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태 배우의 밀크는 그 어느 날보다 좋았다.
옥주현 엘리자벳의 나는 나만의 것, 아무것도도 역시. 두 엘리자벳은 각자의 장단점이 있지만 이 두 넘버에서는 항상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김선영 엘리자벳의 나는 나만의 것은 다른 때보다 강하게 폭발하는 느낌이라 신선했다.

26일의 토드는 무섭고 사나웠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한없이 섹시했지만 길게 뺀 눈화장이 악랄함을 돋보이게 했다.

낮공에서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침대씬에서의 즐거워 보였던 죽음의 표정. 이전까지는 항상 공들여서 유혹하는 중이란 느낌을 받았는데 26일 낮공에서는 유희를 즐기는 사악함이 엿보였다. 미세하지만 큰 차이로 악랄해졌다. 엘리자벳의 거절 이후에 이어지는 정색은 점점 싸늘해진다. 온몸으로 정색을 뚝뚝 흘려내는 시아준수라니. 그리고 역시 침대씬에서만큼은 옥주현 엘리자벳의 과격한 해석이 좋다. 토드의 정색을 훨씬 더 극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낮과 밤 모두 와이어에 매달려 종을 쳤고, 루돌프의 장례식에서는 앉은 채로 등장했다. 오른쪽 단관석에서는 왼쪽 리프트에서 등장할 때 정면으로 볼 수 있어 좋았는데, 루돌프의 장례식에서 오히려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던 죽음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깊은 고통 속에 절망하는 것은 엘리자벳인데, 죽음도 만만치 않게 괴로운 얼굴이었다. 또 어린 루돌프와 대면하기 전에 침대 뒤로 돌아가는 모습을 어둠 속에서 보았다. 침대 틈으로 그의 발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도!

전염병에서는 역시 광기가 빛난다. 모자로 그늘이 드리워진 눈동자는 자세히 보니 매 순간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늘이 져서 그랬는지, 동그래진 눈동자 안에서 쏟아지는 눈빛이 엄청 매서웠다. 낮공에서는 옥주현 엘리자벳이 손을 몸 안쪽으로 굽히고 있는 바람에 토드가 그 손을 자기 쪽으로 데리고 와서 진맥을 시작해야 했던 깨알 같음이 있었다.

내가 춤추고 싶을 때는 엘리자벳의 손목을 휘어잡았어야 하는데, 엘리자벳이 너무 거세게 팔을 휘두르는 바람에 놓쳐서 살짝 버벅댔다. 나중에 자연스럽게 다시 잡긴 했지만 숨길 수 없는 소소하고 귀여운 실수.

시아준수가 모든 면에서 토드가 되어가는 중임을 이때 석상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느꼈다. 낮공보다는 밤공에서 더 두드러진 이때의 연기는 사소하지만 대단히 토드다운 것이었다. 턱 끝을 살짝 치켜들고, 오만하게 반쯤만 내리깐 시선 처리와 옆으로 비틀어 선 자세. 석상의 리프트를 조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손잡이 위에 우아하게 걸쳐둔 손. 리프트가 완전히 내려올 때까지 그렇게 부동의 자세를 유지했다가 무대 위로 안착한 순간 죽음의 걸음걸이를 내딛기 시작한 찰나까지. 이 사소하지만 섬세한 연기에서 시아준수의 토드화를 느꼈다. 계산해서 한 연기라기보다는 그 상황에서는 단지 토드로서 자연스럽게 취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다소 놀라운 발견이었다. 사실 첫공에서부터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빙의되었다고도 하는) 완벽한 죽음이었다. 머리로 계산해서 연기할 수 있는 범위의 토드는 첫공에서 이미 다 선을 보였다 생각했을 만큼. 석상 앞에 서서 엘리자벳을 볼 때의 시선 처리, 손짓, 상체의 기울임 같은 디테일은 첫공에서부터 훌륭하고 능숙하게 보여주었던 연기다. 그러나 캐릭터의 정립과 그 캐릭터가 거듭된 공연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듯이, 더 풍성해진 죽음으로서의 시아준수를 26일에 보았다. 첫공의 샤토드가 준비기간 동안의 시아준수의 해석을 반영한 순도 100%의 죽음이었다면 26일의 샤토드는 무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살이 붙은, 그야말로 물이 오른 죽음이었다.

22일의 후기에서도 썼지만 걸음걸이의 변화 역시 이를 반영한다. 첫공의 시아준수가 '죽음처럼 보이기 위해' 어슬렁거리듯 걸었다면 이제는 정말로 그 자신이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걷는다. 그렇기에 첫공에서는 다소 절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던 움직임이 22일을 기점으로 해서는 완전히 자유로워져서 때로는 과감하게 건들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놀랄만큼 섹시하기도 하다. 싱글즈 인터뷰에서 시아준수가 언급한 죽음의 해석-젊고 섹시한데 약간의 악랄한 느낌이 풍기는-을 따라 토드화가 진행된 것이다. 그만의 부드럽고 유연한 몸놀림으로 꼭 물결이나 아지랑이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섹시한 죽음으로서.

워낙에 여러 조합이 가능한 캐스트가 공연을 하다보니 뮤지컬 엘리자벳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완벽한 공연을 올린 적이 없다. 일부 배우의 경우 아직까지 캐릭터를 구축 중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날짜에 따라 기복을 보이기도 하는데 시아준수는 이런 극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캐릭터와 극 속으로 녹아들고 있다. 22일에도, 26일에도 내가 본 샤토드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완전하게 완성된 극 속으로 융화될 준비를 끝낸 연기를 분명 보았다. 그러니 이제는 극이 정립을 마치기를 기대하며, 기다릴 뿐이다.

사족이지만 첫공에서 절제되어 있었던 움직임은 (첫공만의 긴장도 한몫을 했겠지만) 아마 시아준수가 초반에 해석한 '신처럼 멋지게 표현한 걸음걸이'의 일부는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섹시함과 중후함의 중간 지점에서 약간만 섹시함으로 치우친 죽음의 느낌이었달까. 요즘의 샤토드를 보면 걸음걸이도, 연기도 공연을 거듭할수록 놀랄 만큼 악랄하고 섹시해지고 있기 때문에 첫공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한없이 섹시하고 사악한 것도 좋지만(이런 시아준수를 또 언제 보겠나!) 중간 지점의 연기도 좋았던 나로서는 첫공만의 느낌이 가끔은 그립다.

댓글 '3'

유므

12.03.02

29일 공연을 보기 전에 마무리를 했어야 했는데 지금 덧붙이기 시작하면 29일 공연과 섞일 것 같아 건드리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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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7.02.26

한없이 섹시하고 사악한 것도 좋지만(이런 시아준수를 또 언제 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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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7.02.26

섣부르고도 성급한 판단이었다. 죽음은 시작일 뿐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