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넘버는 도리안 그레이. 앞으로 어떤 도리안 그레이가 와도, 마음 한 켠에서 고이 간직할 오늘의 도리안 그레이.
 
노래가 달랐고, 얼굴이 달랐다. 어제만 해도 숨 대신 울음을 삼키는 옆얼굴이 더없는 회한을 그리며 시작하는 도리안 그레이였는데, 세상에. 오늘은 자조를 읊조리는 얼굴이 잔뜩 젖은 채 웃고 있었다. 희미하게 접힌 눈이 점차 분명한 웃음을 그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울면서 웃고 있었다.
도입부 내내 얼굴 가득 은은하게 드리워진 미소가 함께 했다. 동시에 울음했다. 촉촉한 미소에 잠긴 얼굴의 두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울면서 웃는 그 얼굴을 닮은 노래가 특별했다. 모든 것이 스러진 삶을 노래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여렸고, 바스러지는 촛불처럼 한없이 가냘팠다. 늘 그가 울음을 터트려냈던 '내 이름조차 잊혀져 가는가'에서조차 아스라이 울음할 뿐이었다.
 
울면서 웃는 그 얼굴이 격랑의 회한으로 마침내 번지고야 만 것은 '아마 한때는 예뻤겠지 모두가 사랑했던 도리안'에 이르러서였다. 아마 그가 간직한 가장 소중하고 황홀한 기억이었겠지. 돌이킬 수 없는 기억에 이르러, 마침내의 감정이 복받친 것이겠지. 과거형의 문장에 소리를 싣는 그 순간, 치밀어오르는 감정이 보였다. 무엇보다도 똑똑히 보인 것은, 그 순간 마치 죽음을 결심한 것과 같은 비장한 얼굴이었다.
 
너무도 작은, 너무도 조그마한, 그러나 이미 생의 가치를 잃어버린 육신의 숨결을 앗아가기에는 충분한 칼이 그의 목을 그었다.
 
터덜터덜 다리가 엇갈린 걸음 끝에 털썩 무너지는 육신에서 어깨가 축 늘어졌다. 온몸이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채 마지막 음성을 자아내는 얼굴이 촉촉했다. 죽음에 둘러싸인 얼굴이 고통스러운 와중에 어쩐지, 평화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각도가 A에 있었음에 감사했다. 오늘의 도리안 그레이를 이 각도로 볼 수 있어 기뻤다.
 
 
*
음향이 정말 좋았다. 음의 폭포를 맞는 느낌. 특히 Against Nature와 넌 누구에서 최고였다.
 
 
1. 등장
별무리를 헤아리는 사랑스러운 얼굴, 다시 위층에서 보고 싶어졌어..ㅠ
 
2. 찬란한 아름다움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나쁜 영향만 끼치거든, 그게 바로 나쁜 영향이라는 거야. 툭툭 끼어드는 배질이 오히려 헨리 워튼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는 것 같은 오늘이었다. 역효과였달까. 어딘지 특별한 사람일 거라는 인상을 받은 얼굴이 헨리 워튼에게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특히 나-쁜-영-향-을 곱씹으면서는 더욱 흥미를 더해가는 눈에서 빛이 마구 반짝반짝.
심지어 헨리 워튼, 타이밍의 귀재야. 그로서는 한창 관심을 가지는 찰나에 그만 작별의 인사를 고해오자, 헨리 워튼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눈이 살짝 요동쳤다. 어어라? 가면 안 되는데? 평소보다 확연한 동공의 떨림을 보았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소년의 얼굴.
 
헨리 워튼이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기 시작하는 순간 배질을 곁눈질하는 그의 시선은 처음 보는 것. 뭐랄까. 초창기 세 사람의 관계성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하는 시선이었다. 아직은 배질이 더 친숙한, 살짝 낯가리는 소년이 위험하지만 매력적인 인물을 만나 이끌리면서 계속 이대로 이끌려도 되는지 모종의 확신을 구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 그 호기심 어린 눈을 사전에 차단해주었으면 좋았을걸..
 
