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아름다움. 비틀리는 고개, 이죽이는 웃음,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과 거듭 부릅떠보려 힘을 주던 눈. 표정도 정신도 의지대로 가누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였다. 찡그렸다, 웃었다, 무표정해졌다, 알쏭달쏭하게 몽롱해지기를 반복하는 얼굴이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그 얼굴로,
"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
을 뱉어낸 그가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다가서며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해본 적 있어요?"
그 미묘한 위태로움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흔들리는 인간성과 고통에 마비된 듯한 이성의 그가 안타까운 만큼 기뻤다. 배질의 마지막 말대로 적어도 이같은 순간에서만큼은 그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헨리, 만약에 내가 배질을 죽였다면요?"
곁에 남은 유일한 이를 향해 그가 말했다. 외침이자 호소였다. 고통의 나를 알아달라는, 그래서 버리지 말아 달라는.
심장이 없는 얼굴ㅡ이라며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어가며, '깊은 고통'의 파열음으로, 매달리듯 멱살을 잡아가며, 피할 수 없'는'의 철철 흐르는 통각으로. 온통 상처투성이인 자신을 드러내며 호소하는 옆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가장 아픈 순간은 '조여오던 내 심장'ㅡ의 그가 부르르 들어 올린 두 팔을 내려다보았을 때였다. '내 영혼의 비밀'에서처럼,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에서처럼 자신의 두 팔을 더듬는 시선이 서글펐다. 두 팔 안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가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껍데기의 시선인 그가 쓰렸다. 영혼으로부터 이탈된 채 거짓된 인생 속 허상인 것만 같은 현실의 그가 아팠다.
 
그런 그를 향한 헨리 워튼의 표정을 보는 순간 피가 식는 느낌을 경험했다. 애틋하면서도 멀고 먼 제삼자의 눈이었다. 그의 고통을 인지하나, 자신의 실패가 더욱 사무치는 이기적이고, 그래서 인간다운 눈이었다. 그런 눈을 마주하고 호소하는 그가 가여워 견딜 수 없었다.
"인간의 속박을 모두 다 벗어난 절대적인 아름다운 존재,"
실험에 실패한 시험의 주재자가 입을 열었다. 
"그걸 원했는데."
실패한 실험의 대상에게, 자신의 피실험자에게.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어 보였으나, 그것을 봐주지 않는 자. 자신의 실패가 서글퍼 슬픈 자. 자신에게서 뒷걸음질하며 멀어져가는 헨리 워튼을 보던 그가, 그때까지는 소리 내어 흘려보내던 울음을 안으로 삭이기 시작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간 울음에서 사라진 소리가 서글펐다.
 
자신에게 이상향을 심어주었던 존재의 위선을 절절하게 깨우친 얼굴이 언뜻 담담했다. 체념을 넘어, 이제 매달려도 소용없음을 알아버린 눈이 어떤 의미에서는 고요했다.
 
우리가 가지려던 환희 무엇이었나ㅡ그 환희의 진실을 말하는 마지막의 가사. 공허한 쾌락 남겨진 추함 사라진 아름다움. 자신의 현실을 노래하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았다. 이제는 누구도 쓸어주지 않는 등이 철저하게 혼자였다.
 
 
 
*
 
1. 배질의 화실
가지 마세요, 헨리. 일으키는 몸에서 이렇게 흥분한 숨결은 처음. 쌕쌕이는 숨이 몇 번이고 토해졌다. 그 다급함이 귀여워서 혼났네.
 
2.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오랜만의 A. '시빌 베인은!' 헨리 워튼이 일갈하는 순간 스위치를 누른 듯 변하는 그의 표정을 정면에 가깝게 볼 수 있어 좋았다. 턱에 선연한 울음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맑아진 얼굴. 그렁그렁한 채 어그러진 환희를 좇는 얼굴에서 흐르던 위화감. 정말로 오랜만에 샅샅이 보았다.
 
신선한 바깥 공기를 좀 쐬고 싶어요ㅡ의 억양은 꼭 그 얼굴 그대로였다. 심지를 잃고 흔들리는 연약한 목소리가 바람에 묻혀 스러질 것처럼 희미했다. 곱디곱기는 여전하여 향긋한 말씨인 것까지도, 그 얼굴을 빼어 닮았다 여겼다. 잘라 들을 것.
 
그리고 오늘 새로웠던 것. 궤변하는 헨리 워튼에게로 정색하며 돌진하기 전, 그의 어깨를 톡 두드린 배질의 손길. 마치 잠시 기다려 도리안, 하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곧 돌아올게, 말하는 듯한 그 손길이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그를 방치하지 않는 느낌이라 그랬을까. 늘 배질이 떠나고 난 자리에 헨리 워튼이 스며들어 어그러지고 마는 그가 안타까웠는데 오늘은 그 뻥 뚫린 가슴이 조금이지만 메워진 느낌이었다.
 
