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 무릎의 언약을 기억하냐는 듯이. 

무릎 꿇은 채로 한 손을 제 가슴에 포갰다. 우리 지난날 사랑의 맹세를 기억하냐는 것처럼. 노을 지는 카멜롯에서 무심결에 닿았던 그녀의 체온이 아직 여기에 선명하다고 말하며, 두 사람이 함께 사랑하였던 기억을 되살려오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러나 혼자만의 그리움이었다.

그를 일으켜 세우는 그녀는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어른 같았다. 그녀는 이미 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반쯤은 이생에서의 감정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철저하게 혼자 ‘살아가야’ 하는 그와는 달리. 사랑을 함께했던 동반자라 여기기에는 두 사람의 온도 차가 너무 컸다. 

그래서였다. 할 수만 있다면, 흐르는 눈물로 모든 상처를 씻어낼 수만 있다면.. 염원의 노래와 함께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그러쥐는 양손의 애틋함도 그녀에게는 닿지 않았다.

막 다른 길이었다. 끝난 사랑 앞에서 그는 잠시 울지만, 결국 체념했다. 

아버지도, 누나도, 형도, 사랑도 모두 떠난 자리에서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채 혼자 남았다. 

 

그런데.. 그래서였을까. 검을 줍기 위해 주저앉혔던 몸을 힘차게 떨치고 일어나는 그를 보았다. 한동안 검으로 땅을 짚고서도 비틀비틀 힘겨운 사투 끝에서야 몸을 바로 세우곤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한 손에는 검을 쥐고, 한 손은 주먹을 쥐며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얼마 만에 보는 이 모습인가. 찰나의 감격이 밀려왔지만 잠시뿐었다. 곧장 서글퍼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를 둘러싸고 있음을 본 탓이었다. 그 누가 그를 도울 수 있겠나.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빈 곳, 오직 그 자신만이 스스로를 세울 수 있었다. 그 또한 사무치게 알고 있었다. 여지를 남기지 않고 단절된 사랑 앞에서 그도 돌아설 수밖에 없음을, 사랑도 우정도 무엇 하나 남지 않았음을, 결국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걸 부정할 수조차 없을 만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그는 제법 의연했다. 

그래서 오늘의 그는 짐짓 의연하게 걸었다. 

막 다른 길 앞에서는 다른 방도가 없음을 경험칙상 깨우친 얼굴이 묵묵했다. 차분했고, 겸허히 감내했다. 멈추어 서서 잠시 검을 바라볼 때 온갖 일들이 밀려오며 잠시 울컥했지만 잘 헤쳐냈다. 

바위산을 오르는 여정은 여전히 힘겹고 때로는 초인적인 인내를 요구했지만, 오르막길에서도 꿋꿋했다. 휘청거림이 있을지언정 뒷걸음질은 없었다. 오로지 전진하는 방향을 향하여 못 박힌 시선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내 정상을 다시 밟은 이의 얼굴이 빛 속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는, 전에 없이 단단한 표정을 보았다. 홀로 선 정상에서 그는 힘차게 검을 들어 올렸다. 운명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보란 듯이. 

 

*

 

음향이 좋았다. 좋은 음향을 만났을 때 가장 수직상승하는 노래,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바로 오늘의 노래. 오늘 1막의 음향이 얼마나 좋았냐면, 시아준수 콘서트에서 듣게 될 이 넘버가 곧바로 상상이 되었다. 콘서트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의 파편을 맛본 것 같은 감각이었어. 층층의 소릿결을 온몸으로 받는 기분, 소리분수에 갇혀 청각을 송두리째 지배당하는 느낌.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오라 나의 운명아ㅡ에 이르러 소리가 굳건한 의지를 입었을 때의 고양감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다. 소리가 흡사 망망대해와 같았다. 끝없이 펼쳐진 소리의 층에서 영원을 노닐 수 있을 만큼이나.

 

그리고 〈이게 바로 끝〉. 단연코 오늘의 넘버. 더불어 오늘을 뛰어넘어 이 넘버 전체의 역사를 새로 쓸 것임을 확신한 순간은 “신을 모독했어!”