3. 세상이 바뀐 시간
아니야! 헨리의 꿈을 응원할 거야! 에서 브랜든 부인은 오늘은 아예 쿠션을 던졌다. 앨런에게 명중한 쿠션을 도로 회수하여서는 온 무대를 누비며 횡포를 부리기도. 무대 위의 작은 거인 같으셔라.
 
4.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찬란한 햇살 뒤 검은 어둠의 소절. 초상화에 몰두하는 도리안의 등 뒤로 펼쳐지는 헨리 워튼과 배질의 기싸움. 배질이 더 강하게 나가지 않았음이 너무도 안타까운 순간.
여기 배질의 눈빛은 응원해주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데, 왜 더 강하게 막지 못했는지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고.
살펴보면 도리안이 헨리 워튼의 영향력 아래에 타락의 길로 인도되는 순간순간마다 배질도 전부 함께하였는데 한 번도 막아내지를 못한다. 무능력해...
 
5. 당신은 누구일까
천부적인 재능이라, 그럼 내가 당연히 알 텐데? 반문하는 헨리 워튼의 뒷모습을 멀거니 보던 얼굴이 중얼거렸다. 작지만 분명하게 '이씨..'
 
오늘 조금 충격적이었던 것. 본의 아니게 '꿈틀대는 푸른 핏줄'을 부르는 순간 그의 뒤에 있는 헨리 워튼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아 뭐야. 나는 그냥 흐뭇해하는 그냥 지켜보는 그런 얼굴일 줄 알았지. 너무나 냉정한 얼굴이었다. '사랑'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 자신의 연구대상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관찰하는 무감한 눈이었어. 와, 나쁜 자.
 
나아가 시빌 베인의 죽음 이후에도 꼭 그런 눈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녀가 자살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울먹울먹하는 그를 토닥이면서도 눈빛만은 차가웠다. 슬픔과 고통이 자신의 연구대상에게 불러올 결과를 주시하는 눈. 와, 싫은 자..
 
듀엣 파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해간다. 강약약 강약약에서 강약강 강약강의 느낌으로. 소리의 폭이 바뀌면서 그의 사랑이 더 전면으로 나선 느낌이 되었어.
그리고 오빠는 오늘 살짝 작곡했당! 계단에서 내려와 부르는 소절ㅡ신이 허락해준 나의 사랑ㅡ에서.
 
애드립은 아, 이게 그 나쁜 영향.. 변태..!
 
6. 최악의 줄리엣
조는 앨런을 발견하고 화악 굳어버린 얼굴과, 시빌 베인에게로 되돌아와 눈 녹듯이 풀어지는 얼굴의 온도 차가 어쩜 그래요. 둘 다 사랑스러운데 그 변하는 순간의 얼굴이 특히나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
팽 하고 엎어지는 등은 점점 극적인 비련미를 더해간다. 마치 그가 실연당한 사람처럼.
 
그런데, 만약 그가 일행과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친구들 앞에서 그런 망신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시빌 베인에게 그렇게까지 심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끝맺음의 타이밍조차도 운명의 장난 같은 사랑이구나. 그 사랑의 파국이 도리안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더더욱 얄궂다.
 
7.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오늘의 대사는 '내가 그녀의 가냘픈 목을 칼로 그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헨리ㅡ의 화음 같은 한숨성은 물론이고, 초반부의 대사처리기 오늘 너무나 좋았다. 꼭 잘라서 들을 것.
 
8. Against Nature
어제 음향사고라고 생각했던 음성이 의도된 변화였나 보다. 오늘도 그 부분의 소리가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확장되었어. 덕분에 가사가 들렸다. 브랜든 부인의 '오늘을 마구 살자'. Against Nature에서는 각자 자신의 삶의 신조를 노래하는구나.
 
그나저나 요즘 눈빛이 너무 잘생겼다. 망원경으로 그 눈을 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어.
 
9. 넌 누구
소리가 정말 좋았다. 귀로 막힘없이 꽂히는 음향 가운데 강렬한 그의 소리가 황홀했어. 이제까지의 넌 누구 중 가장 사로잡히는 소리를 만났다.
특히나 좋았던 소리는 '이-제'의 박쥐 날개처럼 갈퀴를 펼쳐내는 소리. 그리고 라일락 향기의 먹먹한 절규. 저 먼 소실점에 박힌 두 눈이 깜빡이는 것도 잊고 희번덕였다.
심지어 문이 닫히는 쾅! 소리도 분열되지 않고 깔끔하게, 완벽했다.
 
