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매우 취향적 음향을 만난 날. 벅차게 기쁜 날!

 

재연 엑스칼리버 2막의 음향은 1막 엔딩곡인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의 컨디션에 크게 좌우되는 편인데, 오늘 결싸움의 음향 밸런스부터가 드물게 훌륭했다. 전반적으로 크면서 또렷하고, 앙상블과 오케스트라 위에서 노니는 주인공의 음성이 선명했다. 

이 밸런스가 심장의 침묵과 이게 바로 끝, 나아가 왕이 된다는 것에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왕이 된다는 것에서는 시아준수의 목소리 겹 하나가 더 들릴 정도였다. 결 많은 그의 목소리를 풍부하게 살려, 마모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음향. 매우 기뻤다. 오늘의 음향, 샤아더 다음 가는 베스트 캐스트로 꼽아본다. 

 

*

 

잃어버린 말들의 출신지가 그리스로(제우스, 헤라클레스) 정해지는가 싶더니, 오늘은 또 새로운 테마를 입었다. 데이야, 나아아잇! 나아아잇을 늘어뜨리는, 스스로가 영국인임을 의식하여 굴린 발음이 귀여웠다. 

 

숲속, 나무 뒤편. 강태을 랜슬럿과 알콩달콩할 때는 보통 플랭크 자세 대신 아기 자세로 웅크려 숨는 편인데, 오늘은 그 동작이 어찌나 크고 박직하던지. 아기 자세로 옹송그렸다기보다는 개구리 자세로 철퍼덕! 에 가까웠다. 누구네 동생이 이렇게 귀엽담. 강태을 랜슬럿과 나의 시선이 매한가지가 된 건 당연지사. 

 

〈왜 여깄어?〉 깊은 울림의 “난 여~깄어.” 뒤이은 두 번째 ‘여-깄어’는 곧게 빼내는 편이지만 첫 마디는 9월 12일을 기점으로 떨림음으로 노선을 정한 모양이다. 오늘은 특히나 아주 강력한 후자였다. 곧은음일 때 아더의 올곧은 성품이 돋보인다면 떨림음일 때는 격양된 심리가 곧바르게 꽂혀 든다는 차이가 있다. 

 

오늘의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의 음향에 제 취향의 별 다섯 개를 드리고 싶어요. 이런 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더와 앙상블이 나란히 올라가는 소리가 아니라, 앙상블은 땅에서 도약하고 아더는 천공에서부터 벼락 치며 내려와 맞부딪히는 소리. 두 소리의 시초가 뿌리부터 다른 감각! 발끝이 땅에 닿지 않는 듯하던, 분노를 구름 삼아 완영하던 오늘의 목소리, 황홀했다. 

 

〈눈에는 눈〉 남매와 멀린의 대치가 끝난 후, 분노의 홀로서기를 독려하며 멀어지는 누이를 그가 시선으로 좇았다. 따라가는 눈빛이 매우 짙었다. 누이가 심어놓은 용의 불길로 일렁이는 눈동자가 어찌나 그윽하던지. 그때 정했다. 오늘의 엄청난 잘생김 구간은 바로 여기라고. 

 

〈혼자서 가〉 “도전할 사람?!”의 결기가 돌아왔다. 분명 17일까지만 해도 사근사근했던 음성에 오늘은 다시 느낌표가 알알이 박혀있었다. 완전히 바뀐 건 아니었던 모양이야. 

 

강태을 랜슬럿과의 손등 탁! 도. 지난날에는 어깨에 미처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랜슬럿의 손바닥을 손등으로 탁 쳐냈다면 오늘은 어깨를 짚인 후에, 팔을 높이 휘둘러 손목으로 쳐냈다는 것이 다른 점. 

 

오늘의 〈심장의 침묵 x 왕이 된다는 것〉 사랑단.. 음향에서 무지개 피는 느낌, 무대가 기술적으로 환경적으로 시아준수의 노래를 서포트할 준비를 완전하게 갖춘 광경을 보는 기쁨. 이루 말할 수 없네요. 박자가 다소 들쑥날쑥 하는 것도 오늘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시아준수의 소리가 입자 단위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감각에 이미 황홀경을 넘어버렸으니까.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이 목소리를 사랑한다. 이 소리 안의 결들을, 이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노래로 가꾸어가는 방식을. 노래를 따라 숨 쉬듯이 깨우쳐야만 했다. 역시 나는 이 소리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이 소리여야만 한다고. 

 

〈이게 바로 끝〉 9월 9일 마이크 사고와 함께 명맥이 끊긴 줄 알았던 시선 처리가 돌아왔다. 

“날 배신했고 신을 모독했어!”

하늘을 찌른 손가락을 따라 치켜뜨는 새파란 눈동자를 정말 오랜만에 본다. 반가웠어요. 자주 해주세요. 오빠는 눈 안의 빛이 누구보다 도드라지는 사람이라, 안광까지 남김없이 쓰는 분노의 파급력이 실로 엄청나니까요. 

 

“난 실패했어.”

아들로도, 남편으로도, 친구로도, 왕으로도. 제 실패를 나열하며 점점 웅크리는 몸. 끝내는 작은 동그라미가 되어버린 그 모습이 어찌나 가엽던지.  

 

이윽고 전후의 평원. 

아니.. 폐허의 런웨이를 걷다가 멈추어 설 적에 가슴을 짚던 손 뭐였지요. 쏟아져 내리는 심장을 붙들어 매듯이 가슴을 받치는 손동작에 깜짝 놀랐다. 어린 마음으로 감당해내야 하는 것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본능적으로 아린 심장 가까이로 손이 올라간 것만 같지 않나. 

부지불식간의 그 손이 오늘의 가장 깊은 눈물 밭인 줄 알았으나. 

 

최종장. 〈기억해 이 밤 리프라이즈〉

당차고 멋진 소녀 앞에서 한껏 자세 잡아보던 시절이 있었다. 슉, 바람 가르는 소리까지 부러 섞어가며 칼을 휘둘러 보았던 날들. 좋은 시절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이번에는 어떤 관중도 없이 그가 칼을 들어 올렸다가, 결연하게 그어 내렸다. 그전에는 없었던 상실과 고통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같은 상황에서 너무도 달라진 얼굴빛이 그가 지나온 것들을 가늠케 했다. 

 

천천히 그가 바위산을 돌아보았다. 아득한 오르막길을 향해 두 팔을 가득히 벌리는 뒷모습이 처음과 겹쳐지는 것에 울컥했다. 

멀린과 아버지의 독려 하에 바위산을 처음 오르던 그때와 하나 다르지 않은 등. 

그 모든 것을 겪고도 본질만큼은 변하지 않은 저 사람. 

또다시 눈앞의 인물이 아더인지 시아준수인지 혹은 둘 다인지 헤아릴 수 없어진 감회 속에서, 바위산을 오르는 침묵의 결의를 들었다. 

 

이 땅이 날 부른다면 용기를 다 끌어모아

오라, 나의 운명아.

 

소리없는 눈물이자 극복의 표상이며, 부서져도 아름다운 단 하나의 것이었다. 


댓글 '1'
profile

연꽃

21.09.20

최종장의 바위산 앞에서 두 팔 벌리던 등이 내 앞에 펼쳐진 이 길과 겹쳐지던 감각 잊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