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었다. 어제 본 환영일까 싶은 찰나의 미소 같은 게 결코 아니었다. 무려 두 차례나 입꼬리를 분명하게 올려서 웃었다. 심지어는 검을 바라보고, 검 너머의 정면을 바라보는 눈에도 반짝이는 웃음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왜.. 왜 웃지.

어째서 저렇게 웃지.

얼핏 밝아 보이기까지 하는 웃음에 마음이 덜컹거렸다.

헛웃음 같았다.

결국에는 이 검과 단둘이서 남을 운명이었구나.. 그리 읊조리는 듯한 웃음이 허탈해 보였다.

감내하는 웃음 같기도 했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동자가,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전하고도 있었다.

반짝이는 웃음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일제히 ‘시아준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어 보이는 아더의 얼굴 너머로 그가 시아준수로서 살아온 시간들이 보였다. 웃음 너머 ‘그’의 환영이 내 마음을 모조리 헤집어놓았다.

 

*

 

1열 중앙의 음향 무엇. 완벽하게 내가 선호하는 음향이었다. 오케스트라는 거들고, 사람의 소리가 증폭되어 폭포수처럼 꽂혀 드는 소리. 깨끗하면서도 울림이 풍부하게 살아있어 소리 안에 감싸인 것만 같은 감각. 또렷하기가 꼭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쩌렁쩌렁했다. 망원경을 들어도 소리가 깎여나가지 않는 느낌이라니 말 다 했지.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술을 가득 채워주기에 원샷은 했는데 아직 술맛을 모르는 얼굴이 잔뜩 찡그려지는 대목, 역시나 귀엽다(재미있는 건 결혼식에서는 연거푸 잔을 들이키면서도 연대와 함께할 때처럼 얼굴을 찡그리지는 않는다. 그새 술이 늘었나!) 이리저리 구르면서 입술을 앙 깨무는 것도, 오뚝이처럼 굴리면 일어나고 굴리면 일어나다가 결국엔 바닥을 툭 치며 아~ 진짜아~ 귀엽게 성을 내던 얼굴도 모조리 귀여워.

 

그런데 “원하는 게 뭡니까.” 는 랜덤인 걸까? 어제는 반말이었지만 오늘은 다시 존대가 되었다. 말투에 따라 18세의 어른이기도 아이이기도 한 양단을 오고가는 느낌을 주기에 매번 쫑긋하게 돼.

 

〈난 나의 것〉. 크레셴도가 아니라 내내 포르티시모인 넘버. 아더의 분노가 내내 고집스럽게 그 얼굴을 드는 노래. 그안에서도 물론 정점은 있다. 오늘은 특히 ‘나를 시험하지 마’ 분노의 소절을 터트려내는 것과 동시에 테이블의 칼을 콱 움켜쥐어 멀린을 겨누는 동작이 정확히 일치하였을 때. 그 카타르시스. 짜릿했다.

 

〈이야기 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리허설 이후로 처음으로 망원경을 떼고 보았는데, 여기 조명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새삼 감탄했다. 멀린의 손길로 용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해갈 때 스르르 바뀌어가는 조명은 신비롭다 못해 성스러웠다. 보랏빛 어스름 진 숲속에 명멸하는 별빛, 가라앉은 고요 가운데 아더의 위로 떨어지는 찬연한 신의 계시. 아득한 흰 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아더를 보고 있자니, 각성한 숲의 요정이 이런 걸까 싶었다.

 

〈검이 한 사람을〉. 아더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인파의 한구석에서 팔짱 끼고 있는 박강현 랜슬럿을 보았다. 순간 갸웃했다. 다른 랜슬럿도 여기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가? 멀찍이 떨어진 채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에 내가 다 뜨끔했다. 느릿느릿한 맹세도 영 마지못해 하는 느낌이라.. 남의 속도 모르고 해사하기만 한 아더가 짠하기까지.

랜슬럿의 어정쩡한 맹세가 지나고, 케이와 친구들과의 화기애애함이 그래서 더 상반되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몰려와 아더를 높이 들어 안고는 빙그르르 돌려가며 왁자지껄 웃는데 기쁜 일에 함께 웃어주는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를 한꺼번에 보는 기분이었다.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오늘따라 맞장구치기 전의 버퍼링이 귀여웠다. 얼핏 지욱이를 연상케 하는 어깨로 주춤주춤, “네, 대..대단하더라구요!”

어제 인상 깊게 보았던 가슴 콩, 주먹 콩의 장면을 김소향 기네비어와의 오늘에서도 보았다. 기네비어가 달라진 만큼 새로운 느낌으로.

가슴 콩. 그녀의 손이 살짝 닿았다 떨어진 가슴께를 슬그머니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오므린 손바닥으로 빠르게 콩콩콩. 

