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의 체인에는 또 구멍이 나 있었다. 전쟁의 상흔, 생사를 넘나든 증거. 그 몰골로 우는 그를 대체 누가 견딜까.

“카멜롯으로 돌아와 줘. 제발.” 부터 이미 울음기 역력했다.

“난 이미 용서했어.” 는 필사적인 울음이었다.

미안함에 그를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고 그녀가 고개를 떨굴 적에 그렁그렁 고여있던 눈물이 똑 떨어졌다. 그녀의 눈물에 그의 울음도 짙어졌다. 한 번이라도 더 시선을 맞추고자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추니, 간신히 다시금 마주하게 된 시선. 서로의 우는 눈을 보며 두 사람은 아예 꺼이꺼이 울었다.

서로의 뺨을 애틋하게 그러쥐는 것조차도 이 두 사람은 닮았다. 조심스럽게 뻗어보지만 차마 그의 뺨에는 닿지 못하고 어깨로 떨구고 마는 그녀의 손이나,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다가도 끝내 그리하지 못하고 얼굴 근처에서 달달 떠는 그의 손이나. 많이 닮았다. 사랑했던 마음도, 사랑을 이별로 덮어야 하는 고통도 두 사람은 함께한다. 

이렇게 사랑했던ㅡ아니, 사랑하는 이 두 사람이 헤어져야만 하다니. 이별을 심어 두 사람이 어긋날 수밖에 없게 만든 운명이 야속했다.

두 사람도 같은 마음이었겠지.

“하지만 끝은 비극.”

늘 그가 악쓰며 우는 소절에 오늘은 그녀도 합류했다. 민경아 기네비어와는 달리 김소향 기네비어는 눈물로도, 노래로도 항상 그와 함께 운다. 함께 악장치는 합창에 내 마음이 시렸다. 아, 이 두 사람이 꼭 헤어져야만 하는가. 차라리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던 것도 같은 그때, 기네비어가 뒷걸음쳤다.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 모습에서 또 한 번 느꼈다. 민경아 기네비어가 ‘정해진 운명’을 따라 그에게 이별의 역사를 지워주는 사명에 전념한다면, 김소향 기네비어는 본인이 이별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그에게서 도망한다.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만큼의 속죄를 위하여 그를 떠나야만 하는 그녀였다.

사랑이 남은 등이 기어이 남겨지는 이들을 한 번 더 울렸다.

그를, 또한 나를.

 

*

 

〈난 나의 것〉. 분노, 분노, 그리고 분노로 점철된 노래인데도 곧바르게 들린다는 게 신기하다. 이 넘버의 그가 분노하며 남탓하기보다 스스로에게 집중하기 때문일까? 아더의 불같지만 선한 단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노래다. 엑터의 말마따나 ‘우리 아들은 아직 힘이 넘친다’는 것 또한.

 

멀린의 가르침을 따라 용의 불길을 처음으로 다스려본 순간. 손안에 감도는 불길을 살그머니 그러쥐어 보는 얼굴에 놀람 반, 신기함 반, 이런 것이 가능했었나.. 하는 반신반의함이 일렁일렁했다. 온갖 표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채 손안의 잠잠한 불길을 바라보는 아더에게,

“준비가 됐다.”

다음 장을 제시하듯 그의 검을 가져가는 멀린. 회수되는 검을 멍하니 보는 눈동자에 내 마음이 울망울망해졌다. 검을 거두어가는 행위가 아더를 따뜻하게 품어준 보금자리를 회수해가는 것처럼 보였기에.

“무슨 준비요?”

평화로웠던 나날에 끝이 왔고, 이제는 운명을 향하여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직감하기라도 한듯 떨리는 목소리로 아더가 물었다. 하지만 돌아올 대답을 그는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엑스칼리버요?”

놀라서 부푸는 눈동자를 정말 오랜만의 D에서 오랜만에 보았다. 출생의 비밀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혼란과 당황 섞인 눈이 절레절레. 천년 동안 누구도 뽑지 못한 그 검을 뽑을 운명이, 나라고? 이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나를 몰아갈 셈이지, 하는 것처럼.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오늘의 소절은 ‘이 땅이 날 부른다면 용기를 다 끌어모아.’ 용솟음이 이럴까 싶은 소리였다. 항구에 정박한 거대한 배의 고동 같기도 했다.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요란하게 등장한 기네비어와 일행들. 친구들과 기쁨의 여운을 만끽하던 아더가 그녀들을 발견하고는 속닥속닥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예쁘다아~.” 오랜만의 D라서 볼 수 있었던 여기, 이 웃는 얼굴.

“그럼요, 대단했어요.” 시치미 떼고 웃음 훔치는 손가락은 오늘도 보았다. 기뻤어. 예쁘니까.

 

아, 그리고 오랜만의 김소향 기네비어. 그녀일 때 목격할 수 있는, 참 좋아하는 장면: 귀 기울이는 시늉을 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음 나누는 장면, 내 심장에 사랑을 쾅 박는 장면. 