더불어 오늘의 넘어짐도 그림 같았어♡ 소리부터 그림까지 모조리 다 아름다웠어♡
 
10. 무엇이 기다릴까
베이직으로 돌아온 듯한 무엇이 기다릴까였다. 찬란한 아름다움은 12일의 격정 대신 13일의 억눌린 정적인 주문. 입맞춤도 담백했다(입맞춤의 소리는 선명했지만).
 
마찬가지로 소리가 정말 아름다웠어. 특히나 도입부. 당신이 만든 나 이후의 모든 소절. 우아하고 고풍스러워. 이런 유혹이라면 그 누군들 견딜 수 있을까. 순수의 도리안이 아름답게 농익고 농익어 빚어내는 황홀경의 소리였다.
 
기억에 남는 얼굴은 황홀경의 소리와 함께 부드러이 명멸하던 황홀한 눈동자가 '내 영혼의 비밀'에 이르러 날카롭게 희번덕이는 빛으로 순식간에 변모하였던 것.
 
아, 그리고 처음으로, 배질을 쓸어내리는 손이 허벅지 아래에 닿았다.
 
11. 넌 어디로
데빌은 오늘 대담했다. 그의 목을 감싸 쥐고 쓸어내렸어. 퇴장하는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에스코트하는 임무도 완벽하게 사수했다.
 
12. 또 다른 나
지금까지 보여준 결백의 웃음 중 가장 미묘한, 그래서 가장 섬세한 웃음이었다. 찰나에 그친 짤막한 웃음이 '이-십-년-전'을 곱씹으며 습격자에게 되레 물었다. '내 얼굴을 봐, 내가 아직도 그 나이로 보이나?'
뻔뻔하기 그지없었어. 이럴 때의 그는 영락없는 나쁜 사람이다.
 
또 다른 나의 몰아치는 박자ㅡ내 속죄는 진실로 내 뜻인 걸↗까ㅡ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음을 강하게 밀어내었다가 엇박에서 정박으로 되돌아오는 박자 감각이 경이로웠다. 치솟은 '걸↗'에서 음을 끝없이 밀어내기에 남은 박자 안에 어떻게 이어질 가사(너를 보리라 너의 얼굴을 숨겨진 내 모습 내 속에 또 다른 너)를 쪼개어 넣을까 했는데 세상에. 원래 그런 노래인 것처럼 여유롭게 전부 새겨넣었다. 박자 위에 노니는 그는 정말 감탄스러워. 이 대목의 박자 당기기가 오늘만의 변화일지, 과정 중의 소리였을지 내일 공연이 기대된다.
 
13. Life of Joy
고통? 난 행복해요ㅡ는 항상 쓰라리다. 변해버린 얼굴을 똑똑히 보았을 텐데, 정확히 그 반대의 심정일 텐데. 가장된 행복으로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그가 쓰려.
 
왜 그렇게 그 초상화에 집착하시는 거죠? 반문하며 오늘은 배질의 어깨에 두 손을 턱 얹었다. 진정을 좀 하라는 듯이.
 
헨리 워튼과 가까워지려는 동선의 그를 잡아채는 배질에 한참 뒤로 나동그라지면서는 어제 이상으로 성을 냈다. 단숨에 팽그르르 돌아서서 배질과 대치하는 꼿꼿한 등이 화로 바들바들 떨렸을 정도로.
 
그런데 오른손바닥의 상처.. 매우 선명하고 동그란 빨간빛이라 놀랐어.
 
14. 악의 꽃
권태로운 왕자님은 왈츠를 추면서도 즐겁지 않다. 그 언젠가에는 분명 무도회에서의 즐거운 한때도 큰 쾌락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 정도 자극에는 흥미조차 가지지 못하는 것 같은 얼굴이 무감하기 그지없다.
그런 얼굴에 생기를 불러오는 샬롯 베인. 그녀를 포착해내고 브랜든 부인들과의 박자 당기는 동선은 너무나 신성할 정도로 아름다워.
 
