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문화예술회관. 오케스트라 피트를 정말 덮기만 했을 뿐인 무대였다. 액자 속의 세상은 피트 너머의 깊숙한 안쪽에만 존재했다. 기억 속 세종 1열의 거리감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블루스퀘어의 시야에 단단히 익숙해져 있었기에 공연 초반에는 기억하고 있는 감각을 깨기 위하여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기억 속의 거리감과 실재하는 거리감 사이의 괴리가 흐려졌다 해서 ‘보던 시야’에 대한 갈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상태로 커튼콜이 되었다. 공연 내내 그랬듯이 배우들의 마지막 인사 역시 액자 안에 머물러 있었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 없이 오가던 루케니마저도. 도로의 중앙선 같은 금단의 경계를 깨트린 이는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손준호 요제프, 그리고 시아준수.

 

서울에서보다 빠르게 브릿지를 타고 내려오는 걸음걸이에 제동이 없었다. 죽음의 천사들 사이를 스르르 헤치고 나와 자신의 자리를 지나칠 때에도, 오케스트라 피트 코앞에까지 다다랐을 때에도. 거침이 없는 걸음은 정확히 무대와 오케스트라 피트를 가르는 경계선을 밟고 나서야 멈추어 섰다. 무대의 경계를 짚은 발바닥이 마치 분계선의 감각을 확인하는 것처럼 지그시 각도를 틀었다. 나아갈 수 있는 최전선에서 발밑은 경계에 둔 채로 객석을 바라본 그가, 아주 매력적으로 웃었다. 넌지시 던지듯이 그려 넣은 웃음이 불붙은 화살처럼 훅 들어왔다. 죽음으로서 건넬 수 있는 가장 스윗한 미소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

 

깐토드, 보랏빛 섀도우, 그리고 죽음으로서는 처음일 네일 없이 정갈한 손톱.

 

MR 덕이었을까. 아주 새롭고도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박자부터 들쑥날쑥하는 리듬(대체 왜?), 귀에 익지 않은 뚱땅..거림까지.

MR과의 공연은 원래 이렇게 들쑥날쑥해지는 것인가? 론도에서는 느렸다가, 마지막 춤에서는 대단히 빨랐다가,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는 느린 정도를 떠나 늘어지는 느낌까지. 황후는 빛나야 해의 랩이나, 밀크의 끄는 소리도 새로운 충격이었다. 전염병의 속사포도 빼놓을 수 없다. 랩하는 엘리자벳은 처음이었다.

 

와중의 감탄은 1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에 있었다. 음을 앞질렀다가 다시 뒤따르기도 하고, 문자 그대로 자유자재로 박자를 밀고 당기는 세상 위의 죽음이었다.

 

서울에서보다 죽음의 조명이 강해진 점은 좋았다. 1막의 그림자나 추도곡에서도 그렇지만, 누군가의 어머니에서 이렇게나 환한 얼굴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삼중창의 거울에서도 굳이 망원경을 들지 않아도 죽음의 얼굴과 표정이 훤히 보였다. 어스름한 검푸른 빛에 휘감긴 모습만큼이나 새하얗고도 새파란 조명을 곧이 받고 있는 죽음도 눈이 시릴 만큼 신비로웠기에, 연출상의 어색함도 없었다.

 

또 너무나도 새롭게 아름다웠던 그림은 〈마이얼링 왈츠〉. 죽음의 머리 위로 길다랗게 은보랏빛 구름을 드리운 듯한 조명과, 은빛과 보랏빛을 신비로이 두르고 객석을 향하여 총을 겨누는 죽음은 이제까지의 마이얼링을 한순간에 지워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또 하나는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의 시작부. 점등의 타이밍이 서울과 달랐다. 서울에서는 합스부르크 문양 뒤로 이미 조명이 환하게 죽음을 비추고 있어 문양이 올라감과 동시에 죽음의 모습이 아래에서부터 차례차례 드러났었지. 오늘은 문양 뒤의 조명이 없었다. 깊은 어둠에 잠긴 죽음은 문양이 모두 치워질 때까지도 침묵하고 있다가,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일시에 조명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순간에 나타나는 빛 받은 얼굴은, 사소한 차이지만 충분히 극적이었다.