3. 넌 누구
퇴색한 금-발의 찡긋. 그 아름답던 소년, '이-제' 어디로의 또 찡긋☆
 
그리고 숨소리. 격리에 성공해낸 그가 문을 쾅 걸어 잠근 직후 문고리에서 손을 떼기도 전에 흐른, 처음 듣는 숨소리. 하아ㅡ하고 나른하게 흘려보내었던 기존의 숨결이 아니었다. 그건 숨결이라기엔 짙고 그르렁거림이라기엔 얕은 묘한 소리였다. 밭은 호흡과 격정으로 치달았던 감정을 갈무리하듯 연거푸 흐른 그 소리에서는 언뜻 야성미마저 느껴졌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호흡이 그렇게 몇 차례 쌕쌕이며 흐르다, 점차 예의 '하아아-' 하는 나른한 숨결로 잦아들 즈음에는 완전하게 평소의 여유로움을 되찾은 그가 있었다. 계단 위 다락문 앞에서 번뜩이던 날카로운 눈과 강퍅한 호흡은 온데간데없이,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예의 자신을 되찾은 아름답고 여유로우며 눈부신 한 청년만이 남아있었다.
이 계단의 런웨이를 내려오는 그가, 소름 끼치게 좋았다.
 
4. 무엇이 기다릴까
계단 끝 난간. 22일만큼 개방적인 가운 사이로 드러난 오른 종아리가 살랑살랑, 중심 없이 흔들렸다. 어스름한 조명 아래 분방한 그 실루엣이 너무도 관능적이었다. 제어 없이 흐트러진 방종함이 발칙하게 아름다웠다.
 
표정에서도 악동미가 넘쳤다. 보여드릴 수가~ 없어요~ 생글생글 웃음 끝에 가시 박힌 독살스러움이 배질을 희롱했다. 장난스레 펼쳐진 두 팔과 흐늘대는 육신, 배질의 추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담배를 바꾸어 무는 손가락. 저승의 흙으로 빚어 하데스의 숨결을 불어넣은 아도니스가 꼭 이런 모습일까.
그 그림, 어딘가 달라 보이지 않아? 움찔. 덜미를 잡힌 비밀에 동요했지만 그것도 잠시. '뭔가를 보기는 했어요. 아주 기묘하던데(요)?' 태연하게 어미를 올려 맺은 대답이 그 말처럼 무척 기묘했다. 심지어 '요'의 어미를 살짝 물어 발음한 탓에 더욱 배질의 진지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조가 되어버렸어.
악동의 장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널 사랑했노라는 배질의 고백에는 미간을 모아 찡긋하더니, 고개를 기대었던 손가락으로 빙글, 허공을 한 차례 쓸었다. 마치 이 손가락 하나면 배질 쯤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하지만 순간, 순간. 그 눈동자에서 배어 나오는 진실도 있었다. '내 영혼의 비밀'에서 영혼을 끌어모으듯 들어 올린 두 손바닥으로 황망히 떨구어지는 시선이 그랬다. 일전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에서 두 팔을 내려다보며 그 사이로 새어나가는 자신의 젊음을 애타게 바라보던 그 눈처럼, 손안에 숨겨둔 영혼의 진실을 살피는 눈이었다.
 
찬란한 아름다움ㅡ타락한, 순결한ㅡ은 오랜만에 28일의 퇴폐와 12일의 격정의 어우러짐이었다. 낮고 음습한 목소리가 한없이 갈라지며 어그러진 아름다움을 빛냈다. 그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사랑했을 이에게 생채기 남기기 충분한 소리가 날갯짓을 타고 날아들었다. 아, 이 일그러졌음에도 아름다운 영혼을 어쩌면 좋아.
 
스킨십의 밀착도도 농밀하였는데 특히나 배질의 어깨를 탁, 짚은 손이 그 어깨를 회전축 삼아 몸을 돌려 바로 들이댄 것. 또 유혹의 대사에서 육성의 웃음을 머금었던 목소리와 함께 배질의 고개를 꺾어낸 손. 힘없이 옆으로 톡 밀린 배질의 고개는, 결국 그에게 함락당하고 마는 의지의 반영 같아 볼 때마다 묘하다.
 
그리고 A여서 그랬는지, 오늘 유독 그랬는지. 오른손 먼저 토독, 그다음 왼손으로 톡, 스르륵 차례로 가운을 여는 자태가 너무도 선연했다. 아름답게 비장한 눈과 살짝 비틀어 다물린 입술까지 전부 그림이었다.
 
