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운 공연이었다. 그와 김소향 기네비어, 신영숙 모르가나와의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배우 대 배우로서의 교감. 서로의 호흡을 느끼며 만들어가는 그날그날만의 완급 조절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면서도 균형 잡힌 공연을 이루어냈다.

무엇보다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와 〈기억해 이 밤 리프라이즈〉가 양립한 기념비적인 공연이었다. 두 넘버가 각자의 방식으로 온전한 정점을 이루었다. 기네비어와의 이별이 아더의 엔딩을 압도하거나, 아더의 엔딩이 기네비어와의 이별을 압도하는 대치 상태가 아니었다. 실로 조화로웠다. 누누이 말하지만 오케스트라만 아니라면 완벽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따로 쓰는 그와 그녀의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 leaplis.com/581906

기억해 이 밤 리프라이즈 leaplis.com/581911

*

 

또한 기적의 음향이었다. 대체 얼마 만에 이런 음향인지. 연대에서 귀가 트이는 느낌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이, 명료하게 탁 트인 소리.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음향으로 난 나의 것과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벅찼다.

 

그리고 역시.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과연 오늘의 넘버. 아름다울 정도로 강인한 소릿결이 이를 뒷받침하는 음향과 만나 끝 간 데 없는 폭발력으로 공간을 장악했다. 쏟아지는 소리, 청각을 빈틈없이 채우는 폭포수 같은 노래. 단단한 소리가 이에 걸맞는 음향과 만나니, 그 모습이 얼마나 장관이었는지. 오늘의 이 완벽한 사운드에서 그가 피워내는 아더라는 인물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용이 낳고 엑터가 품은 품격, 참 잘 자랐다 싶었다. 운명을 바로 마주할 용기를 갖추고, 제 것으로 만들 잠재력을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로 참 잘 자랐어.

 

‘엑터의 품격’이라는 말에는 늘 동의한다. 아버지로서, 멀린 이전의 길잡이로서 엑터가 아더에게 보여주는 인간상에는 흠이 없다. 아더가 멀린을 처음 만날 때부터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 뜻밖의 출생의 비밀에 당황한 반, 분노 반. 멀린을 터부시하려던 그가 엑터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으니 그의 말을 우선 들어는 보라는 듯한 아버지의 다독임에 마음을 가라앉혀보는 아들을 보았다. 진실을 향하여 나아가는 아들의 뒷모습에 안쓰러운 빛 역력하던 아버지의 눈도. 

 

그런데 불쑥 오늘,

“엑스칼리버를 뽑을 준비.”

이제는 때가 되었다며 멀린이 그의 검을 가져가는 모습에 심장이 덜컹했다. 마치 지금까지 엑터의 그늘에서 그가 누려온 안온한 보금자리를 거두어가는 행위처럼 다가왔기에. 엉겁결에 회수된 자신의 검을 바라보는 그의 얼떨떨한 얼굴도 한몫했다. 막 18세가 된 소년이 운명 앞에 던져진 것이다. 엑터의 품 안에서 걸어 나와, 마음껏 누려온 안온한 생활은 이제 그만 뒤로 하고, 운명의 풍파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홀로 서는 첫걸음. 세 번째 시도 만에 정말로 검이 뽑혔을 때, 오늘 거의 울상짓는 얼굴로 감격했다. 사실 반신반의했던 것이었겠지. 멀린의 가르침도 받았고, 자신을 믿고 나아가보라는 격려도 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겠지. 그런데 거짓말처럼 제 손으로 운명을 거머쥐었다. 손안에 감긴 검은 어쩌면 18세 인생의 가장 큰 성취일지도 모른다. 아이처럼 순수하게 표출되는 기쁨이 이해되었다. 덩달아 웃게 되었던 건 안 비밀.

 

“그럼요, 대단했어요.”