 

〈전염병〉. 느릿한 ‘맥-박-이’의 박자에 놀람도 잠시. ‘혈색은 창백해’에서 오랜만에 삼키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좋아하는 소리라 기뻤다. 

〈혼란한 시절들〉에서도. 라우셔 추기경이 건넨 자신의 손을 아주 지그시 들여다보다, 픽 웃었다. 시선이 오늘처럼 분명하게 손을 짚어간 것은 오랜만. 좋아하는 시선이라 보게 되어 흐뭇했다.

 

특이했던 건 전염병이 끝나고 들렸던 휘파람 소리.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타이밍에서 경쾌하게 울리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런 점이 지방공연ㅡ매글이 더 많은 공연의 묘미인가 싶었다.

이건 늘 생각만 하고 쓰진 않았던 건데ㅡ오늘따라 유난히도 잘 보여서ㅡ죽음과 엘리자벳이 앞에서 아웅다웅하는 동안 구석에 외따로 버려진 채 무대장치를 따라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가는 왕진 가방이 세상 귀여웠다.

 

그리고.. 오늘의 죽음은 어째서 그렇게나 발치를 보았던 걸까. 2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에서 계단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발밑을 보며 계단을 내려오는 죽음이라니. 언젠가의 서울에서 계단을 내려오며 휘청하였던 찰나에도 꼿꼿하게 정면만을 바라보던 시선이 떨구어져 있는 모습이 대단히 놀라웠다.

베일에서도. ‘이제 내게 와’, 그녀를 부른 후 시선을 발치로 떨어트렸다. 순간적으로 브릿지 위가 미끄러운 건가, 발밑이 불안한가.. 여러 염려가 솟아났는데, 이어지는 음성에 진정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영원’ 속으로의 굴곡진 음성에서 갈래갈래로 갈라지는 죽음의 마음이 느껴졌으므로. 죽음(자유)를 향하여 마침내 다가오는 엘리자벳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던 오늘의 죽음이, 그만 시선을 떨구어버린 것이라고..

 

마지막. 커튼콜. 유난히 길고 울림이 깊었던 우리 ‘둘이서’. 중간음절 ‘이’를 오늘처럼 길게 늘여 부른 건 처음이다. 끝을 예감할 수 없게끔 음절이 길게 이어지자 솟구치는 객석의 함성에 씨익 웃는 얼굴은 또 얼마나 멋스러웠는지, 여러모로 놀라운 커튼콜이었다. 길어진 음절이 지방공연 특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 탓에 공연을 거듭하며 ‘이’가 점점 길어질지, 마지막의 전주에서는 어떻게 들려줄지 기대되는 부분.

 

*

 

매글이 많은 공연, 웃음소리가 객석 뒤에서부터 해일처럼 밀려오는 느낌이 생생하여 재미있었다. 오늘의 소리를 들으니 서울의 것은 미약한 파도에 그쳤을 뿐인 걸 알았다. 

종을 치는 죽음을 볼 수 없다는 이야기는 미리 들어서ㅡ줄타기는 하지 않더라도 종은 쳤었는데, 아예 그마저의 등장도 없어서ㅡ덕분에 오늘은 엘리자벳의 반응을 처음부터 세밀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시아준수 외의 이야기로는: 신영숙 엘리자벳의 컨디션이 대단히 좋은 날이었다. 덕분에 ‘샤신’의 조합에서 좋아하여 바라는 것들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죽음과의 합뿐만 아니라 엘리자벳으로서도 무척 좋았는데, 늘 좋은 〈추도곡〉과 〈행복은 멀리에〉는 물론 〈아무것도〉까지도 완벽하게 엘리자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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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3.08

우리 둘이이이이이이서를 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