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바로 끝〉 아더의 첫 마디. 분노의 비명부터 “그를 위해 죽겠다는 건가?!”까지 마이크가 나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내 안에 용의 불길이 치솟았으나.

시아준수가 모든 걸 되돌려놓았다. 

아더의 분노를 터트려내는 첫 소절이 제대로 관객에게 닿지 않았음을 정확하게 알아차린 그가 노래에 있는 대로 날을 세워넣은 것이다. 칼날처럼 벼려진 ‘이게 바로 끝’이 귓가를 강타했다. ‘배신당했어’는 한 단계 더 도약했다. 바로 앞 소절로 도움닫기하여 뒤로 갈수록 더욱 치달아가는 노래가 이어졌다. 이 피치에서 더 올라갈 수 있다고?!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절들이었다.

동시에 밀고 맺는 완급 조절이 분노로 얼룩진 구간 사이사이를 메웠다. ‘이 무거운 슬픔, 세상이 무너져, 내-려-’를 진하게 끌어내릴 때 가슴에 들이차던 감각을 잊을 수 없다. 치솟는 강강 사이에 단단한 약강. 

신묘한 조화로움 앞에서 새삼 내가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신뢰하는 ‘시아준수’를 느꼈다. 미약한 시작을 돌파해내기 위해 노래에 있는 힘껏 힘을 주면서도, 동시에 순간적으로 스스로를 이완하여 더 과격한 절정으로 극대화해내는 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관철해낼 수 있는 능력치의 존재. 눈앞의 무대라는 것이 시아준수를 담기에 얼마나 작아 보이던지.

그가 펼쳐내는 분노 이상으로 그의 존재가 광대하게 느껴졌다.

시아준수의 관객이 된다는 건 시시로 이런 감각들과 조우한다는 것이다.

 

*

 

4일로부터 닷새. 나에게도 긴 시간이었지만 시아준수에게도 긴 시간이었던 것이다. 노래도 노래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세세하게 공을 들이는 그를 보며 느꼈다. 서두르지 않고 수를 놓듯 천천히 그려가는 동작들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눈에 가장 아름다웠던 동작은 기억해 이 밤, 바위산에서의 대관식.

“평등한 원탁 앞에 모여 함께 맹세하리”

검 잡지 않은 팔로 제 앞에 펼쳐진 카멜롯을 쓰다듬듯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바다를 유영하듯 부드러웠다. 

“하나가 되어 정의로운 세상 만든다고”

엑스칼리버를 높이 세우기에 앞서 손목을 돌려 검 끝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는 동작은 호수를 가르듯 우아했고.

크고도, 정확하며, 기품있게. 이 셋이 동시에 극도에 이르러 빚는 조화라 해도 결코 모자람이 없을 동작들이 공연 내내 펼쳐졌다.

 

더불어 닷새 동안 정돈된 머리. 앞머리 길이도, 헤어 색도 살짝 바뀌었다. 결정적으로 오늘, 앞머리 가득했던 볼륨. 특히 왼쪽 앞머리가 오른쪽의 두 배 가까이 풍성했다. 그렇게 잘 빚은 머리칼이 안 그래도 예쁜데, 얼굴을 틀어 볼륨 아래에서 옆얼굴이 나타나면… 

 

〈왜 여깄어〉에서 모르가나와 멀린을 주시하는 옆얼굴이 그림이었다. 앞머리의 볼륨을 따라 둥글게 맺어진 곡선 바로 아래에서 날카롭게 떨어지던 콧날을 기억하자. 왜 여깄어의 옆얼굴을 잊지 말자.

각오를 삼킬 때마다 볼에 살짝 음영지던 옆얼굴을 지금도 생각한다. 상황 파악 겸 마음의 준비를 마칠 때까지 예열되어가는 잘생김 앞에서 몇 번을 탄식했는지. 선한데 잘생기고, 단단한데 잘생기고, 살짝 망설이는데도 잘생기고, 결심하면서도 잘생겼다. 모르가나와 합창하는 “난 여-깄어 / 난 여-깄어” 구간, 여-를 길고 곧게 빼내는 소리는 또 얼마나 올곧게 잘생겼던지! 신이 있다면 부디 왜 여깄어의 실황을 내려주세요. 집요한 시아준수 앵글 버전으로 허락해주세요. 왜 여깄어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영구히 간직하고 싶어요.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김턴 대신, 낚시통을 거꾸로 올려서는 불쑥 들여다보던 아더. 이 안에 랜슬럿을 혼쭐내는 비법이라도 있나 빼꼼히 기울어지던 고개가 몹시도 귀여웠다. 