오늘 두 팔을 넓게 벌리며 제 일이 아닌 양 귀엽게 시치미를 뗐다. 쑥스럽게 곁들여진 너스레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이어서 참 오랜만의 김소향 기네비어와의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정말로 좋아하는 장면: 귀 기울이는 시늉의 직후에 두 사람이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꺄르르 함께 웃는 모습! 여기, 이 찰나지만 짙고도 생생한 교감. 오늘 특히나 분명한 눈맞춤과 확실한 웃음나눔을 보았고 기뻤다. 너무너무 예뻐. 두 사람이 서로의 인연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해주는 디테일이자, 쐐기가 되는 장면.

 

기네비어에게서 운명을 느낀 아더, 랜슬럿과 몰래 기네비어들을 관찰하는데 박강현 랜슬럿과는 항상 총알 같은 그를 볼 수 있다. 오늘도 바위 밖으로 밀쳐졌다가 총알보다 빠르게 쏜살같이 복귀하는 모습을 보았어. 복귀해서는 놀랐는지 둘이서 투닥투닥. 아구 귀여워라.

랜슬럿의 무례를 말릴 차례. 오늘은 두 팔로 큰 엑스자를 만들며 말려보다가, 그대로 자신의 양팔을 감싸 안으며 망연해지는 찰나의 모습을 보았다. 자기 자신을 꼭 끌어안으며 시무룩해지는 동작, 오랜만이었어.

그리고 유독 목소리가 잘 들렸다. 기네비어가 진심으로 전력을 다하여 랜슬럿을 몰아가자, 구경하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어. “무서워..” 눈썹을 내려서 찡찡이 듯 속닥속닥.

 

〈우리 지금 만난 건〉에서 김소향 기네비어와의 좋아하는 합 또 하나.

“정말 특별한 사람이죠.”

하하, 하하, 하하. 두 사람 나란히 웃다가 코앞까지 온 서로의 얼굴에 그만 헛기침을 터뜨리며 정색할 때. 크흠, 흠흠. 화들짝 멀어지면서 어색해지는 모습은 김소향 기네비어와의 공연에서만 볼 수 있는 풋풋함이다. 그의 아더와 김소향 기네비어 참 풋풋해, 푸릇푸릇 싱그러워.

 

〈우리 지금 만난 건 리프라이즈〉. 김소향 기네비어의 “사랑해요.” 톤도 참 좋아해. 꿈꾸듯 잠든 아더에게, 여기 기다리는 이가 있으니 이 목소리가 들린다면 꼭 돌아와달라고 전하는 것만 같은 사랑해요. 아더에게 들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

 

〈왜 여깄어?〉. 신영숙 모르가나, 소리 죽여 아더의 반응을 관찰하다가 살풋 눈을 반짝이는 찰나를 목격했다. 아더는 누이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겨 ‘바로잡아야 한다’는데, 동생의 상냥함을 기회로 삼는 그 눈이 소름이었다. 첫 만남부터 엇갈려버린 남매의 마음은 안타까웠고.

참, 아버지와의 재회. “많이 나아졌어요. 잘 지내셨죠.” 음향이 좋아지면 이런 대사도 또렷해지는 걸까. 정말 잘 들렸어. 

 

〈기억해 이 밤〉. 성체성혈의 순간이었다. 오늘따라 잘생김이 반짝반짝했어. 약간 찌푸린 듯한 진중한 옆얼굴이 그윽하기까지. 내가 신부님이면 정말 벅찰 것 같았다. 이 사람을 축복해주는 마음이 진정으로 보람될 것 같았어.

 

〈눈에는 눈〉. 이제부터는 신영숙 모르가나와 아더의 합에 관하여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 두 사람의 호흡은 참 영화 같다. 눈에는 눈, 이게 바로 끝, 모르-가나로 시작되는 마지막까지. 완벽한 호흡, 정제되었으나 공연마다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탄력이 있다. 어떻게 영화 같은지도 세세하게 따로 쓰고 싶은데.. 음 기회가 된다면..

