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이 동일한 밀도로 좋은 공연이었다. 배우들의 컨디션도 좋았고 무대에서 전해지는 공기가 전반적으로 완성형의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벨라리아나 질문들은 던져졌다에서 이전보다 강해진 윤영석 배우의 연기나, 이정화 배우의 다소 연극적이다 싶을 정도로 격해진(그리고 동시에 섬세해진) 목소리 연기도 극에 활력을 더해주었다. 김선영 배우가 초반에 기복이 있어 위태로웠던 것만 빼면 낮과 밤의 전 캐스트가 훌륭했다.

그리고 18일과 28일에 이은 깐토드. 아름답다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한 것 같으니 이제는 근사했다고 표현해볼까? 아니면 멋있다? 눈썹을 그리니 더욱 정교해진 그의 아름다움에 어울릴 표현이 있기는 한가? 시아준수의 죽음은 대체 어디까지 멋있을 예정이지? 언제부터 죽음의 신이 아름다움까지 관장을 했던 건지.

때문에 1일의 공연이 일차적으로 남긴 것은 골반과 눈썹, 그리고 콧대. 안쪽에 각을 세워 그린 눈썹이 다른 토드들과 비슷했는데, 옅은 갈색으로 부드럽게 덧발라서 과한 무대분장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깐토드일 때의 유일한 문제는 역시 얼굴만 보다가 시간이 다 가버린다는 것인데, 그날 따라 유독 얼굴만큼이나 시선을 붙잡았던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도드라지게 존재감을 과시하던 골반.. 하략.

시각적인 충격은 그가 죽음을 처음 선보인 날 대부분 전해받았다 여겼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머리를 내리고 올리는 것에서부터 분장과 자잘한 악세사리의 교체까지. 시아준수의 죽음이 그간에 보여온 크고 작은 변화를 모두 모아보면 그가 이 길고 긴 공연에 임하는 자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너무 좋다. 선천적인 재능에, 그것을 갈고 닦는 열정에, 또 그 재능만큼의 노력이라니.

공연 이야기를 하자면, 프롤로그에서 마지막으로 엘리~자벳을 부를 때 눈을 맞은 것을 시작으로 아이컨텍이 많았다 하하하 >_<

낮공 <마지막 춤>의 시작부에서 음이 다소 파편처럼 출렁거리자 순간적으로 시아준수가 음을 가다듬으며 소절을 이어갔다. 죽음의 천사들을 엘리자벳에게로 보내면서 노골적으로 섞여내던 숨소리는 그날 따라 미약하고 은근했던 반면 본격적으로 마지막 춤을 출 때부터는 폭발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세상은 늙고 지쳐 죽어가고"의 마지막에 떨림음이 길게 들어가는 동시에 거의 목을 조를 듯이 손을 모아 두 팔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고, 마지막 춤! 마지막 춤! 하면서 김선영 엘리자벳에게 달라붙을 때의 표정은 무섭게 희번덕거려서 꼭 미친 사람 같았다. 나도 모르게 김선영 엘리자벳에게 빙의해서, 시아준수의 흰자가 번뜩일 때마다 소름이 돋았는데.. 아, 시아준수가 달려들 때의 그 표정을 한 번 정면으로 받아보고 싶었다. 엘리자벳으로서 샤토드를 대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마지막에 리프트 위에 올라타서는 "우리 둘이~서" 사이에서 한 번 숨을 몰아쉰 다음 매우 길게 빼서 내질렀다. 지상에서도 대단했지만 리프트 위에 올라서서는 사람 같지가 않아서. 정말이지 과실이 톡톡 터트려지며 열리는 것처럼 폭발하는 마지막 춤이었다. 여운이 남달랐어.