배신을 생생하게 확인한 그가 검을 움켜쥐고 달려들 때의 비명은 꼭 악기의 파열음 같았다. 생을 다한 악기가 파편이 되어 산산조각 나는 순간에 낼 법한 소리였어. 길고, 참담하며, 두 번은 없을. 

“너희 둘을 카멜롯에서 영원히 추방한다.”

격한 숨과 함께 바득바득 응분을 토해놓고는 두 사람에게서 등을 보인 후에는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을 짓는데.. 말없이 떠나가는 인기척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는 순간에는 그의 심장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무너지는’ 모든 것이. 

 

*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굳건한 어깨동무에서의 짓궂은 표정 뭐였지. 세상에. 시선을 정면으로 툭 던지더니, 웃음을 싹 거두고 짐짓 결연하게 ‘어.깨.동.무.’ 어쩐지 처음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일 다시 주시해보아야겠어. 

 

“색슨족을 물리칠 기회”라는 멀린의 말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대뜸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을 풀어놓더니 이제는 뭐라고? 대체 저 사람은 뭐람, 저건 또 무슨 소리람, 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나는 전사도 왕도 아닌데, 지도자라니!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그럼요 대단했어요.” 남의 일인 양 시치미를 뗀 후였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기네비어를 보다 슬쩍, 검지손가락으로 웃음을 훔쳤다. 머쓱한 듯 쑥스러운 듯. 

기네비어에게 가슴 콩! 으로 격침당한 후, 제 쪽에서 한 번 시도해보려고 다가가보다 그만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또 머쓱했고. 

 

〈이렇게 우리 만난 건〉. 아더의 아무 말이 ‘수습’을 위한 것임이 분명해졌다. 평소보다 조금 더 명료한 버벅임과 쉼표를 강조함으로써. “아, 아니요.. 하지만 정찰대를 보낸 것만은 확실합니다.”

“전 엑스칼리버를 뽑기 위해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의 부드러움은 꼭 잘라서 들을 것. 

또 오늘따라 습격에 당하여 쓰러지고 나서 랜슬럿과 기네비어의 부축이 늦은 탓에 바닥에 오래 엎어져 있었다..

 

〈왜 여깄어?〉

“왕이 되어야 할 너의 운명.” 

멀린의 당부에 고개를 떨군 얼굴이 침통했다. ‘운명’임을 이제는 알겠으나, 선뜻 알겠노라 대답할 수 없는 얼굴이 번민하고 있었다. 나의 운명을 향하여 누나의 불행을 밟고 갈 수는 없다고. 상식과 인의를 져버릴 수 없는 갈등 범벅된 선한 얼굴이 예뻤다. 사랑스러워서 안아주고 싶었어. 

 

〈기억해 이 밤〉. 마지막의 얼굴. 비장하며 강인한 그의 얼굴 아래로 모르가나와 기네비어의 상반된 표정이 여러 감회를 주었다. ‘기억해 이 밤’만을 합창하며 비소하는 모르가나와 맑은 눈을 희망으로 반짝이는 기네비어. 남매의 상반된 처지, 정반대인 두 여성의 눈빛이 새삼 서글펐다. 

 

〈오래전 먼 곳에서〉. 

이렇게, “박수 두-번.” 두 번 짝짝, 가볍게 손뼉 치는 시늉을 해 보이고는 곧게 선 그가 눈을 빛냈다. 누나, 할 수 있지? 눈으로 묻는 얼굴에 얼척이 없었다. 모르겠다고 모르가나 대신 대답해주고 싶었어. 하지만 나도 그녀도 그럴 수 없었다. 기대감에 한없이 반짝반짝하는 그 눈을 앞에 두고는 차마. 

 

피로연, 전력으로 술에 취한 그를 보았다. 두 잔째 들이키고 나서 크-하! 하는 얼굴로 풀썩 고개를 떨구더니, 기네비어에게 춤을 청하며 내미는 손이 취해서 느릿느릿 하늘거렸다. 기네비어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바람에 한참을 손을 내민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동도 없이 손 내민 채 얼음이 된 모습까지도 취기가 폴폴. 