계단을 오르며 오늘은 피에로에게 스윽, 고개 돌려 정확히 시선을 주면서 그 뺨을 톡톡 두드렸다. 등장하면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피에로에게 나누어주는 관심이, 샬롯 베인의 등장으로 마음이 한결 넓어진ㅡ생기와 흥미를 되찾은 그가 베푸는 아량처럼 보였다.
 
15. 너를 보낸다 reprise
그녀가 내게 칼을 휘두르는 순간에도 나는 그녀를 용서해주었어요ㅡ배질에게 한껏 밀착한 얼굴이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너는 내 편이 되어주어야 하잖아, 내 말이 맞잖아. 그런 눈이었다.
 
이상적인 인간ㅡ을 말하면서 오늘도 악문 입술. 무엇이 그리도 맺혔는지, 싶은.
 
영혼의 비밀을 제 손으로 들추어내고서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키 어려운 얼굴이었다.
'저 도리안 그레이가 아름답다고 말해'는 점점 더 확연한 울음이 되어간다. 막공 즈음이 되면 울먹임에 먹힐까 싶게.
 
배질의 웃음이 돌아왔다. 그 웃음이 무너트리는 그가, 안쓰러운 만큼 좋다. 그 웃음이 타격하여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의 그가 아린 만큼 좋아. 그에게 인간성을 되돌려주는 단비 같은 웃음이라 여겼다.
 
16. 앨런의 죽음
오늘 역시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애써 다잡으려는 숨이 쌔액 쌔엑 흘렀다. 내리누르는 말투에서 얼핏 배어 나오는 다급함이 그의 정신적 혼란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었다.
앨런을 다락으로 이끌고 나서는, 무엇이 그리 견디기 힘든지 옅은 한숨과 함께 손에 얼굴을 잠시 묻었다. 퇴장하는 걸음걸이조차도 터벅터벅 느리게 바닥을 끌었다.
 
17. 사라진 아름다움
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 평온을 가장하는 얼굴이면서도 헨리 워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정작 헨리 워튼은 그의 시선을 비켜서 있는데 그는 못 박힌 듯 바라봐. 마지막 구원자이니까. 마지막 동아줄이라는 걸 알기에.
 
햄릿의 대사 역시 정말 좋았는데, 여기까지 쓰고보니 오늘 대사톤이 정말 다 좋았네. 전부 다 사랑이었다. 촉촉하게 젖어있으면서도 강약을 놓치지 않고 특유의 나른함을 잃지 않은.
햄릿은 특히나 아이 같았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가 의지할 어른을 찾아 호소하는 것 같았어.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호소.
나를 시험한 건 너의 위선, 남겨진 나약한 인간ㅡ에서 터져 나온 감정은 울분이었던 걸까. 오늘처럼 격하게 감정이 묻어나는 음성은 여태껏 없었다.
 
회한의 멜로디는 왜 그리 슬플까. 가끔 그의 우는 얼굴에 시각을 집중하느라 청각이 멀어지다가도, 이 멜로디에 이르면 꼼짝없이 갇히고 만다. 숨을 탁 막히게 하는 노랫소리야.
 
헨리 워튼의 격한 너어어어어! 가 피드백되었다. 그런데.. 모든 진실을 목도하고 너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아, 선언하는 순간의 헨리 워튼이 원래도 이렇게 모진 얼굴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던가? 헨리 워튼을 그동안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뭐야, 정말 놀랐어. 이런 연기라면 마음 놓고 헨리 워튼을 미워할 수 있을 것 같다.
 
18. 커튼콜
시빌 베인과 다시 만난 그의 울음 삼키는 숨소리, 배질에게로 달려가는 오른뺨에 그을린 듯 맺힌 눈물줄기.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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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28

9월 27일 공연을 보내기 40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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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28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봐. 어제의 도리안 그레이를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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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28

어제의 공연이 너무 좋았어서 떠나보내기 아쉬운 마음 반, 어제의 그가 보여주었던 변화들이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기대되는 마음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