오랜만에 기네비어에게 어깨 맞는 아더도 보았다. 배시시 녹으며 너무너무너무 좋아하던 얼굴. 무릎을 딱 붙인 채로 점점 더 조그맣게 말려가던 몸. 하지만 랜슬럿에게도 베풀어지는 터치에 금세 샐쭉 시무룩해지는 것까지 귀여움 한도 초과.

 

숲속, 나무 뒤편. 강태을 랜슬럿과 알콩달콩 하는 모습을 연달아 보다가 오랜만에 이지훈 랜슬럿과 아웅다웅하는 걸 보니 또 새로웠지요. 굳이 굳이 제 앞으로 비집고 들어온 랜슬럿 뒤에서 으씨! 하며 주먹 꽁 쥐는 찰나의 심통난 얼굴 사랑해. 

 

2막, 〈눈에는 눈〉에서 유난히도 풀어 헤쳐진 상의. 절반 가까이 매듭짓지 않은 느슨한 차림에 갸웃했다. 어라, 원래 이렇게까지 흐트러져 있던가? 털옷은 근사하게 차려입어 놓고 내의가 이렇게 분방하다니. 우리 임금님, 정말 멋대로시다 싶었지요.

그런데 심장의 침묵에서는 다시 잘 여미고 나온 차림새ㅡ와 함께 돌아온 여린 목소리. 함께 보니 어라, 옷을 여미고 또 여미지 않는 것도 아더의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방법이었던 걸까 싶었다. 내일 공연을 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겠지?

 

〈심장의 침묵〉에서는 좋아하는 도약을 들었다. 괜히 매섭기만 한 바-람, ‘내↗︎가↗︎ 알↗︎던 세상 끝났어.’ 한 단계 높아진 비명에서 여리고 애틋한 소리가 났다. 어리게도 느껴지는 목소리. 이런 아이를 두고 엑터는 발길을 뗄 수나 있을까.

 

〈왕이 된다는 것〉. 8월 28일에 극을 전부 쌓아 올린 시아준수가, 이후의 공연부터는 점차로 왕이 된다는 것에 울음을 입혀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뀐 걸까?

더는 울지 않는다. 소리도, 얼굴도. 9월 4일에는 네모꼴로 처지는 입술 위에서 의지를 입고 단단한 눈을 보았었지. 오늘은 그보다도 강건했다. 망설임이나 울음의 흔적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울 때는 우는 모습이 가장 안쓰러운 줄 알았으나.. 눈물 마른 얼굴은 그 척박함에 글썽이게 된다. 언제일까에서 그토록 말갛게도 웃던 얼굴이 더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시련을 겪었다는 뜻이므로. 

하지만 동시에 가슴 아픈 벅차오름을 느낀다. 결국은 그가 전부를 스스로 떨쳐냈다는 것과 같으니.

 

〈기억해 이 밤 리프라이즈〉. 모든 이별 후에 남은 그가 칼 앞으로 무너졌다. 부득불 다시 한번 검을 잡는가 싶더니, 칼끝을 바닥에 콱 박아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떨쳐내듯이 일어서는 모습이 꼭 ‘분연하다’를 그대로 풀어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겪은 모든 상실과 시련이 바닥에 박힌 검 아래에서, 분연한 그의 발밑에서 흩어져갔다. 

실로 지난 역사 위에 선 기세가, 오늘 자의 단단했던 왕이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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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9.10

오늘 보니 돌아온 기억. 어제의 이게 바로 끝, 신을 모독했어! 에서 역시 그간처럼 하늘로 시선을 치켜뜨지 않았던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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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9.10

2막, 오늘은 옷을 모두 제대로 매듭하여 입었다. 어제의 느슨함이 의도한 디테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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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9.10

그리고 기억해 이 밤 ㅡ 상기한 부분 “평등한 원탁 앞에 모여 함께 맹세하리 / 하나가 되어 정의로운 세상 만든다고”의 동작들이 오늘은 완전히 생략되었다. 예뻐서 좋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