 

이쯤에서 그간 아쉬웠던 부분을 적어 보자면: 민경아 기네비어와는 결혼식에서의 교감이 항상 아쉽다. 아더와 기네비어가 주고받는 자잘한 합이 많은 여기서 기네비어의 주의가 항상 다른 곳을 향하는 탓에, 정작 결혼식의 주인공인 두 사람의 호흡이 삐그덕거린다. 가령 멀린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오늘은 이 세상이 다 내 것만 같아요) 잠시 다녀오겠노라 기네비어에게 눈인사할 타이밍만 해도. 민경아 기네비어와는 눈인사의 합이 자연스러웠던 적이 거의 없다. 아예 아더 혼자 하거나,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눈만 맞추거나 하는 식인데 오늘도 역시나. 민경아 기네비어가 아예 등을 지고 그를 전혀 돌아보지 않은 탓에 ‘잠깐만, 다녀올게.’ 의 눈인사는 그녀의 어깨에만 닿았다. 이런 사소한 호흡조차 매끄럽지 못하니, 민경아 기네비어는 정말 아더를 사랑하기는 했는지 알쏭달쏭 아쉬워질 수밖에.   

 

〈눈에는 눈〉. 아더의 불길을 잡아채 내고는 승리의 얼굴로 의기양양하던 신영숙 모르가나, 듀엣의 소절이 되어 아더와 마주 볼 때에는 단번에 표정을 갈무리하고 세상 슬픈 얼굴이 되는데.. 침울하게 잠긴 표정과 갸륵한 목소리의 가면을 쓴 슬픔. 그것을 마주하는 아더가 안타까웠다. ‘내 동생’이라 불러주는 모르가나만큼은 내치지 않았는데, 누이도 다른 모두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ㅡ혈연의 배신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혼자서 가〉. 그만해! 기네비어의 등장으로 제지당한 아더. 랜슬럿에게서 물러나며 엄지로 아랫입술을 스윽 훔쳤다. 찰나의 멋짐 공격. 

그리고 어제, 랜슬럿의 어깨를 베고 마지막 일격을 위해 자세를 잡으며 유독 왼손으로 검을 동그랗게 말아쥐었었지. 손을 말아쥔 상태에서 검을 빼면 자칫 다칠 수 있어서 염려되었는데 오늘은 다행히 평소와 같이 손바닥을 챠르륵 펼쳐서 그사이에 검을 끼웠다. 검이 무탈하게 스르륵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어제의 몫까지 안도했다. 늘 조심해야 해 아더.

 

심장의 침묵 인트로. 

“괜찮다잖아.” 이를 악문 대답. “신경 꺼.” 쏘아붙인 후에 양손으로 허리를 짚었다(허리손은 처음!). 숨을 가다듬듯 가슴을 부풀리며 고개를 푹. 

“감히 왕 앞에서 말할 땐!” 의 분노는 어느 때보다도 컸다. 비교해서 들으면 더욱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터이니 꼭 잘라서 듣자.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의 절망이 읊조림에서 완연한 대사가 되고 나니 이어 “아버지...”를 찾게 되는 전개도 더욱 확실한 탄력을 받는다. 어제도 느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아버지, 보세요, 제가 다 망쳤어요. 저는 당신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의 흐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눈에는 눈 리프라이즈〉에서는 오랜만에 찰나의 피식~🤭

오늘의 〈왕이 된다는 것〉은 혼자 간직해야지. 💜💛💚🧡 

 

샤아더 사랑해.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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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6

카돌그에서 손가락으로 웃음 훔치며 참는 거, 혼자서 가 끝나고 엄지로 입술 슥 훑는 거 오늘 또 보고 싶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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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7

굳건한 어깨동무의 표정 오늘은(0726) 하지 않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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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9.07.27

카돌그의 웃음 훔치는 손가락은 오늘도(0726) 보았지만, 혼자서 가의 엄지는 손등이 되었다. 엄지.. 보고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