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린 토드.

먼저 해야 할 이야기는, 마이크 난 정말 화났다. 오늘 음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부분은 (많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샤죽음의 마지막 춤 하이라이트에서였다. 그의 넘버였고, 그 넘버의 절정이었다. 공연 전개상 오늘의 마지막 춤은 시기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했다. 초반의 공기가 오늘따라 수선스럽고 산만했기 때문에 극을 지배하는 죽음의 존재감을 통해 분위기를 결집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팽팽해진 공기 속에서 노래가 전개됨에 따라 공연의 분위기가 정제되어 가던 찰나였다. 마'지막' 춤의 중간 음절이 묵음 처리된 듯 들리지 않았다. 공기는 단박에 파괴되어 버렸다. 예정에 없던 실수로 인해 반전의 구심점이 해체된 것이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에서 그의 목소리를 삼켜버린 일이 한 번 있었던 만큼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실수가 있을 수는 있지만 실수가 없어야만 하는 순간도 있다. 그의 목소리를 그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에 의해 듣지 못하게 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공연 이야기를 시작하면 론도에서 엘리자벳이 화답하자 빙긋이 웃던 얼굴과 안쪽으로 멀어져 가며 웃던 얼굴이 기억의 첫머리에 있다. 멀어져 갈 때 보였던 웃음은 특별했다. 타오르는 사랑의 시작이라고 하기에는 건조하고, 마냥 즐거워 보인다고 하기에도 은밀한 기색이 강했다. 입꼬리를 정확히 올려 분명 뺨 가득 웃는데도 미묘하고 은근했다.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널 지켜보겠다. 나를 찾게 될 거야. 그의 눈이 도장으로 쾅 찍은 것 같은 확신으로 빛났다.

누군가의 아들을 삼키기 위해 날개를 펼쳐 들 때는 유난히 그의 얇은 몸통이 눈에 들어왔다. 곧고 부드러운 몸선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누군들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 춤. 속상한 만큼 완벽한 마지막 춤이었다.

어김없이 두 번의 숨소리로 시작한다. 지상을 밟은 그가 '날 버리고 미소 짓는 너'까지 노래하고는 목을 뒤로 살짝 젖혔다. 원을 그리며 나른히 풀어 보였던 고개가 새로운 장을 열었다. 마지막 춤을 시작으로 전염병에서나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에서도 고개를 설레설레 쓰는, 섹시하면서도 나른한 동작이 가미되었던 것이 오늘의 특징이다. 엘리자벳에게 다가서며 첫 번째 입맞춤을 시도하는 걸음걸이는 21일보다 훨씬 건들거렸다. 심지어 검지를 곧게 뻗어 그녀를 겨냥하는가 싶더니 검지 마디 끝을 꺾어 빙그르르 돌리기도 하고 휘휘 흔들어 젓기도 했다. 놀리듯, 주의를 환기하듯 흔들흔들. 약 올리는 것도 같고, 보는 이의 정신을 잠식해버리는 것도 같은 묘한 동작이었다. 그리고는 곧장 입술을 들이밀었다, 멀어진다. 담백한 유혹 끝에 비웃음 같은 것이 피식 흘러나왔다.

공긴 습하고 '탁'해가 돌아왔다. 고정으로 추가되길 바라봅니다♥ 깨어날 거야라며 정면을 향해 뻗었던 손을 그녀에게로 꺾으며 웨이브 짓던 손목과 팔의 움직임은 또 얼마나 황홀했는지. 마지막에 뒷걸음치며 엘리자벳으로부터 물러날 때는 21일에서처럼 허리를 잔뜩 숙이곤 검지를 뻗어 그녀에게 손짓했다. 날 기억해. 자신의 뜻대로 되리란 확신이 엿보이는 손가락이었다.

그림자는 길어지고에서 귀에 남았던 가사는 '넌 황제를 어둠 속에 빠트리고 있어'. 사실은 엘리자벳이 아닌 죽음 자신이 벌인 일에 의한 것인데도, 그는 그녀를 나무란다. 잔인하다. 그리고 어찌나 아름답던지. 존재만으로 공간을 끌어당기는 그의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그림자는 길어지고는 항상 숨이 막힌다. 그의 주위로 몽글몽글 일어나는 연기는 마치 그가 지배하는 공연장의 결집된 분위기가 그에게로 수렴하는 모양을 보는 것만 같다.

침대 위에서도 두 번의 웃음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을 거부하는 엘리자벳을 보더니 한 번 웃고, 어둠이 내리기 전 또 한 번 웃었다. 언짢아진 미간이 잠시 경직되는가 싶더니 웃는 것이었다. 정색 끝의 그 웃음은 마치 '그래,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라고 화답하는 것 같았다. 아직은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풀어주는 그의 아량(이라고 할 수 있다면)이 나를 조바심 나게 했다.