더불어 오늘은 아더가 그 엑스칼리버를 뽑은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기네비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의 눈빛에도 심쿵했다.

 

기네비어들을 숨어 보다 발각된 아더와 랜슬럿. 아무 말 수습이 진화했다! 

“색슨족 군인들이 왔다고 들었어요.”의 박자가 훨씬 빨라졌다. 다다다다 쉬지 않고 쏟아내는데, 다급해서 아무 말이나 우선 하는 티가 역력했다.

“정말 적들의 군대가 그렇게 가까이 와있을까요?” 심각해지는 기네비어의 얼굴에 아차, 싶어진 아더. 아, 아뇨.. 아무 말을 주워담으며 재수습에 들어갔다. 잠시 도르륵 굴러가던 눈동자가 적당한 말을 찾았다는 듯이 반짝함과 동시에, 

“하지만 정찰대를 보낸 것만은 확실합니다!” 수습이 썩 괜찮다 싶었는지 배시시 웃음 번지는 얼굴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정말 특별한 사람이죠!” 하하, 하하, 하하. 헛웃음 대잔치도 김소향 기네비어와 함께일 때 볼 수 있는 장면. 푸릇푸릇 싱그러운 두 청춘.

그리고 좋아하는 김소향 기네비어만의 디테일. 〈이렇게 우리 만난 건〉의 막바지, 아더의 가슴에 이제는 스스로의 확신으로 살포시 손을 얹는 동작.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화들짝 빼냈던 손을, 노래가 아름다운 화음으로 여물어가는 동안 인정하게 되었음을 단번에 보여주는 여기의 디테일을 참 좋아해.

 

〈왜 여깄어?〉

“모르가나!” 멀린의 음성이 오늘 따라 컸다. 아버지와 해후를 마저 나누던 아더가 놀라서 돌아볼 정도로. 멀린도 아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대체.. “누구시죠?”

오늘은 유독 이 넘버에서 아더와 모르가나의 상반된 처지가 눈에 밟혔다. 생전 처음 나타난 누이, 혼란스러워하는 아더의 곁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든든한 아버지와 사랑하는 연인,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형까지. 아더를 둘러싼 세 사람이 번갈아 아더의 용태를 살피고 염려해주었다. 하지만 모르가나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어렵게 도달한 카멜롯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받아줄 수 있는 멀린조차도 그녀를 박대하기에 바빴으니. 그야말로 펜드라곤 남매의 어긋난 운명을 축약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멀린을 찾아, 동생을 찾아온 곳에서도 외톨이라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장은아 모르가나의 감정이 본 중에 가장 격하게 분출된 넘버이기도 했다. 잃어버린 내 운명을 찾아왔노라며, 아더의 손을 먼저 덥석 잡고는, 아더가 함께 노래하자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어. 아더에게 이렇게 적극적인 그녀는 처음이라 다소 낯설기도 했다.

 

〈기억해 이 밤〉, “지키리라-아ㅡ”의 소리가 장관이었다. 소릿결이 은하수 같았어. 폭우이기도 했고, 망망대해이기도 했다. 오늘을 길이길이 듣자.

언젠가부터 이 넘버의 모르가나들을 한번씩 확인하게 되는데, 오늘의 장은아 모르가나. 고개 푹 숙여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로 내내 대관식을 관망했다. 그녀가 얼굴을 들어 합창하는 소절은 오로지 ‘기억해 이 밤’ 뿐. 침울한 얼굴 아래로 주먹을 꽉 쥐어가며. 그녀의 모습을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바위산 위에서 카멜롯 모두를 내려다보던 아더는 누나의 모습은 보지 못했을까..

 

〈오래전 먼 곳에서〉, 운명이 맺어준 인연. 아더와 기네비어의 결혼식. 그녀의 손을 잡은 그가, 감격 어린 얼굴이 되더니 맞잡은 손등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사랑을 담은 손길에 내가 울컥했다. 그런데 그것이 곧 그의 마음이었던 듯했다. 울망울망 감격 맺힌 눈동자와 울컥한 듯한 입술이 기네비어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김소향 기네비어가 결혼식에서 항상 울컥하여 그렁그렁 웃는 얼굴인데, 오늘 그의 얼굴이 꼭 그랬다. 두 사람의 얼굴이 하나와 같았다. 그 모습이 눈 시리게 예뻤다.

사랑을 약속하는 노랫소리는 또 왜 그리도 예뻤는지. 얼굴도, 소리도, 그들의 마음도. 완벽하게 아름다운 일치를 이룬 오늘이었다. 오늘이 영상으로 담기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싶었을 만큼.

 

여기 누구 취한 연기는 갈수록 무르익는다. 오늘은 한잔 째부터 취기가 가득 올라버렸지. 기네비어에게 ‘한 잔 더?’ 검지를 세워 묻는데 손가락이 이미 평형을 잃은 상태였다. 두 번째 잔을 잡아들곤 아버지와 기네비어와 오랜만에 세 사람의 화기애애한 짠! 으로 분위기를 한껏 달구었고, 이어 멀린에게 다녀오겠다며 기네비어에게 눈을 반짝이는데 글쎄 멀린을 가리키는 손짓이 마음대로 뻗어지지 않아 마치 기지개를 켜듯 느릿느릿 기울어지고 말았다. 세상 귀여웠어.