주먹 콩. 바위산에 나란히 올라 나란히 한쪽 주먹을 쥐고 노래하다, 기네비어가 주먹을 내밀자 기쁜듯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콩!

그나저나 “그녀가 너의 왕비가 될 거야.” 멀린의 이 말이 아더 뿐만 아니라 일대에 파란을 주고, 엑터도 왕비? 되묻는 건 오늘 처음 들었네.

 

〈이렇게 우리 만난 건〉. 발각되어 끌려나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제 어쩌지.. ‘어떡해 어떡해’ 랜슬럿에게 묻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결국 떠밀려서 아무 말이나 한다는 게 색슨족이 코앞까지 왔다는 이야기. 정말일까요? 되묻는 그녀에게 아뇨, 대답하는 순간의 자신이 스스로도 웃긴 지 얼척 없어 하는 얼굴이 귀여웠다. 백미는 아무 말이나 하는 와중에도 그녀에게 어필하고 싶어서 “기네비어,” 틈새로 속삭이는 은근한 음성. 앙큼하여 귀여운데 멋있고 멋있는데 사랑스럽다. 나직하게 풋 웃고 마는 기네비어의 마음이 이해가 돼.

이어서는 랜슬럿이 활보하는 시간. 두 팔 큰 X자로도 말려보고, 양팔을 나란히 휘휘 저어도 보았다. 기네비어가 검을 가지러 간 사이에 끼어들어 ‘뭐 하는 거야, 하지 마~’ 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열심히 말려보았지만 엎질러진 물. 대련이 시작하며 풀이 죽었다가 기네비어의 반전에 두 눈 휘둥그레지는 얼굴의 풍부한 표정이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또 오늘 본 아름다운 조명. 기네비어가 자기도 모르게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말 때, 우거진 나무 너머 하얗게 반짝이던 햇빛에 노을이 지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듀엣이 되어 만났다. 여무는 사랑과 함께 불타듯 일렁이는 노을. 아름다운 타이밍이었다. 

 

〈이렇게 우리 만난 건 리프라이즈〉. 기네비어의 속삭임을 듣고 일어날 때의 그. 아픈 몸을 끙챠- 혼자서 일으키는 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워. 기네비어가 조금 더 빨리 다가와 일어나는 그를 부축해주면 좋을 텐데.. 싶었다. 아더 아직 옆구리가 아프다고요.

 

〈왜 여깄어?〉. 누이가 들려주는 불행에 힘겹게 젓는 고개가 너무나 착했다. 아직 쓰린 옆구리를 쥔 채, 비틀거리면서도 멀린과 모르가나 사이를 굳이굳이 파고드는 그가 너무나 상냥하다. 누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애써 위로를 전하려는 그가 너무나 다정해. 두 손 꼭 붙잡은 남매를 향하여 멀린이 뭐라뭐라 말을 하는 것도 같은데, 이미 그에게나 나에게나 전혀 들리지 않는다. 잃어버렸던 가족과 행복을 찾는다는 걸 어떻게 말리겠어.. 첫공 이후로 계속 생각하지만, 이 장면을 벌써부터 보내야 할 걸 떠올리면 마음이 아파..

 

〈오래전 먼 곳에서〉는 아무래도 시아준수에게 불리기 위해 태어난 곡이 아닐까. 갈래갈래의 소릿결로 넣는 화음의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람의 소리가 어떻게 이렇게 고결하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성결할 수가 있어. 상처 내서도, 더럽혀서도 안 될 목소리. 들을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 지켜주고 싶다.

 

“이젠, 내 아내와 함께 춤을 춰볼까?”

기네비어와의 춤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은 초반, 기네비어의 손끝이 사르르 웨이브를 타는 동작에 맞추어 그도 고개를 부드럽게 들어 올리던 순간에. 마치 한 몸처럼 이어진 곡선이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도 이 장면만큼은 아름다운 얼굴을 포기하고 전체적으로 보고 싶어졌을 만큼.

 

엑터의 죽음 이후 약간의 헤프닝은 엑스칼리버를 뽑아낼 때 그만 검이 긴 옷자락에 걸리고 말았던 장면. 옷자락에서 검을 빼내기 위해 저 멀리로 손을 휘둘러내야 했는데, 화내는 와중에도 빙 둘러서 나오는 검 끝이 우아하여 역시 왕의 혈통답다는 생각을 했다. 혹은 엑터의 품격이랄지.

 

〈혼자서 가〉는 단연코 오늘의 넘버. 시아준수가 말한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무엇인지 오늘에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서슬 퍼런 챙, 챙 소리에 처음에는 놀랐다가 점차로 무서워졌다. 아더와 랜슬럿 두 사람, 정말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었다. 지켜보는 나에게까지 그들의 싸움이 위협적으로 다가올 만큼 인정사정없었다. 친구들에게 붙들렸을 때의 몸부림은 또 어찌나 리얼한 지.. 격렬한 싸움만큼이나 씹어뱉듯 악을 쓰는 노래도 강렬했다. 어/릴/때/처/럼 다/시/붙/어/봐 합창 스타카토의 카타르시스가 이런 적이 또 없었다.