아, 오늘 처음으로 C블이었던 덕에 그림자는 길어지고와 침대 위에서의 그를 보다 정면으로 볼 수 있어서도 좋았다.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김소현 엘리자벳과 그의 어우러짐은, 어제 비로소 그 진가를 발견한 느낌이었는데 다시 봐도 새롭게 좋다.

시작은 더 이상 인형이 아니라 말하는 엘리자벳을 내려다보는 그의 미소에서부터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리라 선언하는 엘리자벳을 지켜보는 그의 얼굴에서 조소인 동시에 기특함이 담긴 웃음이 번진다. 쟁취한 승리에 도취된 그녀를 귀여워하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한 손으로 석상을 조종해 지상에 발을 내딛는데, 이 조종하는 팔 동작과 연결되는 앞뒤 디테일이 나날이 추가되며 풍부해지고 있다. 오늘은 손을 뻗기 전 고개를 살짝 위로 올렸다 내리며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통해 스스로의 우월성을 드러내 보였다. 이렇게 그가 턱 끝을 미세하게 추켜 올린다든지, 눈을 내립떠 상대를 본다든지 하는 세세한 고개의 각도를 통해 죽음의 오만함과 우월성을 드러낼 때가 좋다. 섹시하기도 하고. 입맞춤을 시도하는 각도도 꼭 이렇다. 야한 곡선을 그리며 농밀하게도 다가섰다, 다시 매끄럽게 물러선다. 조종씬은 또 어떻고. 손끝을 붙여 그러쥐고는 차례로 엘리자벳을 감싸 안을 때의 부드러운 포악함은 봐도 봐도 좋다.

그리고 V자 군무를 정면으로 볼 수 있어 기뻤다. 그의 강약약 강약약 스텝과, 다가서는 얼굴ㅠ 그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녀는 대체 어떻게 그를 뿌리치는 거지. 그 자신도 자신과 이만큼이나 대치하게 된 그녀를 기특해 하는 것이 보인다. 할퀼 것처럼 다가섰다가도 아지랑이처럼 부드럽게 물러나는 거듭되는 움직임을 보면.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소리치고, 쳐내고, 맞서보고자 해도 주도권은 그에게 있다. 노래 마지막에 이르러 그가 무대 가까이로 나오며 엘리자벳 쪽을 향해 손을 세게 내저으면, 그녀를 에워싸는 죽음의 천사들이 그것을 확인해준다. 이때 유독 절도 있게 펼쳐내는 팔이 자릿한 만큼 섹시하다.

그리고 처음 듣는 소리가 하나 있었는데 정확히 어느 가사였지..

전염병의 그는 내내 즐겁다. 진찰 직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벌어진 입 틈으로 날름하는 혀를 보았다. 누워있는 엘리자벳의 얼굴을 감싸 쥘 듯 움직이던 손과 함께 퍼지던 옅은 숨결에는 만족스러움이 있었다.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를 희롱하던 '그야 물론'은 또 어떻고. 누가 한 일인데, 어림없다는 듯 그녀를 비웃는다. 곧이어 모자를 벗는데, 아! 오늘 처음! 모자를 벗고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했는데 우왕! 근육을 푸는 것처럼 은근하게 움직이곤 코트를 마저 벗었다. 와 섹시해! 이윽고 드러난 몸매에 할 말을 잃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염병에서는 항상 그의 몸매에 많은 것이 휘발된다.

엘리자벳과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이후, 남편의 배신이 나를 일깨워줬다고 절규하는 엘리자벳을 지켜보며 브릿지로 서서히 돌아가는 그는 숨김없이 웃었다. 그녀가 부들부들 떨수록 그래, 그래야지 하고 부추기는 것 같은 얼굴에서 즐거움이 빛난다. 브릿지 위로 올라서서는 그녀를 보다가 불현듯이 고개를 돌려 옆면을 보곤 또다시 얼굴을 빙 돌려 으쓱했다. 마치 대단원 하나는 이루었다는 듯 개운함이 엿보였다.

전염병에서의 그가 즐거운 만큼 오늘은 나도 즐거웠다. 18일의 그가 너무도 잔혹하여 안타까웠다면, 오늘은 망가져 가는 그녀와 그녀 주위의 모든 것들을 그의 시선을 통해 흥겹게 바라볼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웠어.. 신 난 그를 보는데 흥이 마구 샘솟았다.

내린 토드로서는 두 번째인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나빗짓으로 루돌프를 꼬여낸 직후 뒤돌아서서 '어리석은 인간'이라 비웃는 것만 같던 얼굴이 능청스럽게도 일그러졌다. 이쯤이야~ 하는 듯이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였다가, 이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완전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단히 짧은 순간이었는데 그 안에서 대체 몇 개의 마음과 표정을 보여준 것인지 보면서도 아, 이 부분에서 이렇게 많은 표현이 가능했던가 싶었다. 계단으로 올라 무너지는 이 세상이라 일갈할 때는 위쪽 계단에 중심을 둔 탄탄한 허벅지에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던 오늘의 장면은 계단 위에서 루돌프를 짓누르며 정면을 노려보던 그다. 포획물에게는 시선을 둘 필요도 없이 한 손이면 충분하다는 듯, 정면 어딘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는 혹독하고 무자비했다. 코끝을 추켜 세우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와 함께 루돌프를 짓이기던 손은, 어떻게 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고압적으로 아름다웠다. 분명한 목적을 담고 빛나는 눈동자가 자신이 예정한 절정이 다가올 수록 반짝였다.

