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넘버는 Life of Joy.
 
1. 등장
흐르는 음악을 살며시 그러쥐는 손가락 마디가 섬세했다. 가득 고인 것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자 한 움큼의 은하수가 스르르 쏟아져 내렸다. 별빛 내려 반짝이는 강물을 매만지듯, 부드러이 바닥을 가르는 손가락은 오늘의 고전의 완성이었다. 아무래도 가장 사랑하게 될 것 같은 등장의 순간이다.
 
2. 찬란한 아름다움
오늘의 눈매를 뭐라 하면 좋을까. 신세계를 발견한 얼굴이 이따금씩 매섭게 굳었다가, 금세 황홀함으로 풀어졌다가, 또 서늘하게 단단해지곤 했다. 흡사 ‘어미의 아름다움과 할아버지의 잔인한 유전자’를 한꺼번에 보는 듯했다.
 
리프라이즈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도 담백했다. 신세계를 향한 첫발 그대로, 신중하게. 시빌 베인의 죽음 이후의 리프라이즈에서 조금 더 낮아지고 탁해지는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곱고도 청아한 음성이었다.
아아, 찬란한 아름다움의 변모에 대해서는 언제 따로 쓰고 싶을 정도다. 시작은 ‘따라서’ 불렀던 그가, 곧이어는 ‘이어서’ 부르고(리프라이즈), 나아가는 완전히 ‘녹여내’ 불렀다가(무엇이 기다릴까), 마침내는 ‘나란히’ 부르는(Life of Joy) 이 과정을. 세상에 이런 수제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3. 세상이 바뀐 시간
이 넘버에서 환멸을 느끼기 시작해버려 어쩌지. 벌써 이런 감정이 들면 앞으로의 관람이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 순결한 영혼이 어떻게 변할지 다 같이 상상해, 에서 쐐기가 박힌 느낌이었다. 잔인한 방조자들. 헨리 워튼의 공범들.
 
4. 당신은 누구일까
그의 노래가 웃음을 머금는 순간이 좋다. 행복이 핀 얼굴이 좋아. 아름다워 사무치는 사랑스러움이 눈앞에 만발하니까.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던 새로운 장면 하나는 ‘오늘 청혼할 생각이에요.’의 순간. 포부를 담아 짐짓 선언하며 헨리에게로 살포시 기울여 보였던 얼굴. 나 지금 중요한 말하는데 좀 봐주시죠? 하는 듯한 자세가 너무나 깜찍했다.
 
5. 최악의 줄리엣
설렘 가득한 첫 얼굴은 봐도 봐도 좋다. 그야말로 이 장면의 진정한 로미오야. 줄리엣을 향하여 기대와 사랑을 가득 품고 반짝이는 눈이 영롱하니까.
하지만 설렘도 잠시. 느닷없는 연기에 당황한 얼굴로는 연신 난간을 톡톡톡 두드렸다. 뒤로 넘어갔다가 고개를 푹 숙여 미간을 짚기도 하고, 시빌 베인이 아픈 것 같다 한 후엔 포기하지 않고 일행들을 돌아보며 무어라무어라 속삭이기도.
 
그리고 오늘 화낼 때의 얼굴.. 왜 이렇게.. 빚은 듯이 잘생겼지.. 정색한 얼굴에 자로 잰 듯이 드리워진 음영 탓일까. 특히나 너무너무 조각이었어. 썸띵 모어를 떠올리게 하는 왕자님이었다. 그 얼굴로 내가 사랑했던 시빌 베인은ㅡ을 읊조리며 입가를 살짝 말아 올리는데, 아, 허망하게 스쳐간 사랑을 향한 탄식과도 같은 미소를 보았다.
 
6. 시빌 베인의 죽음
‘헨리, 제가 시빌 베인을 죽였어요.’ 물기 머금은 음성의 ‘헨리’. 흐르는 피아노 가락에 마치 화음처럼 얹어지던 촉촉한 음성.
 
7. Against Nature
안무적으로 가장 짜릿한 부분은 역시 용서하소서 두 손 모으는 찰나. 오늘은 심지어 한쪽 무릎을 근사하게 꿇는 동작까지 추가되었다. 무릎 꿇은 왕자님, 두 손 모은 왕자님.
 
8. 넌 누구
쇼팽이 흐르는 저 순간의 얼굴이 곧 다른 이들이 보는 도리안의 얼굴이겠지. 설명이 어려운 아름다움. 동시에 묘하게 흐트러진 차림새처럼 묘하게 뒤틀린  그의 영혼. 가사 그대로의 그. 가사로 들려주는 서사와 눈앞에 펼쳐지는 시각이 일치하다니, 이럴 수가 있나.
 
9. 무엇이 기다릴까
오늘도 배질을 향하여 숨결처럼 내뱉은 한 모금. 달콤하고도 탁한 숨을 그대로 맞으며 피하지 않는 배질과, 그 상황조차 마냥 재미있는 듯한 그의 줄다리기가 아슬아슬했다. 자신에게 배질이란 사람의 취급으로 이 정도는 마땅하다고 여기는 듯한 당당함에는 할 말을 잃었고(배질도 말을 잃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의 사랑스러운 발칙함을 탓할 수는 없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으니. 초상화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당신이 만든 나’인 것이 맞으니까. 배질 역시 그것을 느끼기에 도리안이 하는 대로 순응하는 것일 테지.
 
타락의 멜로디는 오늘 유독 낮고 음습했다. 하늘하늘하되 포복한 듯한 노랫소리가 모순 가득한 퇴폐미를 선사했다. 이 멜로디가 그를 타고 흐르는 순간의 배질의 표정도 잊지 못한다. 믿을 수 없어하는, 좌절에 사로잡혀 무너진 얼굴. 세상의 고통을 한꺼번에 맞은 얼굴이라 해야 할까. 그걸 보며 또 생긋 웃는 도리안은, 재차 말을 잃게 해.
 