그런데 신은 날 택했어를 오늘은 “신이 날 택했어”로 불렀는데, 왜 바뀐 걸까?

 

“필요하다면 널 막아서라도.” 랜슬럿의 정색에 되묻는 음성ㅡ“...날?” 에서 오늘 느낀 건 그의 절망이었다. 

너도 나를 괴물로 보는 거야?

절망과 설움, 좌절이 한데 덮쳐오는 상황에서 그를 타이른답시고 ‘야만인과 다를 바 없다’고 말을 하면.. 기름을 붓는 꼴 밖에 되지 않지 않나. ㅠ 기네비어가 잘못했다. 랜슬럿이 잘못했다.

여기서 기네비어의 대사가 바뀌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오늘의 대사였던 “왜 내 위로조차 거부해.”보다는 원래의 “왜 위로조차 못 하게 해.”가 더 좋은 것 같다.

 

〈심장의 침묵〉. 눈앞에서 노래하는 그를 올려다보며 새삼 놀라웠다. 저 얇은 몸통에서 이런 소리가 나온다니. 그것은 어떤 경이였다. 슬픔에 겨워 휘청이는 몸을 따라 검은 옷이 팔랑이는데, 한 줌이나 될까 싶은 몸에서 끌어내는 소리가 너무나 말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끌어내는가 싶은 소리가 아무것도 없는 무대를 완벽하게 채워 넣었다. 소리 하나면 되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음을 보았다.

 

〈이게 바로 끝〉. 내 심장은 ‘속았’어. 그동안 속였어로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분명하게 ‘속았어’였다. 가사는 계속 수정되는 걸까?

모르가나가 그의 손을 살그머니 쥘 때마다 내 마음도 함께 잡히는 것만 같다. 모르가나의 손에 이끌려 비틀비틀 걸어가는 그를 잡아주고 싶어. 끊임없이 무언가를 속살거리는 듯한 모르가나와 함락당하기 직전의 아더. 결국 기네비어와 랜슬럿을 발견하고는 울부짖으며 칼을 뽑아 드는데, 아더의 뒤로 모르가나가 마치 주문을 외듯이 두 팔을 내밀면서 아더를 부추기고 있었다. 배신은 아더의 눈앞에도, 등 뒤에도 있었다.

 

〈왕이 된다는 것〉.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 천천히 정면을 향하여 내려오며 보여주었던 물기 어린 눈동자. 21일부터 도입부가 너무나 처연하다. 점점 의지를 입어가는 넘버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도입의 처연함이 이해되지만, 처창한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너무 쓰리다. 바로 앞에서 멀린에게 “랜슬럿 없이 어떻게..” 묻던 가녀린 어깨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으니..

 

〈평원에 날 묻어〉. 형, 미안해, 형. 마이크가 나오지 않아 육성을 들었다. 바득바득 긁힌 목소리가 마이크를 거치지 않고 쌩으로 귀에 와 꽂혔다. 그러고도 부족했던 걸까. 매무새를 다 다듬어주고도 ‘미안해’를 되뇌었다. 몇번이고 되풀이하는 미안하다는 말에 나는 도리어 갸웃했다. 뭐가 미안하지? 아더가 랜슬럿에게 미안할 건 없지 않나?..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죽은 이의 매무새를 다듬어주는 손길이 너무나 다급하고, 눈물 범벅된 얼굴이 허겁지겁 황망하기 그지없어, 그냥 그렇게라도 아더가 자신의 눈물을 덜어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겠다는 마음이 되고 말 뿐이었다.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 앞서서 아름다웠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기에 더 잔인한 노래. 하필 왜 오늘따라 더 처창하였는지. 노래인지 울부짖음인지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절절했다. 곱디고운 결의 목소리는 더는 없었다. 갈라지고 찢겨 너덜너덜해진 음성이 울음 하듯 말했다.

‘하지만 끝은 비극’

자신의 사랑을 비극이라 일컫는 마음이 오죽할까. 이별이라 명명하는 슬픔이 대체 어떨까. 감히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오직 샤아더 사랑해.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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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6.24

다시 들으니 그동안에도 계속 내 심장은 속'았'어 였던 것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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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6.24

어제 음향 못 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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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6.24

사람의 소리만큼은 전주 막공의 기억을 뛰어넘는 또렷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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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6.24

오케스트라와 만나 소리가 합쳐지면 울림이 생겨 뭉개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올해 뮤지컬 극장에서 만난 소리 중에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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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6.28

공연적으로 무척이나 좋았던 공연,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