밤공에서는 옥주현 엘리자벳과 김선영 엘리자벳의 어깨 등지를 다룰 때 시아준수의 팔에 들어가는 힘의 차이를 확연하게 보았다. 항상 그 힘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옥주현 엘리자벳의 면사포가 뜯겨지곤 했는데, 밤공에서는 어깨를 휙 젖히다가 면사포가 손에 걸리는 걸 느꼈는지 순간적으로 힘을 빼고 손을 거두어 들여서 드물게도 머리장식이 무사했다.

이어지는 <황후는 빛나야 해>에서 이정화 배우의 조피는 약간 과장스럽다 싶을 정도로 가사마다 톤이 달랐다. 완전히 연극적인, 연기하는 톤이었는데 그것이 전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건 전적으로 이정화 배우의 맛깔나는 목소리와 강약의 조절 덕분이었다. 허용범위 내에서 초반에는 최대한 강하게, 후반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약하게. 입체성을 살린 조피는 꽤 설득력이 있는 인물이다. 낮공의 벨라리아는 정말이지 슬펐다. 아아, 앞서 프란츠 요제프가 등장하고 나서 아들을 향해 내게 맡기렴, 얘야 내게 맡기렴 하며 노래할 때도 이정화 조피의 목소리는 귀에 콕콕 박혀서 좋다.

김선영 엘리자벳은 위태로워 보여도 항상 <나는 나만의 것>이나 <아무것도>에서는 어떻게든 자신의 몫을 소화해내고는 했는데 1일에는 두 넘버 다 썩 와 닿지 않았다. 아무것도에서 김선영 엘리자벳의 신경쇠약에 걸린듯한 가녀림과 강한 '척'하는 고고함을 좋아하는데 그것도 크게 어필이 되지 않았다. 아, 1일만의 특별(?)했던 "자유를~"도 적어둔다.

<행복한 종말>에서 카페의 손님 사이를 누비다가 죽음을 발견하고 오잉? 내지는 피식하는 동작을 취하는 것은 역시 박은태 배우의 루케니뿐인 듯하다. 그렇지만 오랜만이라 그런가. 2월에는 박은태 배우와 시아준수의 죽음이 극 중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공모하는 느낌을 주었던 데에 반해 3월 이후의 공연에서는 그런 느낌을 거의 받지 못해 아쉬웠다.

그리고 왜 그날 따라 1막과 2막의 마지막 넘버에서 울컥했던 걸까. 오늘의 아픔도 내일이면 과거가 돼, 할 때 시아준수의 저음이 너무 좋다. 감정을 막 건드려.

키치에서 "황실을/씹어/대면서"에 맞춰서 팔을 앞으로 펼치며 덩실거리는 건 은케니만의 안무인 것 같은데(최민철 배우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고, 김수용 배우는 확실히 하지 않는다.) 그 동작이 묘하게 박은태 배우에게 어울려서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은케니의 "전쟁과 아나키즘이!"할 때 아나키즘에서 강하게 들어가는 악센트. 귀에 확 박힌다. 아/나/키즘!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는 낮과 밤 둘 다 "내가 없이 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의 톤이 달랐다. 내가 없이에서 버럭 화를 내고 아무것도까지 또박또박 강하게 받아치는데 죽음의 분노랄까.. 자신을 자꾸만 거부하는 엘리자벳에 대한 격한 감정이 그대로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그리고 이 넘버에서 두 사람이 세 걸음씩 주고받으며 대치하는 건 봐도 봐도 좋다. 이때 시아준수의 걸음걸이가 사뿐사뿐 다가섰다가 엘리자벳이 밀쳐내기 시작하면 반쯤은 당황한 듯이, 또 반쯤은 튕김을 기꺼이 받아주겠다는 듯이 살포시 뒤로 물러서는 데 매번 생각하지만 너무 신사 같다. 살짝 들린 어깨도 근사하고. 뒷걸음질할 때 동그래지는 눈이나 허공에 우아하게 놓인 손이 마치 어어 이것봐라? 내지는 그래, 여전히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어디 한 번 할 수 있는 만큼 해봐,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 그녀나>에서 절정이었던 이정화 조피의 강한 연기. 매우 파워풀하셨다. 여기서 항상 귀에 박히는 가사는 묻겠노니!

