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바랐던 때가 있었지. 그러나 이제는 당신을 위하는 까닭에 구원을 바랄 수 없다. 허황의 낙원에 그치는 레퀴엠이어야만, 그것이 당신의 구원이 되므로. 구원이 없어야만 구원이 허락될 수 있기 때문에. 환영들 틈에서 가장 고독한 환영인 레퀴엠의 그를 눈물과 웃음으로 보내며 그리 생각했다.
 
*
 
오늘의 도리안 그레이.
'다 사라지나.' 노래를 시작하기 전 비잉- 자신의 눈앞을 둘러보는 젖은 눈을 보았다.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 혼자 되었음을 사무치게 깨닫고 어둠 속에 떨구어지는 눈이었다. 이렇게 고독하고 철저하게 혼자된 눈은 처음. 혼자된 공간을 이토록 서글프게 더듬는 시선도 처음. 덩달아 시작부터 내 숨을 조여온 '도리안 그레이'도 처음.
아. 그것도 10월 8일을 이어가는 고조로 이어지는 도리안 그레이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10월 8일을 이어가는 오늘의 도리안 그레이에서 다른 점이 있었다면 순수의 소절에서 묻어나는 울음이 평소보다 짙었다는 것.
이어 빛바랜 초상화 앞에 무릎을 꿇고, 어깨에서부터 뺨까지 더듬더듬 거슬러 올라가는 손은 서러움의 절정이었다. 어느 때보다 서럽게 퍼트려지던 어미 '던'의 파동은 그 쐐기.
 
심지어 그 서럽게 우는 얼굴로 오늘은 기어코 웃었다.
 
아름다운 소년이 나를ㅡ오랜만에 아주 맑고, 아주 개운하게 웃음을 그렸다. 눈과 입술로, 젖은 콧등으로.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미소. 그건 참회자의 고백 같은 웃음이었다. 내 죄악의 생을 이제 끝내노니, 이제 나를 향하여 이처럼 미소 지어다오.. 하는 것처럼.
그러나,
부른ㅡ에서 다시금 스며들기 시작한 흐느낌은
ㅡ의 종장에서 끝내 언제나와 같이 완연하게 번진 울음이 되어 멎었다.
 
그렇게 웃고, 또 울었던 오늘의 그였다.
 
*
 
 
1.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이 젊음이 사라지면, 너의 이 아름다움도 '사라져 버리는 거야.'
'사라진다'의 충격에 사로잡힌 얼굴이 멍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잠시 머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배질의 질타는 그저 그를 스쳐 갈 뿐. 필연적인 상실을 자각한 얼굴로는 결코 닿지 못했다. 헨리 워튼의 몇 마디 속삭임에 사로잡힌 정신이 하나에만 몰두했다. 시간의 저주를, 피-할↗거↗야↗. 이 같은 강약에 도입된 이래로 가장 처절한 몸부림의 소리였다. 그렇게, 정말 좋았던 오늘의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2. 당신은 누구일까
오늘의 귀여움. 당신은 누구일까가 다했네. 소파에 앉아 가지런히 모은 작은 무릎 위로 살포시 포개어진 두 손이 귀여웠고, 녹록지 않은 헨리 워튼의 뒷모습을 보다 작게 읊조린 이씽-이 귀여웠고, 아! 하는 얼굴로 검지로 하늘을 콕 찌르면서 퍼뜩 일어나 입술을 축이는 혀가 귀여웠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헨리 워튼의 책을 끌어내리는 앙큼한 손바닥. 사랑스럽게 들이민 고개. 으으. 너무 귀여웡.
심지어 뱃 보이! 일침하고는 손가락으로 저 사람 보래요~ 하는 동작으로 가리키며 나갔당. ㅋㅋ 귀여워. ㅋㅋ 오늘 왜 이렇게 귀여웠지!
 
오늘의 사랑스러움. 시빌 베인과의 짧은 만남 후, 무대로 돌아올 때. 발끝에 회전축을 두어 핑그르르 돌아보는 맵시. 그 바람에 팔랑이는 자켓의 양 끝에서 요정가루가 폴폴 쏟아지는 것 같았다면 믿을까.
 
