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적고 싶지 않은 날이다. 그가 허락한 시각적 황홀함과 청각적 환희에 잠겨만 들고 싶은 날이야. 내일의 공연이 조금은 더디게 왔으면, 하게 되는 그런 날.
 
오늘의 넘버는 사라진 아름다움.
 
 
1. Beautiful World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신의 선물.’ 합창의 폭포수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 도리안도 도리안이지만 너무나도 시아준수 헌정곡 맞고요. 넘버가 모든 가사로써 그를 지향하는 청각적 자극이 짜릿하기 그지없다. 다채로운 음이 홍수처럼 흐르고 흘러 ‘도리안=시아준수’로 귀결되는 감각. 최고야. 훌륭해.
또한 합창. 겹겹이 쌓이는 음이 극에 달하여ㅡ해가 지지 않는 세상의 중심ㅡ폭포수처럼 떨어질 때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끝 모를 희열.. 손끝을 자극하는 음악.
 
2. 첫 등장
오늘의 아름다움은 침묵의 뺨. 하얀빛 조명이 쏟아져 아름답게 그림자진 두 볼. 음악으로 깎고 투명한 색채로 빚어가며 완성해낸 듯이 그윽한 뺨. 마치 조물주가 있어 그를 빚어놓고 마무리로 별무리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가득 담아준 듯한 옆선.
그 얼굴선이 흐르는 음악을 따라 아름답게 절제된 곡선을 그리노라면, 저 아름다움을 빚기 위하여 이 세상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야 말아.
 
3. 찬란한 아름다움
전혀 몰라도 돼, 헨리를 잘라내는 배질의 단호함에 물음표를 띄우던 무구한 눈이 반짝거렸다. 이어지는 배질의 애드립엔 웃었고. 웃지 마, 정 들어.
 
4.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오늘의 발견. 절정부의 마지막 소절 ‘시간의 저주를 피할 거야’ 직후 초상화를 향하여 다가섰던 뒷모습이 서서히 정면의 얼굴로 반원을 그릴 때. 어둠에 잠겨있다 모습을 드러내는 얼굴이 C의 각도로 꼭 해돋이였다. 흑과 백으로만 양분된 무대 위에 가장 순결하고도 눈부신 존재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뺨을 감싸 쥐는 모습이 느리게 느리게 시야로 담겼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어둠 속으로 잦아드는 그림까지. 내가 배질이었다면 이 모두를 그림으로 그렸을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 얼마나 내 심장을 가득 채웠는지도.
 
5. 당신은 누구일까
오늘 청혼할 생각이에요ㅡ의 귀여운 단호함. 괜찮겠어요? 물어보는 듯한 생략의 마침표. 일생일대의 로맨스라구요오! 는 유난히 아이처럼 끝을 늘려 투정 댔다(앞으로도 계속해서 완전 귀여울 것 같당). 뿐 아니야. 여기선 영락없이 딱 열여덟 소년이다. 자켓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헨리를 향하여 지어 보인 표정이 너무나 귀여웠어. 양 볼이 이케 뿌듯하게 솟아서 의기양양! 자신감 충만!
 
계단에서 뒷걸음질 쳐 내려올 때의 맵시는 영락없는 왕자님. 한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마음이 몽글몽글 뒷모습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사랑이 전해준 알 수 없는 관능의 환희에 어쩔 줄 몰라하는 엷여덜 소년 또한 보여.
 
애드립은 쓰레기!
 
6. 최악의 줄리엣. 오늘은 뒤로 넘어가는 대신 허리를 푹 숙였다. 아, 줄리엣을 잃어 상심한 왕자님이여.
 
7. 시빌 베인의 죽음 -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찬란한 아름다움이 나올 때마다 (그 부정한 영향력에) 도리안도 기뻐하지만 나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도리안의 정신을 지배하는 듯이 1막 내내 되감기 되는 이 곡이 흐를 때마다 극으로 치닫는 그의 영혼이 두 눈에 선하다.
‘왜 고통을 느껴.’ 마약처럼 퍼지는 악마의 속삭임에 끔찍한 고통으로 괴로움 가득하였던 얼굴이 그제야 약간의 웃음을 비추었다. 달콤한 망각. 죄악감 없는 외면.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는 두 눈에는 흡사 경외와도 같은 동경이 스며있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짜릿한 통각으로 심장이 저몄다. 저 너머의 영역으로 자꾸만 나아가는 그를 멈추어야 하는데, 그 끝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 또한 강하게 치달아서. 내 안에는 헨리와 배질이 동시에 존재하는 걸까 싶어서.
 
