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 맞서는 왕의 길을 난! 가리-.”

난! 에서 복받치는 음성이 전조였을까. 왕이 된다는 것에서 이런 포효를 듣게 될 줄이야. 

 

소리 자체는 마무리에 긁는 음을 때려 박는 임팩트로 Fresh Blood를 생각나게 했다. 그러나 이 소리가 끌어 올려진 연원을 가늠하면 동치라 하기에는 간극이 있었다.

Fresh Blood의 샤우팅은 지난했던 시간을 박차고 새 시대를 여는 포고였다. 이후의 행보에 거칠 것이 없는 절대자의 독선이 들렸다. 맞수를 상정하지 않는 과단성과 포식자의 여유로움이 팽배했다.

그러나 왕이 된다는 것의 주체는 그저 어린 소년일 뿐이다. 특이할 점이 있다면 왕이 되어야만 하는 운명에 부딪히고 있다는 정도. 그렇기에 불멸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들렸다.

그건 곧,

‘필사적’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

고통조차도 다 나의 운명일 뿐, 피할 길 없다면.

한계를 넘어 가보겠노라는 필사의 용단.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이 한계를 넘어설 때에야 비로소 시현되는 의지를 입은 소리, 오늘의 왕이 된다는 것이 입은 포효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

 

멀린의 수상한 첫 등장. 이어지는 수상한 행동에 우리의 용맹한 아드님, 아버지 앞으로 나와 지키고 선다. 다만 멀린이 딱히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걸 아는 아버지가 아들만큼의 경계심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되는 부자의 태도 대비가 제법 재미있다. 곤두서서 잔뜩 경계하는 아들이 설설 뒤로 밀자, 미는 대로 밀려나기는 하는데 경각심이 없는 탓에 질질질 지지부진한 뒷걸음질. 언뜻 보면 옥신각신하는 것 같은 부자가 귀엽다. 

 

바위산의 불청객을 향하여는 오늘도 회심의 왼발 찌르기.

그럼! 대단했지이~! 가 동그랗게 뭉쳐져서 “대단했쟈앙~”가 된 발음. 찬란한 햇살의 삐요 날갯짓과 더불어 죽음의 잔망 구간.

 

오랜만이라 특히 반가웠던 것. 〈검이 한 사람을〉 두 손으로 검자루를 다잡고 직각으로 세워 올릴 때, 무척 오랜만에 정수리도 감은 눈도 아닌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았다. 검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총기 서린 동공의 형형한 빛. 언제 만나도 아름답다. 좋아하는 순간.

 

성당 공터, 나무 뒤편. 체감상 오랜만의 이지훈 랜슬럿. 그래서 또 오랜만에 보았다. 제 앞으로 굳이 치고 나온 형 뒤에서 으씨! 주먹 꽁 쥐는 동생. 

더불어 기네비어의 시선을 피해 폭 엎드려 내친 김에 아예 팔굽혀펴기하던 아더. 으샤으샤으샤. 가볍게 세 번. 무게감 없는 동작에 감탄 이만큼, 팔굽혀펴기라 하면 자연히 움트는 의경준수의 기억에 아련함 조금.

 

날짜를 붙여 기념하고 싶을 정도로 예뻤던 〈이렇게 우리 만난 건〉의 목소리. 알 수 없는 인생 그 길이 늘 힘들겠지‘마안-’ 평소와 다른 곧은음. 곧게 빼낸 소리의 청명함을 시작으로, 상대방의 목소리를 연신 감싸 안는 어우러짐이 사랑스럽다 못해 간지러웠다. 이렇게나 안온한 목소리, 다감한 어울림. 멀린의 생명력을 다 앗아갈 정도의 상처를 입고서 이런 사랑의 빛을 낸다. 사랑으로 키운 아이라서일까.

 

〈오래전 먼 곳에서〉 역시 목소리가 다했다. 오늘의 목소리가 특히나 예뻤다. 곱디고운 모래알이 자욱하게 깔린 사장에 몸을 맡긴 기분, 어디를 걸어도 금사로 수 놓인 목소리가 주는 황홀한 감각. 세상이 다 알도록 고하고 싶었지요. 시아준수의 목소리가 이렇게나 다채롭게 어여쁩니다.