노래적으로는.. 나하나 시빌과의 듀엣 파트는 굉장히 묘하다. 애초에 정해진 음계 자체가 '의도한 부조화'처럼 들려. 이 부조화스러움이 꼭 그들의 곧 끝나버릴 사랑의 암시처럼 들려서, 극의 흐름상으로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노래적으로는..
 
3. 최악의 줄리엣
찡찡이의 출현♡ 맨날 조는 앨런을 톡 쳐서 깨운 뒤, 검지로 콕 찍어 가리키며 눈썹을 한껏 내리고 입술은 잔뜩 내밀어 뾰로통 중얼거렸다. 으아아 찡찌아♡
 
그리고 나하나 시빌은 늘 그의 마이크에 머리카락이 걸리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꼭 두 차례에 걸쳐 엉켰는데, 두 번째에는 그가 매우 annoying한(대체할 표현이 없다..) 표정으로 머리를 뒤로하여 머리카락을 빼내는데 정말 질색한 것 같았어. 정말, 좋아하는 우연한 디테일이야.
 
4.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이어서' 부르는 찬란한 아름다움의 순간. 왼 어깨에는 주홍빛 그림자, 오른 어깨에는 헨리 워튼의 손이 얹어진 그. 완전히 사로잡힌 그 모습 뒤로 차마 그런 그를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배질까지. 이것이 오늘의 그림. 이 그림을 목격한 오늘에서야 이 장면의 모든 위선과 위악을 다 본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미지였어.
 
그리고 '좋아요, 극장에서 뵐게요.'
대답은 헨리 워튼을 향하면서 시선은 배질에게로 둔 기묘한 얼굴. 오필리어의 죽음에 경도된 의식이 제 양심의 존재를 인지하면서도(심지어 똑바로 보면서도) 그것이 뒤처진 채 남겨지는 것을 묵인했다. 양심으로부터의 이탈을 그 '양심'을 정확하게 마주 보고 선언하는 그가 안타까웠다. 양심을 버려두고 나가는 뒷모습이 성큼성큼,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매정할 정도로 개운하게 멀어져 갔다.
 
5. Against Nature  시퀀스
1막 또 다른 나 긁는 소리는 정말이지! 그가 가장 순수하게, 타락에 골몰하였던 시절의 소리가 아닐까 싶게끔 격렬하고 타락 충만하다. 이 순간의 소리에는 그 어떤 번뇌도 없어서, 그저 타락으로만 곧장 내달리는 그를 보는 것 같아.
 
6. Against Nature
사운드가 돌아왔다. 우리 이제 헤어지지 마요.
 
오늘의 그림은 양 무릎을 꿇은 로미오. 개인적으로는 한쪽 무릎의 로미오를 사랑하는데, 오늘은 그에 버금갈 정도로 멋졌다. 양 무릎을 한 번에 꺾어 꿇음과 동시에 그 상태로 스르륵 미끄러져 나오는, 말하자면 슬라이딩 기도였는데.. 와, 세상에. 이건 진짜 보지 않고는 그 충격을 다 말할 수 없어.
 
그나저나 스모그 너무한 거 아닌가. 오늘은 '신이시여'에서 금빛 조명 쏟아지기 전까지는 얼굴이 잘 안 보일 정도였어.
 
7. 넌 누구
난 인정 못 해 이것은 결코 현실이 아냐ㅡ의 강세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씹어뱉는 듯하던 강약은 잠시 넣어둔 소리.
대신 라일락의 소절에서 기묘한 변화. 평소의 넓은 진폭의 소리 대신 쨍하는 금속성으로 가득했다.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음성이 더욱 처절한 느낌을 주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로의 애증 어린 향수가 깃든 소리였다. 그래, '애증'.
 
문닫힘의 소리는 오랜만에 깔끔하게 쾅. 그래서일까. 이어지는 쇼팽의 런웨이에서 객석의 몰입도가 굉장했다. 누구도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숨 막히는 고요에의 그 어떤 균열도 없이, 위선의 평화로 유유히 걸어들어오는 그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이게 내 선택이야, 혀로 아랫입술을 날름 깨물듯 쓰는 그는 살얼음 같던 침묵에 최고의 희열을 선사해주었지. 이렇게 짜릿할 수가.
 