8. 1막의 또 다른 나. 타락 충만하여 걸어 나오는 도리안을 굉장히 흐뭇하게, 잘 되어가고 있다는 듯이 다문 입술로 웃으며 보는 헨리를 오늘 보았다.
 
9. Against Nature
1막의 종장에서도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드러나는 도리안과 헨리의 사슬. 본격적인 쾌락주의로 나아가는 도리안에게 쐐기를 박는 동력은 1막 내내 그러하였듯, 어김없이 ‘찬란한 아름다움.’ 거침없는 기세로 저 멀리 정면만을 바라보던 도리안이 유일하게 뒤를 돌아보며 호응하는 순간인 것조차 완벽하다. 완벽한 쾌락의 완성을 향한 두 공범의 모의 같기도 하고, 헨리의 영향력 하에 피어난 아름다운 마리오네트 같은 그이기도 하였던. 이 배반적이고 배덕한 관계를 어쩌면 좋을까.
 
새로이 비상한 좋아하는 안무는 신이시여 용서하소서에서 두 손을 꼭 맞잡아 청하는 찰나. 그와, 그를 따라 그림자들이 함께 기도하는 순간.
 
그리고 5일 공연에서 본 이후로 자꾸 춤출 때의 표정을 보게 된다. 도리안의 얼굴을 입은 시아준수의 얼굴을 자꾸 보게 돼. 어떤 찰나에서조차도 도리안의 얼굴을 내려놓지 않는 시아준수의 얼굴을 자꾸만, 샅샅이.
 
10. 넌 누구
얼굴이냐 전신이냐 고통스러운 선택의 시간. 오늘의 선택은 전신. 액자 속 그가 자아내는 위험하도록 관능적인 자태를 보았다. 팔놀림 한 가락, 다리의 한 줌이 그려내는 매혹적인 그림을. 여기 이 액자 씬은 정말이지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라일락향 가득했던 젊음ㅡ내 눈의 그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데 그는 스스로를 젊고 아름답게 느끼고 있지 않는 듯한 이 가사가, 영혼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한 이 가사가 오늘의 따끔한 가시였다.
 
초상화를 가두느라 흐트러진 자태는 오늘에서야 말하지만 늘 그랬듯 너무도 섹시했다.
 
12. 무엇이 기다릴까
날 사랑했던 당신의 마음을 들킬까봐? 그래 널 사랑했어. 인정하자 푸스스 스며드는 웃음. 걸려들었다, 혹은 그러면 그렇지. 배질에 대한 자신의 여전한 영향력을 확인하고 설핏 안도하는 것도 같았던 찰나의 미소가 얄궂었다.
 
내 영혼의 비밀ㅡ에서 찬란한 아름다움로 흐름과 함께 선에서 악으로 변모하는 목소리는 황홀하기 그지없다. 선악을 한꺼번에, 그것도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어. 감추고 싶은 비밀이라면서 목소리는 그 비밀을 역력히 들려주므로.
 
목소리뿐인가. 하늘하늘한 팔은 마치 나비의 날갯짓 같아서, 그는 정말로 사라져버릴 듯한 신기루 같다. 이 장면에서 그가 선사하는 나폴나폴한 감각적인 자극은 죽음의 무중력감과는 다른 느낌이다. 산뜻산뜻 살랑살랑한데 그 끝에는 영혼에 발목 매인 듯한 검질김이 달라붙어 있다. 마치 날고 싶으나 묶여 있기에 날 수 없는 영혼 같은. 자유롭고 싶으나 자유를 잃은 바람과도 같은.
 
그리고 오늘 선명한 쪽소리를 들었다. 굉장한 문제는 이조차도 굉장히 의도한 연기 같았다는 것. 부드럽고도 자극적으로 쪼옥- 닿았다 떨어지는 찰나의 소리가 청각으로도 배질을 자극하는 듯하여서, 와, 처음엔 귀를 의심했고 곧이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위험했어. 모두를 시험에 들게 할 필요는.. 있는가요?..
 
게다가 가운은 어째서 그렇게 내내 활짝 벌어지게 입은 거양..
 
13. 넌 어디로. 친구의 절망을 보면서도 희망적인, 도리안에 대해 매몰차지 못한 배질의 가사. 너무도 순정순정해.
 
14. 또 다른 나
내가 그 나이로 보이나? 물을 때 도리안 니가 나라면 나오는 건 오늘도 소름 끼치게 좋아서 심장이 막 두근두근.
 
