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 겨누어졌다. 사랑과 우정의 목을 곧바르게 향하여. 고통 어린 절규가 땅을 울렸다. 과녁에 닿기만을 기다리는 검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분노가 의지를 가지고 검으로 전이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결백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녀를 보호하려 하는 랜슬럿이 도리어 불길을 부추겼다. 그것은 확인사살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우정 이상의 것이 있음을 역설하는 행동과도 같았다. 결코 모르가나의 환영 같은 게 아니었다. 기네비어와 랜슬럿이 그를 배신한 게 맞았다.
“저 여자한테 결백 같은 건 없어.”
배신당한 왕이 말했다.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두 사람의 목을 겨눈 검에 불길이 치솟았다.
ㅡ이게 바로 끝
불길의 본디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ㅡ내 심장은 속았어
그도 아니면 울음의 민낯일까. 
ㅡ배신당했어
사람의 울음소리가 이럴 수 있을까.
ㅡ내 믿음이 짓밟혔어
검을 겨눈 그대로 두 사람 둘레로 원을 그리는 그의 걸음걸음에서 울음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이 뚝뚝 떨어졌다.
ㅡ이 무거운 슬픔
용의 분노가 그의 내면을 파괴하다 못해 하늘을 짓이기고 피눈물을 뿌리는 것만 같았다.
ㅡ세상이 무너져내려
창날처럼 곤두선 목소리였다. 비명에 얼굴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소리가 너무나 날 것이었다. 
ㅡ다 달라졌어
하늘을 찌를 듯한 소리에서 따끔한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고통의 맨살을 만지는 것만 같았다. 나조차도 그의 고통에 함께 급격하게 침몰되어가다,
‘저’주받았어
가시 돋친 파열음이 튀는 순간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숨죽인 채 그의 곁을 맴도는 모르가나가 보였다. 소중한 존재를 스스로의 검으로 베어내기만을 기다리는 눈에서 광채가 번득였다. 복수를 완수한 아더는 그로써 자기 자신마저 파괴해버릴 테고, 폐허만 남아 먼지가 되겠지. 조용히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화음을 실어 그에게로 전했다. 어느새 남매는 다시 합창하고 있었다.
ㅡ이게 바로
머지 않았다. 
ㅡ끝
곧 ‘마침내 모든 분노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아비의 원죄가 짓이긴 운명을 되찾게 되리라.
용을 놓아주도록 하였던 그때ㅡ눈에는 눈ㅡ처럼 그녀는 자신의 불길마저 그의 안에 심고자 했다. 그러나 불길이 온전한 점화를 이루기에 앞서 그가 돌연 말했다. 하늘을 향하여 치솟은 검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너희 둘을 카멜롯에서 영원히 추방한다.”
그의 복수는 추방에서 그쳤다. 내내 두 사람을 향하여 검을 겨눈 채 서슬 퍼렇게 질러대던 얼굴을 간신히 억누른 얼굴로. 나는 안도했다. 불길이 그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전에 스스로의 파멸만큼은 지켜냈다. 이것으로 되었다 싶은 찰나, 용의 울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무-
너-
지-
는-

이번에는 짙고도 낮은 신음 같은 음성이었다. 출구 없는 동굴에 갇힌 용의 불길이 사정없이 메아리치는 소리였다. 부딪히며 튕겨지며 소리가 사방향으로 진동했다.
ㅡ꿈
마지막 음절을 터트려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알아차렸음을. 
기네비어와 랜슬럿을 겨누었던 검이 천천히 누이를 향했다. 다부진 팔을 곧게 뻗어 누이를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랑과 우정의 배신 뒤에 음모가 있었다. 그의 검날이 가리키는 방향이 말해주었다. 누이였다. 누이와 누이의 검은 그림자들이었다. 그의 검 끝에서 누이가 뒷걸음쳤다.
진실로 끝이었다.
아더의 세계를 지탱하는 모든 것ㅡ사랑, 우정, 혈연 전부가 무너져 내렸다. 멀린의 말마따나 가장 어려운 순간의 불길을 다스렸으나 온통 피투성이였다.
자신의 검 끝에 몰린 누이 너머로 그는 용의 불길이 집어삼킨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성을 덮어버린 분노를, 사랑을 외면한 독선을, 혼자가 된 자신을.
이제는 무덤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은 더는 표현할 고통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태생이 심어주고, 슬픔이 불을 지피고, 누이가 부채질한 불길을 꺼트리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남은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다 무너졌다.
그가 알던 세상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왕이되 왕이지 못했던 왕은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했다.

왕이 된다는 건 뭘까.

 

 

* 6월 18일 첫공 기준 작성, 21일 이후 디테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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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8.25

... 옛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찾아왔는데.. 아더의 1절부터 쓰지 않았던 내 자신을 매우 다그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