8. 무엇이 기다릴까
요즈음, 너무 힘들어요ㅡ들은 중 가장,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다. 계단 끝 난간에서 허리를 한껏 젖히며 나른하게 연기를 뿜어내던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퇴폐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고통받는 네 영혼, 내 영혼! 배질의 비명 같은 절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보란 듯이 '고통'이라는 단어를 비웃는 웃음의 소리가 점점 아파진다. 크게 소리내어 하, 하, 하, 웃다가 끄으으, 하는 그을린 소리로 번져가는 웃음이 듣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자연스러워서 더. 요즈음 너무 힘들다는 그가 쥐어 짜내는 위악의 웃음임이 분명하기에.
 
무엇이 두려워서ㅡ는 처음으로 정색에 가깝게.
날 사랑했던ㅡ에서는 어제의 시선 처리 변화를 이어갔다. 한 손으로 뺨을 받치고 배질을 보는 대신, 고개를 살짝 틀어 정면으로의 얼굴을 허락하며 내리깐 눈으로 속삭였다. 도발하듯 배질을 똑바로 보면서 대사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정면의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얼굴이 허락되는 것도 좋아.
 
배질의 고해에는 다시금 끅,끅 속에서부터 치미는 웃음을 들려주었다. 무정하고 잔인하나 미워할 수 없게 아름다워서 좋아하는 웃음이야.
 
그리고 오늘의 충격적인 아름다움. '영원한 삶 선사한 또 다른 나'에서 나폴나폴 미끄러지며 허공을 가르듯 흐르던 두 팔. 와, 세상에. 마치 영원한 삶의 환희를 음미하는 것처럼 흐르는 팔동작이었다. 이렇게 관능적인 아름다움이 있을 수가. 이렇게 눈 시리도록 어그러진 아름다움이 있을 수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 영혼의 비밀ㅡ에 이르러는 영원한 삶에서 귀를 간질일 듯 살그러웠던 소리를 완전히 전복시켜버렸다. 이렇게까지 긁어내는 음성은 처음. 그르렁거리며 목구멍에서 내뱉는 긁는 소리로 '비밀'을 완성시키는 그 모습이야말로 타락한 순결 그 자체였다.
 
찬란한 아름다움은 28일 퇴폐의 절정이었다. 어느 때보다 강했다고 말할 수 있어.
 
최후의 저항ㅡ그를 뿌리치고 돌아서는 배질의 둘레를 위성처럼 감싸며 빙그르르 움직이는 보폭은 또 얼마나 크고 필사적이었는지. 최후의 저항에 걸맞는 최후의 포획을 몸소 보여주었다. 틈 없는 그물로 배질을 잡아채는 갈퀴같이 아름다운 음성이 사냥감을 몰아가는 것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으니.
 
그리고 어제부터 너무 흑흑 너무 위험하여 짜릿하기까지 한, 입맞춤 후 배질을 마지막으로 쓸어내리며 뒷걸음질하는 손길. 뒷목에서 어깨, 어깨에서 등, 등에서 팔꿈치, 팔꿈치에서 마지막으로는 손가락을 사르르르 쓸어내리며 멀어지는 그 야살스러운 손길. 시선으로도 손길로도 배질을 스캔하며 옴짝달싹 못 하게 얽어매는 이 아름답게 위험한 사람을 어쩌면 좋은가.
게다가 오늘은 침실에서 다시 입 맞추기 전, 배질의 자켓을 벗겨주기 전에, 배질의 턱 끝을 부드러이 한 차례 훑어내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가운은 오늘도 빨랐다. 오늘은 아예 아직 정면인 각도에서 가운을 완전히 열었넹. 타이밍이 점차 이렇게 고정되는 걸까.
 
참 가질 수만 있다'면'의 사다리꼴 모양이 되는 입술이 너무 아름답다고 적은 적이 아직 없지. 그러니 적어야지. 입 모양 너무 예뻐요. 좋아해.
 
9. Life of Joy
'안개가 사물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거죠'는 계속 변화 중이다. 인간을 매혹하는 건 불확실성이에요ㅡ에서 곧장 이어가지 않고, 잠시 휘청휘청한 걸음을 옮기다 어둠 속의 헨리 워튼을 발견하고 나서야 이 문장을 이끌어내. 꼭 '안개 속의 헨리 워튼'을 보는 눈으로. 그런데 의문. 그렇다면, 그의 눈에는 '안갯속의 헨리 워튼'이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혹은 안갯속 헨리 워튼이 심어준 '환상'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의미인가?
 