(+) 무엇이 두려워서ㅡ는 변화한 이후 정석적 톤. 잘라서 들을 것.
 
5. 또 다른 나
이-십-년-전. 표정뿐 아니라 소리로도 이렇게 노골적인 웃음은 오랜만. 습격자의 신경을 건드리지는 않았을지, 그의 안위가 염려될 정도의 명확한 웃음 '소리'였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의 현장감.
 
6. Life of Joy
안개가 사물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거죠ㅡ헨리 워튼을 보는 그의 눈동자가 하얗게 빛났다. 있는 대로 부푼 흰자위가 못박힌 듯 헨리 워튼을 향하여 내리꽂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안개 너머 대체 무엇을 보는 걸까. 헨리 워튼이 사사한 궤변들? 그것들을 투시하며 자기 최면을 강화하는 그런 눈인 걸까.
 
도리안, 네 주위를 봐. 네 영혼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어! 최후의 호소. 두 손으로 그를 붙드는 배질을 돌아본 눈이 또 그렇게 빛을 냈다. 다만 이번에는 질색함을 숨기지 않았다. 지겹다는 듯, 신경질적인 눈이 날카로운 빛으로 배질을 표정으로도 상처 주었다.
 
소리적으로는 첫 life of joy의 파동. 더불어 그 직후 오랜만에 알맞게 아름다웠던 음량의 웃음소리. 이어지는 '순결했던 시간'의 물결치던 팔 동작과 음성.
 
7. 너를 보낸다 reprise
베/푼/거/예/요ㅡ직후. 그의 마이크가 꺼져 있음에도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명확하게 들렸다. 육성의 날것으로 다가온 그 작은, 그러나 또렷한 웃음이 오히려 마음을 더욱 때렸다.
 
어때, 아름답지 않아?
오랜만의 A. 곧 오랜만에, 계단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와 초상화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배질이 나란히 담기는 시야. 두 팔로 아득바득 눈을 가리려는 배질과 그런 배질을 보며 변하는 그의 얼굴이 차례로 심장을 타격했다. 자신이 들추어낸 진실 앞에서 경련하는 배질의 등을 보는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가, 절망으로 번졌다가, 매섭게 울분했다.
 
똑바로 봐! 똑바로 보라고!
마구잡이로 흔들어대는 팔만큼이나 마구잡이로 뱉어진 음성이었다. 오늘은 애원처럼 들렸다. 제발, 나를 외면하지 말아 달라는.
 
배질의 여전히 젊고! 여전히 아름다워ㅡ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를 한없이 궁지로 몰던 강한 배질 대신 함께 울음하는 배질 역시 돌아왔다. 두 눈이 이미 울고 있는 그와, 정말로 울음하는 배질. 하지만 결코 같은 곳을 향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울음이 안타까웠다.
 
8. 도리안 그레이
너무도 오랜만의 A. 그리고 새삼 깨달은 내 마음의 고향. A에서 바라보는 '모두가 사랑했던 도리안'의 서글픔을 무슨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사랑했던, 자신을 사랑했던 모든 것이 부유하는 눈앞의 허공으로 몸을 맡길 듯한 그 옆얼굴을 담는 감각을 어떻게 다 이를 수 있나.
한껏 벌려냈던 두 팔이 힘없이 꺾이고, 빛바랜 초상화로 지친 걸음을 이끌어오는 그는 또 어찌 형언할 수 있을까.
 
초상 앞에서 무너진 옆얼굴과 그것을 쓸어내리는 손, 해진 무릎으로 바닥을 쓰는 다리. 심지어 칼을 한 번에 제대로 쥐지도 못해 일순 휘청이며 고쳐잡는 찰나의 모습까지 전부 따끔했다. 10월 21일의 상실을 따랐기에 하염없이 침잠하는 노래까지, 전부.
 
아름다운 소년이
아스라이 뻗은 한 손에는 오늘은 힘이 없었다. 이따금 손가락을 움찔이며 눈앞의 것을 쓸어내리는 것 같던 동작도 오늘은 하지 못했다. 다만 간신히 뻗어낸 손이 허공에 가까스로 머무르며 닿기를 소망했다.
부른다
마지막에는 늘 아는 눈이다. 허황의 낙원이 제 손안에 머무르지 않음을, 그저 소망임을. 그래서 우는 눈이 늘 그 생의 마지막 얼굴이 된다.
 
 
(+)
Agianst Nature. 스모그가 또..
세상이 바뀐 시간. 오늘은 쿠션 대신 글로스터의 멱살을 잡고 뒤흔든 브랜든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