또 약간의 피드백. 재등장이 한 마디 더 빨라졌다. 이제는 무곡의 도입 소절과 함께 되돌아오는데, 역시 절정은 현재해야 한다. 막에 가려져도 그가 무대에 현재한다는 것만으로 훨씬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
막을 내리는 건 그를 가린다는 면에서는 언짢지만 막과 뒷면ㅡ앞뒤의 영상이 함께 하나의 혼돈을 빚는 교차 연출은 좋다. 아 저런, 연출과 화해할 것 같아 어쩌나.
근데 영상이랑 노래랑 안 맞는 게 원래 그랬던가. 오늘만인가. 갸웃.
 
15. Life of Joy
고통? 전 행복해요. 이를 악 물고. 쐐기를 박듯이. 스스로의 의문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인간을 매혹하는 건 불확실성이에요ㅡ에서 어둠 속 헨리와 마주 보는 건 오늘도 슬펐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사로잡힐 수 있나. 혹은.. 영혼의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헨리의 지론에 스스로를 함몰시켜 온 걸까.. 싶어서.
 
찬란한 아름다움에서야 웃는 것도 오늘 역시. 비릿하게 그려지는 미소는 그 주문을 기다린 것만 같았다. 깊은 곳의 영혼을 건드리려 하는 배질의 질타에서 자유로워지자 그제야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었고. 타락 충만해져 배질에게 달려들기 전에 오늘은 심지어 살짝 작은 주먹까지 쥐었어.
 
16. 악의 꽃
이 장면의 그를 보면 나는 늘 어떤 고전이 떠올라요. 그래요, 아마 셰익스피어일 거예요. 비너스의 가면을 입고 안토니우스에게로 강림하였던 옛 이집트의 여왕과 같은 자태의 아름다움을. 올림포스 신들에게서나 엿보일 듯한 신성한 순결을. 그 모든 것을 갖춘 존재가 이 장면의 도리안이리라 감히 말할 수 있어요. 왈츠를 추는 그를 보면 이 감각은 단정이 되고 확신이 되어 소리내어 말할 수밖에 없게 하지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 끝없이 감각적인 아름다움.
신이시여, 왈츠씬 부디 박제를..
 
샬롯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그 소리를 발견한 그의 눈꼬리가 스르륵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손가락을 까딱여가며 군중 속의 목소리를 찾다가, 찾아내었을 때 입술을 스쳐간 미소. 매혹적이었다.
 
17. 천사의 추락
죽음이 내린 공간 속에 홀로 하얗게 아름다운 그가 순결한 만큼의 위화감을 자아내는 순간. 여기 이 연출도 너무 좋다. 티 하나 없이 말끔한 순백의 차림으로 죽음을 불러온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나게 좋아. 텅 빈 영혼으로 고통조차 지워버린 듯이 웃는 그 얼굴이, 좋아.
 
18. 너를 보낸다 reprise
배질? 제발 내 선행을 폄하하지 말아줘요ㅡ에서 오늘은 배질? 을 생략했다. 배-질?의 어미를 좋아하는데 내일은 들을 수 있기를.
 
칼을 그러쥔 울먹거림의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 역력하게 젖어있던 목소리. 찌른 직후엔, 오늘은 칼이 아닌 자신의 손을 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두 눈이 칼을 쥔 손으로 떨어져 황망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주저앉아 울음하기 전에 뱉어냈다. 자신이 죽여버린 이름. 오랜 친구의 이름.
 
19. 사라진 아름다움
너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절대 살인을 하지 않아ㅡ사형선고라도 되는 듯이 고여 들던 눈물. 돌이킬 수 없음을 확인받은 얼굴. 기대어 보았으나, 다시는 들려주지 않는 찬란한 아름다움. 끝나버린 쾌락의 확인. 사라진 아름다움.
 
가사가 모두 과거형인 것이 너무도 슬펐다. 전부 과거형이 되어버린 현재하는 그가 슬펐다. 끝나버린 여름을 온몸으로 느끼는 듯한 그가 슬펐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내 자신이 사무쳤다.
우리가 바라던 건 무언가ㅡ회한하는 두 공범의 멜로디가 너무나 아름다워서도 슬펐다.
 
20. 도리안 그레이
내 눈에 비추어지는 그는 여전히 아름답고 젊은데, 정작 그의 눈동자는 변해버린 자신의 영혼을 담고 있었다. 눈물 고여 일렁이는 눈에서 끔찍한 회한이 보였다. 그러나 고통을 담은 눈으로도 초상화는 차마 마주보지 못하는 어깨가, 바라보고도 금세 고개를 떨구는 얼굴이 심장을 세차게 조였다.
 
죽음에 잠긴 눈은 오늘은 울음하기보다 회한했다.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소리없이 쓸쓸히. 오늘의 마지막은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