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회의 대장정. 데스노트로 이미 겪어보았기에 더욱 길고도 멀게 느껴졌던 두 달. 여한 없이 사랑하였으므로 보내주는 길에 먹먹한 아림은 있을 지언정, 이처럼 서글프게 울적할 줄은 몰랐는데. 이별은 늘 이렇게 알 수 없는 감각 속에 나를 남겨둔다.

도통 평시의 기운을 회복하지 못하는 내게 어머니가 물었다.

"무슨 일 있니?"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젓는 나를 보던 그녀가 잠자코 내 곁에 앉았다. 협탁 한쪽으로 밀쳐져 있던 라디오 리모컨을 꼬옥 쥔 손을 몇 차례 까딱이던 그녀가 이내 전원 버튼을 꾹 누르며 말했다.

"우리 딸, 이 노래 좋아하지? 같이 듣자."

적막하던 실내에 빛이 스며들듯 어느 목소리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어떤 풍경이 나를 찾아왔다. 저 멀리 건물 사이로 지는 석양, 막히는 거리, 고요한 택시 안, 비 오는 유럽의 도심. 아주, '기분 좋은' 비가 오는 어느 날. 진혜림의 a lover's concerto였다. 15년 연초, 함께 차를 나눌 적이면 늘 선곡해두었던 노래를 그녀는 기억한 것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 나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또 설레기도 한다'고 말했었다.
아니,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내 삶 곳곳에 매복해있는 그의 기억을 어머니의 인도로 맞닥뜨리게 된 기분이 묘했다.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보았다. 무엇이든 좋으니ㅡ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은 그녀의 눈이 보였다. 사랑이 가득한 그 눈이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왔다.

마치 그해 연말의 그처럼.

"예뻐서 좋아해요."

대답하는 나는 웃는 얼굴이었을까.

"이 노래."

아마 그랬겠지.

"사랑이 넘쳐서 좋아요."

그 사람.

웃음 묻은 어머니의 손이 내 손을 잡아왔다. 간질이듯 손등을 매만지는 온기가 참, 좋다ㅡ고 생각했다. 그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노래하는 음성을 따라서는 그의 기억을 좇으며 고개로 가만가만 음을 탔다. 

온기로 한 겹 메워진 마음이 이별할 용기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이별의 끝에 지난여름을 보내겠지만, 겨울의 그와는 재회할 터이니 서글퍼만 할 까닭은 없는 것이었다.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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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11.02

그러니 이별을 시작해. 도리안, 우리 이제 헤어지는 거야. 이 계절에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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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11.02

무대인사. 도리안의 얼굴로 시아준수의 눈으로 웃는 모습 너무나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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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11.03

서글픔의 하나는 12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16년을 재차 확인한 것에도 있었다.

단 하나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나 자신. 6년의 담금질은 나를 단련시켰고, 나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은 단단해졌다. 그것으로 당신과의 걸음을 지켜냈고 마지막 순간 당신이 '그'를 보내는 호흡을 공유했다.

나 자신을 지키며, 당신으로부터 이탈되지 않고, 마음의 온도를 맞추어 나란히 걷는 것. 

4년 전의 나는 할 수 없었으나, 16년의 나는 견지해낸. 

당연하고도 소박하나 결코 쉽지만은 않은 바람.

16년의 도리안 그레이와의 이별을 이렇게 끝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면, 뮤지컬 엘리자벳의 기억 또한 조금쯤은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이별의 과정은 도리안 그레이와의 안녕인 동시에 엘리자벳과의 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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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11.03

그때쯤이면 초연 막공의 베일은 떨어지고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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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7.04.25

그립다 도리안. 할 수만 있다면 너의 계절을 영원히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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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7.04.25

영원을 바랐던 건 시아준수가 아니고는 네가 처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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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2.04.04

4월 4일이니까. 네가 나에게로 가장 처음 와주었던 그날이니까, 이 마음에 형체를 입혀볼게. 그립구나 도리안. 너를 제외한 오빠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두세 번째 삶을 살아간다. 너는 어디쯤 오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