배질과의 실랑이 끝에 붕 날아오른 두 발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도약하듯 그대로 들린 두 발이 잠시 허공에 멈추어있다, 그가 안간힘을 써서 몸을 빼어내는 순간 지상으로 다시 안착했다. 세상에.
 
기도하고 사랑하라 짜릿하게ㅡ에서는 새로운 소리. 오늘 왜 이렇게 곱고 예뻤지? 눈맞춤이 있어서만은 아닐 거야. 분명 소리가 달랐다. 고와서 향기롭기까지 한 소리였어. 그 소리를 듣는 그 누구라도, 기도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아아, 그래. 꼭 세이렌의 소리처럼.
 
참,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라 쏘아붙인 후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배질로부터 등 돌려 가다, 문득 뒤돌아볼 때의 표정이 오늘 너무 섹시하였던 것 >_<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자켓을 여미며 털어내던 손과, 네 등 뒤의 눈물을 무참하게 비웃던 입술.
 
10. 악의 꽃
아리아만큼은 나하나 샬롯의 소리가 좋다. 홍서영 샬롯의 아리아가 아름다웠다면, 나하나 샬롯에게는 독기가 느껴진다. 가시를 품은 검은 장미의 음성이야. 그 위험한 소리에 이끌려 죽음의 위기를 향하여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그가 눈 시리게 아름다운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 새삼 오늘의 아리아와, 그 아리아에 이끌리는 그가 너무도 심장을 아름답게 타격하기에 힘들었네.
 
11. 너를 보낸다 reprise
난 냉혹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를 용서해주었어요. 오늘따라 서둘러 변명하던 목소리. 그러나 상대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목소리. 물끄러미 배질을 올려다보던 얼굴이, 상대의 텅 빈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헛웃음을 뱉어냈다.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전혀 스며들지 못했음을 확인한 웃음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갈랐다. 하, 하, 하, 하. 쥐어 짜낸 마른 웃음이 지극히 고독했다.
 
배질, 제발 내 선행을 폄하하지 말아줘요. 문장을 시작하기 전, 배질을 노려보며 억누르는 '침묵의 음성'이 생겼다. 침묵 끝에 벼르는 것처럼 입술을 짓이기는 소리가 그 마무리. 흡사, '쓰읍' 하는 것 같이.
 
그리고 오늘. 마가복음을 모두 읊은 배질이 다시금 그에게로 시선을 두며 살짝 다가왔다. 늘 마무리엔 고개 돌려 그를 보고는 했지만, 다가온 건 처음. 내 역할을 다하였으니 이제 너의 처분을 기다리겠노라는 것 같은 걸음이라, 마음이 번지지 않을 수 없었어.
 
12. 사라진 아름다움
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ㅡ의 변화. 뭘까. 뭐지. 가장의 순수가 아니었다. 어쩐지 추궁하는 음성이었다. 평소와 같이 완벽하게 평온하고 순수한 가장된 목소리가 아니라, 왜인지 모를 다급함이 느껴졌어. 이어질 변화인지 오늘만의 변이일지는 내일을 기다려보아야겠다.
 
어느 소리보다 귀에 가까이 닿은 것은, 실패의 선언 이후 헨리 워튼의 소절에 내내 깃들어있던 그의 울음 섞인 호흡. 사라진 아름다움 내내 그랬다.
'깊은 고통'에서 몇 번이고 헨리 워튼의 어깨를 그러 쥐는 여린 손으로,
‘아름답게 남겨진 나약한 존재 그게 인간인 것을. 나를 시험한 건 너의 위선’의 울분으로.
나란한 타락을 걸어왔으나 끝내 엇갈리고만 실험자와 피실험자의 운명이 얄궂기 그지없었다.
 
더불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던 오늘의 몸. 바닥에 무너져 바르작이는 몸이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보았다. 잔뜩 질린 눈동자가 두려움을 가득 담은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 안에는 체념도 있었다. 최후의 존재자까지 알아버린 진실. 이제는 그 자신도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된 진실을 똑바로 마주 해야 하는 공포와 좌절이 있었다.
 
 
 
(+)
오늘도 칼배로 그었다.
나도 그냥 배질이라고 불러줘. (그레이와 워튼도 다시 듣고 싶당.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