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연 첫공이 주는 감회가 이런 걸까 싶었다. 그가 엘의 톤으로 대사할 때마다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 발음, 이 톤, 이 억양. 도리안이 아닌 '엘'. 기억을 되살려 온 그는 다시 엘이 되어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이 충격을 뭐라 말해야 하지? 엔딩이 남긴 타격을 어떻게 소화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극이 달라진 건 없다. 때문에 너무도 익히 알고 있는 흐름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따가웠다. '넌 쓰여진 대로 하는 거야'는 라이토의 비아냥에 자신의 텅 빈 왼손을 내려다보는 순간부터였나. 아니면 공허한 왼손과 살인 무기를 쥔 오른손을 번갈아 보는 시선에서 그의 혼란을 읽어낸 순간부터?
아, 재차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는 그를 목격할 즈음에는 내 심장이 조각난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다 보였어'의 목소리는 어째서 그렇게나 아름다웠던 걸까. 첫 마디를 듣는 순간 죽음의 게임만큼이나 사랑하였던 넘버가 되돌아왔다는 감격과 함께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기분이 들었다. 극 중 가장 아름답고 고운 목소리로 끝을 받아들이는 그를 보는 심장이 아팠다. 한숨결처럼 흩어지는 목소리에 자기 확신과 체념이 함께 깃들어 있는 것이 쓰렸다.

엘에게 가해지는 운명이 야속했다. 그 가혹함을 견디고 보기 '힘들다'고 느꼈다. 동시에 혼란스러워졌다. 왜지? 의문에 빠졌다. 초연의 나는 이 장면을 어떻게 견뎠던 걸까?

혼란과 분노, 좌절과 의지가 뒤엉킨 그 눈ㅡ그것도 앞머리카락이 드리운 그림자에 반쯤은 가려 형형한 빛으로나마 감지할 수 있는 그 눈빛ㅡ이 따가웠다. 아마 생애 처음으로 육신이 제 의지를 배반하는 경험을 하는, 그래서 더 충격이 큰 듯한 눈동자 속 회오리가 자꾸 나를 타격했다.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총구와, 스스로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운명, 선 채로 죽는 모습 그 이상으로 '피동적인 스스로에게 놀라는 그'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쓰여진 대로 할 뿐인 스스로에게 놀라고 좌절하고 화를 내는 그 눈이, 의지를 배반하는 육신을 통렬하게 깨우치는 그 눈동자가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
쓰러지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해, 라이토의 손에 밀쳐져서야 풀썩 넘어가는 순간에는 극에 남은 장면이 있다는 것도 지워질 만큼 마음이 하얗게 탔다. 머리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긴 직후, 죽음이 스며드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는 눈동자가 극 중에서 그의 눈을 가장 잘, 가장 오래 볼 수 있는 순간인 것도 너무했다.

아, 그런데. 그런 그를. 그런 그에게 류크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짐짝을 건드리듯 툭 쳐낸 발짓에 덩그러니 밀린 육신이 아예 대자로 누워 있는 것을 확인하니 대번에 화가 났다. 이 모든 사단을 야기한 자가 엘을 저렇게 대할 자격이 있나. 모든 것이 재미없고 따분하기만한 류크가 인생을 바쳐 살아온 엘의 죽음 앞에 저럴 수 있나.

괴로웠다.
극이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의아했다.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걸까 싶었다.

아무리 재연의 '첫공'이라지만, 초연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재연'과의 다시 만남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선사할 수 있지? 이 변화가 당신의 '엘'에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어떤 요소들이 이렇게까지 날카로운 감각으로 닿아오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시간을 나누다 보면 알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설혹 마음이 깨지는 한이 있어도 '다음'을 포기하지 않겠다.
당신이 선사하는 감각이라면, 그것도 당신의 '공연'이 선사하는 감각이라면 무엇이든 좋으니까.

덧. 어쩌지 시아준수. 이번에야말로 두 엘의 합당은 요원할 것 같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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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7.01.05

초연에는 몇월며칠의 '샤엘'이라고 썼지만, 이번엔 어쩐지 엘이라고 쓰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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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7.01.05

(+) 레몬, 딸기.

에이틴 3월호에 나왔었죠? 비키니 사진 보고 밤새 쌍코피 터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