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팔을 축 늘어트린 채 터덜터덜 끄는 걸음걸이. 바닥으로 떨군 눈동자. 어딘가로 이끌려가는 듯한 맥없는 표정. 다이코쿠 부두 창고로 걸어 나오는 오늘의 그에게서 철저한 타의의 움직임을 보았다. FBI 수사관의 걸음걸이도 그랬지. 의식이 소거된 채 노트에 끌려다니는 걸음으로 지하철 선로로 뛰어들었다. 창고에서의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증명할 수 있다며 속삭이기 시작하는 목소리의 홀린 기색도, 변함없는 진실을 폭발해내는 부분의 확신도 완벽하게 노트의 지배하에 있는 것 같았다. 노트에는 아마 이렇게 적혀 있었겠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라이토를 창고로 불러낸다.
 
어림짐작이었을 뿐인 예감을 라이토가 확인해주었다.
 
"승리를 확신하는 네 표정이 보고 싶었거든."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는 대사였다. 시나리오는 단순히 적을 제거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숫자들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교하고도 치밀하게 도출해냈다 믿은 결론이, 엘의 지성이 전부 노트의 각본 위에서 놀아났다는 정신적인 좌절감을 안겨 주었으므로.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지(깔끔하게 죽이기만 하면 되는 것을 정신과 자존감마저 짓밟은 거잖아? 어느 사이에 이렇게 악이기만 한 자가 되었나).
 
아니나 다를까. 라이토를 겨눈 총구 너머로 순간적으로 모여드는 분노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죽이지는 못했다. 노트에 적혀 있었으니까.

라이토의 도발에 발끈하여 방아쇠를 당기지만, 다리에 빗맞힌다.
 
인형처럼 움직이는 그를 말리고 싶었다. 그 안에 남아있는 자의식이 문득문득 깨어나와 두 눈동자에 의문의 형태로 뭉칠 때마다, 하지만 노트에 적힌 운명을 결코 거스를 수 없어 어떤 행동도 의도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저렸다.
 
더욱 절망적이었던 건 마지막. 총구를 스스로에게 겨눈 채 정면의 허공으로 시선을 던져둔 얼굴이 마치 최후의 처분을 기다리는 듯하여, 나는 차라리 어서 운명이 그를 덮치기를 바랐다.
 
양팔과 다리, 전신이 노트의 힘에 결박된 채 삶의 마지막 얼굴로 그가 흐느끼듯 웃었다.

이 순간, 오늘의 그는 기뻐하기로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손끝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전신을 지배하는 무력감 속에서, 뜻대로 할 수 있는 단 하나 남은 것ㅡ자의식으로 말이야(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힌 인간이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지의 문제에 대한 답은 '가질 수 있다'인 것 같다. 만화 속의 엘도 죽으면서 마음속으로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죽으니까). 죽음의 공포나 생사의 허망함으로 절망하는 대신, 그것으로써 자존감까지 철저하게 짓밟은 라이토에게 끝까지 대항했다고.
 
그런 엘을 위하여,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가 내린 선택ㅡ '희열'이 눈앞의 죽음을 압도하는 것이었기를 바랐다.
 
불타오르던 두 삶이 노을처럼 지고, 남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엘을 애도하는 자는 없던 레퀴엠은 허망함의 종지부였다. 그의 시간이 완전히 멎어버린 공간에 흐르던 노랫소리의 어울림을 인정하면서도 원망스러웠다.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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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7

둘로 나누어 쓸 만큼은 아니라, 레퀴엠 이외의 후기는 댓글로 덧붙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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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7

난간에서 점프하듯 내려와 뛰어들어가는 어둠 속 모습을 보며 늘 안도한다. 가뿐하게 내려와, 내달리듯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도 역시 멋있었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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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7

The Game Begins. 

건방진 멍청이 하! 에서 점점 더 깊은 분노가 끓어오른다. 귀을 타격하는 거친 비웃음. 너무 좋다.

끝을 알 수 없는! 에서는 가슴 탁! 손을 얹고 그 자세 그대로 잠깐 정지했다. 어제는 탁탁탁 두드렸는데 오늘은 무언가를 다짐하는 듯이 가슴에 손을 탁 얹었어. 

고등학생에서는 은은하게 웃는데, 첫공 언저리에서처럼 완전히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는 건 이제 하지 않는 걸까. 완전히 바뀐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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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7

구석구석 등장할 때마다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모두 보았다. 소이치로와 라이토의 듀엣에서 그렇게 일찍부터 (거의 넘버 시작부터) 등장해 있는 줄은. 벽 뒤로 등장하기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 순간인데도 엘처럼 걷고 있기에 그답다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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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7

오늘의 신발은 시합 전에 말썽이었다. 안 벗겨져 ㅋㅋ 왼쪽 신발을 먼저 벗었는데 저리로 거의 내팽개치듯 벗겨냈다. 오른발은 왼발보단 차캐차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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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7

스트레칭. 어제의 다리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오른다리부터 바깥으로 둥근 직각을 그리며 차내는 동작을 수차례 반복한 후 왼쪽 다리는 가볍게 몇 번만. 끝에 살짝 중심을 잃고 휘청하였으나 라켓으로 균형을 맞추며 엘스럽게 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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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7

시합 도중에는 라켓을 빙글빙글 돌리다 손에서 살짝 미끄러졌는데 순간적인 순발력으로 캐치. 자연스러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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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7

미사를 심문하며 오늘 굉장히 차가운 얼굴이었다. 형사를 죽었죠? 할 때 웃음기 전부 가신 사늘한 얼굴. 라이토를! 으르렁하듯 내뱉으면서 자못 얼굴을 찡그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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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7

사탕은 처음은 오렌지 1/4 분홍 1/4 하양 1/2

두 번째는 분홍 1/2 하양 1/2


늘 두 번째 사탕이 조금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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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7

시아준수 외의 이야기:

나의 히어로는 히-로우가 되었다. 히어로보다 훨씬 듣기에 자연스러운 듯.

데스노트(넘버)의 영상에 적혀진 이름은 대사처럼 28개. 여기 글자들을 볼 때마다 라이토 성격대로라면 결코 저렇게 쓰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한다. 일정한 굵기의 펜으로 줄과 간격을 정확히 맞추어 빼곡하게 이름을 적어넣었을 텐데.. 저건 너무 중구난방이잖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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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6.27

키라는 신이 아니야! 는 미사의 외침에 씨익 웃는 그는 마치 "그래 신이 아니라 라이토지."라 응수하는 듯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