게다가 어쩜. 타락의 멜로디와 함께 두 팔 벌려 음을 자아낼 때의 그는 꼭 옛 그리스 시인의 시구를 따라 흘렀을 흰 뱀 같다. 눈부신 독을 품고 반짝반짝한 비늘을 품은, 태초부터 존재하였던 순수와 배덕의 존재.
 
쪽-은 없었다. 유혹의 대사 역시 초반보다는 덜 자극적으로, 대신 보다 은밀하게 바뀌어 간다.
그리고 조금 더 개인적이고 은밀한 감상: 오늘의 각도로 보는 창문 너머의 두 그림자는 심장에 매우 좋지 않았다. 너무나도 훔쳐보는 느낌이라 위험함이 증폭돼. 나의 심장아..
 
10. 또 다른 나
아무리 생각해도 라이브인 게 실감이 나지 않아. 그가 퇴장하는 순간 감각이 식는다. 재등장 이후의 노래가 가까스로 되살려와도 이미 차가워진 감각을 온전히 되돌려내기에는 부족해. 그의 열창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 억울하기까지 하다. 대체 언제까지 또 다른 나에 대하여 이런 감상만 써야 하는가.
 
11. Life of Joy
네 등 뒤의 눈물이라는 가사에서였을까. 등을 보인 채 피식, 배질의 말을 비웃는 뒷모습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끝없이 영혼을 외면해온 모습 그 자체라. 무엇도 듣지 않는 그라서.
 
헨리와의 타락의 건배. 찬란한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제는 헨리와 어엿한 이중창인 건 새삼스럽게도 현실을 깨우쳐 주었다. 저만치 가버렸구나, 도리안. 순수는 이제 없고 타락한 순결뿐이구나.
 
마무리는 단연코 오늘의 최고. 바르르 떨며 자아내는 음성이 희열을 선사해주었다. 이보다 더한 격정은 없을지도 몰라.
 
12. 악의 꽃
오늘의 다비드는 대단히 권태로워 보였다. 무도회에서 군림하던 어제까지의 그가 아닌 무료하고 따분함 역력한 얼굴이었다. 몸이 기억하여 박자를 맞추는 왈츠에서도 권태가 느껴졌다.
그런 얼굴에 처음 생기를 불러온 것이 미모의 아리아. 그제야 활기를 찾은 눈동자가 스르르 굴러 방향을 찾았다. 소리의 근원을 좇는 입가로 설핏 미소가 스며드는가 싶더니, 그녀를 찾아낸 후에는 조금 더 환하게 번졌다. 별안간에 생기를 입고 반짝이기 시작하는 얼굴에 유혹의 기색이 비친다 싶은 순간 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 있었다.
 
13. 너를 보낸다 reprise
초상화를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는 배질의 모습에 일그러지던 그의 얼굴. 그렇게 끔찍해? 묻는 듯한 얼굴에서 좌절이 보였다. 돌아오는 것이 그렇다 하는 인정일까, 사뭇 저어하는 두려움도 함께.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는 울음 반 절규 반이었다.
칼을 들고 다시 나타난 그를 보는 배질의 표정은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경악과 충격. 그리고 언뜻언뜻 엿보였던.. 그조차도 네가 선택하는 것이라면, 하는 듯한 순응이 있었다.
격정에 사로잡혔던 도리안만이 그것을 몰랐다.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린 다음에야 알았다. 지금 막 자신이 없애버린 것이 무엇인지. 뒤늦게 덮쳐온 깨달음이 주는 절망은, 그랬기에 더욱 깊었다.
 
14. 사라진 아름다움
대사 하는 동안 끝끝내 도리안을 보지 않는 헨리를 오늘 보았다. 대사로 시선으로 완전히 도리안을 외면하는 헨리와, 그런 그를 하염없이 보고 묻는 도리안을 보았다. 도무지 부딪히지 않는 시선의 교차에서 이미 어긋나버린 결말이 보이는 듯했다.
 
‘내가 배질을 죽였다면요?’는 이렇게 묻는 듯했다. 그래도 아직 내게 죄악에서 자유로운 쾌락이 가능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당신이라면 그래 줄 수 있잖아요.
 
자조의 멜로디는 어제의 기분 탓이 아니었다. 두 공범의 소리가 만나 빚는 소리는 점차 자조가 되어간다. 고통과 눈물의 회한. 끝나버린 여름을 향한 사무침.
 
15. 도리안 그레이
초상화를 쓸어내린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니, 쓸어내렸다기보다 한탄하듯 한순간 텅 빈 초상 위로 얹어진 손이었다. 탄식처럼 짚고 간 찰나의 자국이 그대로 내 마음으로 스며들어왔다.
생명을 긋는 순간을 가장 그림의 각도로 만난 것도 오늘. 이 그림을 어떻게 해야 공들여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눈앞에서 하이얗게 바래가던 그 순간이 지금도 선명한데.
 
쓰러지듯 털썩 무너져, 마지막을 향한 얼굴은 언제나처럼 사무치게 아름다웠다. 생명이 소진된 낯빛. 잘게 떠는 입술, 처연히 뻗어진 한 손. 꺼져가는 촛불과 같던 눈동자. 빛과 그림자를 한꺼번에 담고 아름답게 음영진 선과 악의 얼굴. 울음과 미소가 뒤섞이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일그러짐 끝에 피어난 죽음이란 평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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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11

9월 9일의 등장, 최악의 줄리엣을 만난 왕자님, 악의 꽃. 소리가 지워질 정도로 아름다웠던 그, 이 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