<내숭 따윈 집어치워요>에서도 박은태 배우만 하는 동작이 있다. 모자를 쓰고나서 챙을 중앙에서부터 가장자리로 한 번 쓸어내는 것. 이런 사소한 동작들이 배우들의 캐릭터를 어떻게 차별화하고 있는지 지켜보면 재미있다. 최민철 배우는 의외로 이 넘버에서 유일하게 던져지는 지팡이를 잡는 루케니다. 아니 그런데 밤공에서는 왜 김수용 루케니에게 지팡이를 주지 않았나요? 지팡이를 받으러 오른쪽으로 갔다가 지팡이가 나오지 않아서 허전하게 되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김수용 배우가 타이밍을 잘못 계산한 줄 알았다. 결국 그날에는 지팡이 없이 많은 안무를 즉흥적으로 처리해야 했는데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당황할 법도 한데, 김수용 배우도 순발력이 좋으신 듯!

<전염병>에서는 낮과 밤 둘 다 목걸이를 받지 않았고, 밤공에서 옥주현 엘리자벳은 만루 홈런을! 아아, 낮공에서는 암전된 후 뛰어 올라가다가 휘청해서 놀랐다.

여기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매회 최고를 경신한다. 버럭! 하다가도 소리를 매끄럽게 끌어내고, 목을 잔뜩 긁으며 내질렀다가도 은근하고 음산하게 잦아들고. 세상을!!!! 구원해~ 하고 나서 흐흐핳하하 하며 잦아드는 웃음으로 연결하는 건 28일에 이미 시작했던 건데 1일에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이어지는 "그것이 운명"을 낮공에서는 운며어어어어엉하고 쭉 뽑아낸 후에 다시 크으아아하 긁빗듯어 포효하는 소리로 이어가며 상체를 뒤로 젖히는데.. 갈수록 강해지는 절정이란 이런 것임을 느꼈다. 그리고 견고한 저음! 루돌프를 잡아먹을 듯이 카랑카랑한 고음도 좋지만 폐부로 스며드는 연기처럼 낮게 깔리는 저음도 너무 좋다. "후회만 할 뿐"이 음을 타고 내려가는 부분이 또렷하게 귀에 박히는데 섹시해서 소름이 돋았다.

음모에서 루돌프를 파멸로 이끌고 나서는 그 이상으로 사악하게 웃을 수가 없었고, 마이얼링에서는 퇴장할 때 낮은 웃음이 추가되었다. 낮공 때는 총쏘기 직전에 마이크를 통해 숨소리가 여과없이 흘러나와서 좋았다 ^.^

<베일은 떨어지고>에서는 김선영 엘리자벳이 또다시 자켓 안으로 파고 들었고, 옥주현 엘리자벳과는 그나마 강도가 약해졌다. 이름 붙이기를 보류한 마지막 장면에서의 눈빛에선 시아준수의 큰 눈이 또르르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데 그건 죽음으로서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갈피를 찾는 눈짓인 걸까. 눈물이 흘러내리지는 않지만 항상 물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허공을 배회하다가 정면의 객석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막이 닫힌다.

댓글 '3'

belle

12.04.04

대체 온라인에서 얼굴을 볼 수가 없는데 후기는 언제 쓰시는 거예요?!

우유

12.04.05

이동시간에 폰으로요 ㅋㅋ 집에 오면 새벽이라 컴으로는 쓸 시간이 없어서 폰으로 쓰기 시작한 건데 처음엔 너무너무너무 불편했지만 지금은 덕분에 쿼티 자판 치는 속도가 꽤 향상된 느낌이예요. 역시 하다 보면 안되는 건 없어~

belle

12.04.04

1일 후기는 왜인지 모르게 읽히는게 아니라 귀에 들리는 것 같네요ㅎ 아래로 내려올수록 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