4. 이리와요, 이리와요. 내 사랑.
뒷면으로만 망토가 덧대어진 검은 자켓을 입은 어둠의 지배자. 부드럽게 속삭이는 몽환적인 주문. 극을 보면서 쾌감에 겨워 눈물 날 것 같은 순간이 참 많은데 여기도 그렇다. 드라큘라라는 소재가 이렇게 숨 막히는 걸 줄은 몰랐다. 숨 쉴 수가 없어요.


5. 역에서 재회, 검은 롱코트에 하얀 프릴 블라우스. 
일전에는 무례했다며, 스스로의 열정이 통제가 안 될 때 있다고 서둘러 서둘러 변명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너무너무 귀엽다. 아이 같아. 뱀파이어가 이렇게 순수할 수 있다니.


6. She
그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며 애원하다가, 분노를 터트려내면 나는 또 한 번 흥분의 독에 빠진다. 두 번 봐도 심장에 무리가 온다. 작은 십자가 뿌수는 거 왜 이렇게 멋있어요? 단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은 어떻고? 

아, 노래를 마친 후에 ‘진실을 알고서도 이전의 삶을 선택하겠다구요?’ 대사에서 ‘진실을 알고서도’ 부분을 오늘은 하지 않았다. 바뀐 걸까?


7. 오늘 1막 최고의 넘버. Loving You Keeps Me Alive.
She에서부터 잔뜩 애원하고, 분노하고, 처절히 사랑했던 나머지 머리가 완전히 헝클어져 있었다. 웨이브 넣은 머리가 땀에 젖어 착 가라앉았을 때의 그는 정말 눈부시게 예쁘다. 빨갛고, 하얗고, 창백하게 질려 기절할 것만 같던 얼굴. 총천연색의 시아준수. 다만 앞머리의 요동이 심해서 예쁜 얼굴을 몽땅 가리고 있었는데 그가 머리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쓰윽 쓸어넘기는 바람에 섹시함의 불의타에 당했다.

울먹울먹하다가 노래를 시작하기 위해 울음을 갈무리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는데도 그댄 내 삶의 이유, 나를 살게 한 첫 ‘사랑’에서 목소리가 울음으로 떨렸다. 이미 She에서 모든 사랑과 열정, 아픔을 소진해버린 그가 이제 마지막 남은 희망의 지푸라기를 그러쥐듯이 노래했다.

악혼자를 두고도 흔들리는 자신에게 혼란스러워하던 조정은 미나는 그의 절박한 애원에 뜻하지 않은 격랑을 맞았다. 완벽한 삶을 노래할 때까지만 해도 조곤조곤 이성으로 억눌러왔던 목소리가 높낮이를 분간 없이 달리하며 흔들렸다.

이때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2막에선 두 사람 정말 최고였다.


8. 루시의 초대
머리를 곧게 펴고 등장! 아무래도 땀에 너무 젖었던 걸까. 한결 상쾌해진 그였다. 의상은 검은 코트에 빨간 프릴 블라우스. 이때의 등장은 두 번 봐도 마지막 춤에서의 등장과 겹친다. 아름답고, 고고하고, 위험한 느낌.


9. Life After Life
뱀피를 두텁게 두른 검은 롱코트에 빨간 블라우스.

그의 노래에 맞추어 루시가 종알종알 조금씩 노래하다가 나중에는 그보다 더 격하게 내지르는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대단했다. 그리고 루시.. 귀엽던..데.. 영원한 생명을 주었다며, 그에게 고마워라 하며 폭삭 안길 때 귀여워서 웃어버릴 뻔했다. 루시가 아이처럼 안겨들자 그는 또 ‘나를 닮은 내 첫 창조물’을 어느 정도는 소중하게 얼러주기까지. 너의 세상을 만들어보라며 루시를 부추기는 그는 어쩐지 루시를 귀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마무리에는 천둥소리가 추가되어 끝을 맺는 느낌이 확실해졌다.