 

〈기억해 이 밤〉 두 손으로 정중히 잔을 받드는 자세 어쩌면 이렇게 귀티가 나나요. 꼿꼿하게 세운 목에서부터 어깨를 타고 떨어지는 곧은 자세는 감탄을 연발케 하고. 내가 키운 아들도 아닌데 벅차오르는 감각에 가슴을 다잡는데, 세상에. “지키리라~” 올곧은 음성이 카멜롯을 뒤덮는 순간 순응했어요. 주민1이 되어 덩달아 마음껏 벅차오르기로요.

심지어 바위산의 소절을 마무리하고 내려오기 직전의 표정 뭐예요. 기사들에게로 넌지시 시선 두며 살짝 웃던 그 얼굴. ㅠ

 

아더의 몫이었으나 엑터의 등으로 날아든 죽음. 멀린이 화살을 뽑아가자, 황급히 화살이 뽑혀 나간 자리를 틀어쥐는 아들의 손에 시선을 빼앗겼다. 멀린을 재촉하면서도 상처 부위를 틀어막은 손은 꼼짝않고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며 손끝에 힘이 들어갈지언정 이탈은 없었다. 결국 아버지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환부를 틀어막고 우는 아들에게로 쏟아지는 푸른빛이 잔인하리만치 쓸쓸했다.

조금 전까지 드리우던 햇살 아래 금색으로 반짝이던 소맷단이 오간 데 없었다. 온기를 잃은 서늘한 노란색. 가장 따뜻해야 할 색이 너무도 시리다. 엑터를 잃은 아더의 세상이 이런 색일까.

텅 빈 푸른빛 속에서, 두려워하는 이는 있을지언정 품어줄 이는 없어진 절규가 시작되었다.

 

“저 여자한테 결백 같은 건 없어↗︎” 어미가 여느 날보다 조금 높았다. 평소 분노의 파동으로 강고했던 문장이 오늘은 어쩐지 떨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단죄를 위해 달려드는 비명 끝이 울음으로 부서졌다. 검이 땅으로 처박히는 소리가 참혹하게 울렸다.

뿐일까.

“둘 다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져!” 

끅끅대는 울음이 문장을 바짝 따라붙었다. 제 상태를 다 숨길 여력이 없어 보였다. 단말마처럼 토해지는 울음이 이렇게 선명한 적이 또 있었나. 노래도 대사도 거의 온몸으로 우는 수준이었다. 추방 당하는 자보다 추방하는 이가 더 고통스러워 보이는 날.

분노라기보다는 통울음에 가까운 〈이게 바로 끝〉이었다.

 

 

9월 19일의 최종장 〈기억해 이 밤 리프라이즈〉를 함께 장식한 둘, 검을 내려긋는 동작과 바위산 앞에 두 팔 벌려 서던 뒷모습. 후자는 그날의 본능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전자만이 오늘로 삼세번 째 다시쓰기 되었다. 

 

내려긋는 기세는 나날이 분연해진다. 

매번 많은 것들이 허공에서 가로베인다. 지난 역사이기도 할 테고, 나약한 인간성이기도 한 것. 많은 것이 갈무리되고, 또 많은 것이 새로 세워지는 순간을 그는 검을 내려긋는 결기 안에 함축해낸다.

 

가로베인 후에 남은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 보이는 굳건한 마음.

실패를 딛고 배울 줄 아는 용기.

세상 어떤 역경에도 다시 일어나야만 하는 한 사람의 어깨로 다 짊어진 한 뜻, 한 길, 한 맘, 한 꿈이었다.

 

 

덧. 오늘의 혼자서 가에서는 넘어지며 무려 슬라이딩을. 너무도 실감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들부들케 했던 형제(?)의 싸움.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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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9.25

그런데 전에 없던 포효는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사실 포효가 오기 전까지의 끝음이 오늘따라 매우 예쁘게 뻗어 올라간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영향을 미쳤을까? 앞으로도 지속될 변화인지는 오늘 공연을 보면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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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9.25

9월 25일, 다음 공연. 포효는 오지 않았다. 이어질 변화였다기보다도 그날의 즉흥이었을 확률이 높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