음모에서 루돌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부릅떴던 눈동자!! 는 C블에서 정면으로 볼 수 있어서도 좋았다.

마이얼링에서 들어 올려질 때의 그는 유난히도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그의 몸이 올려지는 단계에 맞추어 밝아지는 조명이 그의 정수리로 떨어지는데, 꼭 색채가 입혀지며 비로소 드러나는 죽음의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총구를 겨눠주는 것은 여전하다. 아랫입술에 들어간 힘에서, 이것조차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애송이를 하찮게 여기는 그가 느껴졌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떨리는 눈동자와 마주쳤을 법도 한데 흔들림 없는 냉혹함으로, 죽을 자의 입술을 머금었다. 쓰러지는 루돌프를 입술이 닿았던 그 자세 그대로 멎은 채 어둠 속으로 잦아들던 모습까지 그림 같았다. 희미한 조명만을 받고 있던 그 찰나의 옆모습이 죽은 자를 진득이 관찰한다.

추도식의 깊은 절망은, 이제는 엘리자벳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녀의 감정이 그에게 흡수되어 그를 동요케 한다. 저 위에서 그녀를 향해 뻗어지는 손에는 머뭇거림과 떨림이 있다. 그가 인간, 엘리자벳의 감정에 스스로를 휘감기도록 허락하는 유일한 순간이다. 혼란스러움과 함께 떨쳐내지 못하는 의문도 있다. 네가 선택한 일이고, 내가 너를 위해 한 모든 일인데 어째서. 라고 묻는 것도 같다. 자신의 동요를 마침내 쳐낼 때의 단호함에서조차도 그를 혼란스럽게 하는 물음표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유난히 마음을 두드렸던 행복은 멀리에. 왜 이렇게 슬펐는지.. 죽음이 망가트린 모든 것이 너무도 공허하고 애달프게 느껴졌다. 엘리자벳 자신이야 죽음을 영혼의 친구로 여기고 일생 갈망했다지만, 그저 그런 그녀를 사랑했을 뿐인 프란츠 요제프는 그녀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마는데.. 사랑한다는 그의 메아리가 안타까웠다. 그래서 바로 이어지는 신에서 그가 드디어 죽음을 만나게 되는구나.. 했다. 엘리자벳과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처참하게 망가져 내리면서, 그 역시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인가.

행복은 멀리에로부터 활시위를 이어받은 질문들은 던져졌다는, 가히 최고였다. 그는 온몸으로 화를 내며 기뻐하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비아냥과 증오가 기쁨과 뒤엉켜 화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프란츠 요제프,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지만 그의 악몽에 사로잡힌 인간에 불과한 것. 루케니를 이용해 때를 움직이겠다며, 갈망하던 때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그의 눈에서 광기 어린 갈망이 번뜩였다. 최후의 순간, 합스부르크의 문장을 박살 내던 손에서 감출 수 없는 환희를 보았다.

마침내 끝.

오늘의 베일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물기가 묻어있었다는 말로 다 하기에는 부족하다. 그의 먹먹했던 얼굴과 그와 엘리자벳이 서로를 바라보던 얼굴에 담긴 갈망. 그것이 빚어내던 여운. 내도록 원했던 단 하나를 가지게 된 여인과, 찰나를 통해 그것을 영원히 잃어버린 그.

엘리자벳이 그에게 닿기 전에 울컥하여 밑으로 쳐지는 그의 입꼬리를 보았다. 촉촉한 눈빛이 두리번거리듯 연신 그녀를 향했다. 걸음걸이조차도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그녀를 향해 뻗은 손에서는 끝을 예감한 그의 떨림이 있었다. 추도식의 그와도, 론도와도, 백 년 후 프롤로그의 그와도 완전하게 맞물리는 마지막이었다. 론도에서 비롯된 죽음의 호기심이 갈망과 집착으로 타오르고, 마침내 단념과도 같은 입맞춤으로 이어지는 최후의 순간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를 불쌍하게 여겼던 것이 겸연쩍을 만큼 그가 아팠다. 모든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녀를 위해 선사하는 입맞춤이 서글펐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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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23

행복은 멀리에-질문들은 던져졌다-베일은 떨어지고
완벽한 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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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26

문틈에 걸린 드레스 자락을 빼내던 새침한 김소현 엘리자벳의 얼굴이 자꾸 생각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