 

〈혼자서 가〉

“아더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잖아.”

아더를 아는 만큼, 염려를 놓을 수 없는 케이. 이어 덧붙였다. 어제 처음으로 덧붙인 이 문장을 훨씬 분명하고 또렷하게 정제하여, “아더에겐 시간이 필요하다구.”

시간이 필요하므로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그 말에서 이미 충분히 힘겨운 스스로와의 싸움을 하고 있는 아더에게 그 이상의 무거운 짐을 차마 맡길 수 없는 진심 어린 우정이 단번에 느껴졌다. 곧이어 아더가 등장하고서부터는 아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인상적이었다. 참된 친구로서의 서사를 완성한 케이에게 박수를.

 

인트로의 박자는 완전히 리셋되었다. 테이블 쾅!과 완전히 빗겨나간 오케스트라의 박자 덕에 오랜만에 온전한 드럼의 독주를 만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의 〈혼자서 가〉는 대단했는데, 모두 아더와 랜슬럿 두 배우가 가능케 한 일이었다. 어/릴/때/처/럼/붙/어/봐의 아더는 정말이지, 와, 랜슬럿에게로 달려들며 이미 저만치 가 있어서, 친구들이 황급히 붙잡아서 질질 끌고 와야만 했다. 그 정도로 긴박했고, 다급했고, 또 절박했다.

퇴장하면서는 오늘도 기네비어를 똑똑히 마주 보았다. 날, 좀 내버려 둬.

 

〈세상의 끝〉

“내가 믿어선 안 될 사람은 오히려 당신이겠지.”

멀린을 검지로 찍으며, 그가 헛웃었다. 어깨와 고개가 한차례 들썩하며 하. 기가 막힌다는 듯이.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처럼. 눅진한 배신감이 감도는 부릅뜬 눈이 멀린을 쏘아보았다.

그런 아더의 옆에서 멀린을 샐쭉하게 노려보던 신영숙 모르가나, 보란 듯이 몸을 홱 틀어 퇴장했다. 부축해주는 아더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이게 바로 끝〉. 아니 세상에. 17일에도 이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세상에 신영숙 모르가나. 끔찍한 배신을 아더에게 전하며 울먹울먹하더니 눈물을 훔쳤다. ‘모두 거짓말, 사실 아냐’라며 무너지는 아더에게 바싹 다가서서 손을 잡고는, 세상 슬픈 비보를 전하는 사람처럼 다른 한 손으로는 눈가를 닦아냈다. 아더를 이끌어가면서도 그랬다. 내내 울먹울먹 고개를 주억이며 슬픔을 연기해 보이는 누이였다. 그 철저한 가면이 얼마나 소름이었는지. 그녀의 마수에 사로잡힌 아더가 오늘처럼 안타까운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오늘의 아더가 느끼는 배신감은 곱절이 되었다. 사랑, 우정, 그리고 혈연. 마지막에 모르가나를 바라보며 합창하는 ‘이게 바로 끝’은 처절한 고통의 음성이었다.

 

〈왕이 된다는 것〉. 가루가 되었던 흔적이 미세하게 남아있는 소리. 담금질하여 손질한 소리의 겉면 아래에서 희미하게 앓은 자국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보수한 음성은 굳건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밀쳐져도 결국에는 자신을 다잡아가는 아더처럼. 역시는 역시나였다. 그에게 소리는 재료일 뿐, 결정적일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제나 무대 위에서 노래와 연기로만 존재하는 사람, 변명하지 않는 배우, 그것이 배우로서 김준수가 관철해나가는 가치임을 또 한 번 느낀 넘버였다.

 

샤아더 사랑해.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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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4

좋은 공연의 여운을 비교적 오래 간직할 수 있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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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4

날이 밝으면 금주의 카멜롯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막주에는 울망울망할 터이니 이번이 비교적 평온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볼 수 있는 마지막 공연주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