10. The Master’s Song.
소매가 검은 블라우스, 검은 바지. 그는 왜 물감 짜는 것마저도 섹시하지. 물감 모양마저도 섹시하게 이지러진다.


11. Mina’s Seduction
검은 코트, 백색 블라우스. 잘 차려입은 그는 꼭 예복을 갖춰입은 것 같다.

이 장면에서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데 우선은 전술한 조정은 미나의 설득력 있는 연기와 그의 연기의 맞물림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미나가.. 무릎을 꿇으며 그의 겉옷을 벗길 때였다. 진짜 진짜 충격. 그녀가 그에게 어떻게, 어느 정도로 홀려들었고 어느 만큼이나 그를 원하는지 직통으로 전달되었다. 탐닉하는 격정이 백만 배 살아나는 연기였다.

정신없이 홀려들었다가, 이성을 잠시 되찾았다가, 다시 홀려들었다가. 고민하는 순간순간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조정은 미나와 함께하는 그는 더욱 격정적이었다. 그녀의 혼란마저 그를 부추기는 것처럼 보였다.


12. It’s Over, 풀어헤쳐 진 백색 블라우스.
지배자! 어둠의 지배자! 어제보다 훨씬 긁는 소리로 날카롭게 그들을 공격했다. 소리로, 힘으로. 다만.. 그가 안개로, 박쥐로 변신하여 그들을 공격하고 수세에 몰아넣는 것은 분명 괜찮은 연출이나.. 넘버 내내 그를 보고 싶다… 흑흑..


13. Train Sequence.
붉은 깃옷. 붉은 깃옷과 함께 머리의 웨이브도 돌아왔다. 의상도 많고, 장면도 많고, 더운 공연장 때문에 땀도 많이 흘려서 극 하나에서 그가 참 바쁘다.

관이 도로 올라갈 때, 반 헬싱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그가 놀라며 손을 모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연기했다. 이미 어둠에 잠겨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도 손을 각 세워 포개며 관 안에서 잠드는 그를 보는데.. 으으… 그의 섬세함은 항상 나를 맥 못 추게 한다.


14. The Longer I Live
고뇌하는 그. 미나가 자신에게 빠져들면서도 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걸 최면 때 그도 느낀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엘리사벳사에 대한 사랑에 포개어진 미나에 대한 새로운 사랑이 고뇌를 가속시키는 듯했다.

그는 본디 고결하고 헌신적이었던 사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면서, 그 사랑 앞에 한없이 순정적이고 고결하였던 옛 본성이 발현된 것이다.

시각적인 이야기도 하자면, 무너진 성 가장 꼭대기에 올라 어두운 조명을 받으며 우뚝 선 그는 진정하게 아름다웠다. 아름다움, 파괴적인 아름다움. 영원에 멈추어 놓고 싶었던 순간의 그.


15. At Last
미나의 방에서도 미나가 무릎 꿇으며 그의 겉옷을 벗길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는데, 여기서도.. 미나가 무릎 꿇으며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충격에 머리가 다 아팠다. 순정적이면서도 똑 부러지고, 사랑 앞에 능동적인 여성. ‘드라큘라’의 연인답게 욕망과 본성 앞에 지나칠 정도로 순수한 일면. 아아…

그녀를 따라 그도 무릎을 꿇으며 그녀와 사랑의 눈높이를 함께 했다. 사무치는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내 감정도 왈칵 차올랐다. 마침내, 마침내 깨우쳐 하나가 된 마음.

그녀의 마음은 그에게 여과 없이 전해졌다. 그는 벅찬 듯이 울음했다. 아프게, 그리고 기쁘게. 그녀의 손에 단검을 쥐여주며 짧은 이별의 입맞춤을 하는 그의 얼굴이 아름답고도 괴롭게 빛났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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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4.07.19

아 그런데 의상! 프리뷰 때 생눈으로 보면서는 다 예뻤는데 망원경으로 자세히 보니까. 음. 많이 더워 보이더라.. 몇몇 의상은 조금 더 고급스러워도 좋았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뭐, 언제나 의상의 완성은 모델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