 

〈더 깊은 침묵〉, 곧 아더와 기네비어의 행복한 한 때. 새삼 두 사람의 춤맵시가 얼마나 예뻤는지, 함께 호흡하는 춤이 얼마나 유려하였는지. 사람의 움직임이라기보다 하늘하늘 노니는 열대어를 보는 것 같았다. 바다를 유영하는 움직임에 내 마음도 살랑살랑.

그런데 두 사람, 실제로도 즐거웠는지 생전 처음 보는 웃음이 춤추는 도중 터졌다. 기네비어가 아더에게 균형을 맡기고 두 사람이 빙그르르 턴하는 장면에서, 열심히 빙그르르 돌던 그와 그녀가 서로 마주 보며 나란히 꺄르륵. 그 모습이 영락없이, 의심의 여지 없이 너무나도 행복한 한 때 그 자체라 애틋하기까지.

 

〈혼자서 가〉의 목소리, 새삼 2막의 음향이 좋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어제는 1막이 참 좋았지. 오늘은 2막이 좋았다. 탄탄한 결을 있는 그대로 살려주는 소리가 기뻤다. 아더의 분노 속 불꽃이 살아있었어. 타닥타닥 갈래갈래로 타오르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기네비어의 제지에 물러나며 입술을 훑는 동작은 오늘은 손등의 몫이 되었다. 어제의 엄지로 훑는 입술, 다시 보고 싶었는데.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심장의 침묵〉은 늘 오케스트라와 맞서야 하는 넘버지만, 7월 초반의 공연 이후로는 음향과도 싸워서 이겨내야했는데, 오늘 드디어 음향의 지원을 받아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가 돌출로 나와서 부르게 되는 만큼, 음향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날에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데 정작 소리는 저 멀리에서 돌고 돌아 나온다는 느낌의 괴리가 강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사람과 소리가 한 곳에 있었다. 막힘없이 솟구치는 절망, 가눌 수 없는 슬픔의 검은 바다. 무엇에도 가로막히지 않고 폭발했다. 정말 기뻤어. 오늘의 음향이 관통한 넘버, 둘이었다.

 

〈눈에는 눈 리프라이즈〉, 랜슬럿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싸워줄 겁니다. 대사의 중간에 쉼표가 생겼다. 쉼표와 함께 강세가 새로 붙으며 느낌이 새로워졌어. 잘라서 들을 것.

 

〈이게 바로 끝〉, 어제의 넘버였지. 또한 오늘의 넘버였다. 세상에, 어제의 ‘그 노래’를 곧바로 징검다리 삼아 도약하다니. 이것이 바로 이게 바로 끝의 정점인 걸까 싶었다. 그만큼이나 치솟았고, 강했고, 감정적이었으며, 끝이 느껴지지 않는 깊이의 분노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아아, 비명 같은 고함으로 달려드는 소리는 찢겨지는 악기의 마지막 연주 같았고, ‘이게 바로 끝’이라며 음절마다 박아넣는 상처투성이의 금속성은 따가울 정도였다. 뿐인가. 저주 받았‘어’에서 처음 들려준, 분노가 솟구치는 꺾는음에서는 귀가 쫑긋했다. 분노의 음계를 입은 파열음이 총천연색으로 강렬했다. 

누군가 어땠느냐 묻는다면 아더의 능청을 빌려 대답하리라. ‘그럼요, 정말 대단했어요!’

 

〈왕이 된다는 것〉, 오늘의 음향이 관통한 넘버 셋. 더불어 이게 바로 끝과 오늘을 양분한 넘버. 

대체 오늘은 뭐가 그렇게 달랐을까. 참 달랐는데, 무엇인지가 알쏭달쏭하다. 음향이 좋았던 것 이외에 그의 맑은 갈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투명했던 것? 평소보다 깊은 저음이 그윽했던 것? 그윽한 목소리가 마치 거대한 함선과도 같아서 그 안에 운명의 삼라만상이 전부 담겨있다 싶었던 것? 내일의 왕이 된다는 것을 들으면 알 수 있을까? 내일도 오늘과 같을지를 알 수 없지만.. 

 

엔딩은 leaplis.com/582598

오늘도 샤아더 사랑해.

 

+) 장은아 모르가나의 죽음 직전 추가된 대사: 아더 너는 죽었어야 했어 식의 마지막 말이 준 충격과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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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7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기억해 이 밤의 실황이 7월 26일이면 좋겠다. 이날의 소리가 영원히 남으면 참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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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7

다시 생각해도 넘버 하나하나의 절정과 완성도가 대단한 하루였다. 각각의 절정이 하나의 악장을 향하여 갈 날이 목전에 있음을 느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