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웠다.”
노력했다, 최선을 다했다. 뮤지컬 데뷔 초를 돌아보며 종종 이렇게는 이야기해 주었을지언정 오늘과같이 내밀한 소회를 들은 적이 있던가. 15년 만에 듣게 된 ‘다시 돌아간다면 못 할 것 같다’의 내심은 ‘다시 돌아가라면 무섭다’였다.
도전과 시련 앞에서 오빠는, 후임 동생의 말대로 ‘강골’이기를 자처해 온 사람이고 그런 이가 굳이 꺼내지 않는 내면의 그늘을 미루어 짐작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밝고 긍정적인 면을 사랑하는 것을 우선에 두었던 우리의 관계상, 짐작만 해온 내심을 이정도 날 것의 표현으로 마주할 기회는 귀하디귀한 일. 그래서 간간이 찾아오는 이런 날이면 단단한 얼음 아래 흐르고 있던 여린 물줄기를 비로소 들여다본 듯하여 삽시간에 마음이 멎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당시의 오빠 홀로 감당했을 모든 마음이, 15년이 흘러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토양과 지지대로 삼아 서 있게 된 후에야 조곤조곤 풀어놓는 오늘의 오빠가, 지금 오빠로부터 저 말들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과 오빠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이 순간이ㅡ전부 한꺼번에 소화하기에는 무겁고 벅차서.
그런데 기묘했다. 이제야 듣는 그 시기의 진솔한 일면에 분명 마음 한구석이 따끔했는데, 다른 한 구석에서는 안도감이 움트고 있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대체로 점잖고 의젓한 오빠의 말씨가 높고 빨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표정이 청안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일까. 절친 토큐멘터리라는 표제에 걸맞은ㅡ동시에 오빠의 성격상 이례적인 수다 타임이 자꾸만 마음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화제가 에둘러 감이 없는 것은 신기할 정도였다. 서로 간의 탐색 절차가 없는 편안함 속에서 모든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처음 듣는 이야기도 있고 익히 아는 오빠의 사정도 있었다. 그러나 이심전심의 편안함 속에서 오빠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익숙한 것조차 새롭게 다가오게 했고, 그 모든 것들이 생경한 만큼, 딱 그만큼 좋았다.
배우로서의 수입만 받고 대표로서의 월급은 받지 않는다고 오빠가 말하자 옆에서 자기는 회사카드를 쓰는데 오빠는 개인카드를 쓴다며 거드는 손준호 씨나, 형이 거의 매일 밥 사준 거 기억 나요? 라며 홍보단 후임 동생이 물꼬를 튼 골든벨 일화. 내무반에서 동생이 힘들어 보이면 침대에 누워있다가 매번 윙크를 해주었다는 증언은 가히 오늘의 가장 큰 충격. 다른 선임들 모르게, 풀이 죽은 동생에게 안심을 주고자,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신호로 윙크를 해주었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아니 오빠, 매일 윙크를 해서 윙크 마왕으로 불릴 정도였는데 아직도 윙크를 제대로 할 줄 모른다는 건 일단 차지하고 밤하늘의 달을 보고 카나데의 가사를 떠올리던 그 시절에, 스스로의 자존감에 대해 어느 때보다 골몰했다던 그 시기에 또 다른 누군가를 다독여주고 있었던 거예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괜찮아, 그래봤자 2년이야”라는 단 세 마디 안에 함축된 시아준수가 너무나 장대하게 아름다웠다. 다정하고 섬세하지만, 그만큼 예민하고, 하지만 동시에 과감하고 대범한 사람. 절친들과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 하나하나에 내가 사랑하는 오빠의 삶의 태도가 있었고, 긴긴 시간 동안 오빠를 있게 한 마음가짐이 있었다.
그 모든 오빠의 조각들이 어여쁘고 귀하여 마음이 더할 수 없이 차오르는 찰나에 듣게 된 것이다. ‘힘들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그리고 오빠가 그 말을 꺼내 놓는 그 순간에 언급된 장본인이 오빠 곁에서 오빠를 향하여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먼저 안도가 차오르고 연이어 기쁨이 찾아왔다. 라디오스타가 방송으로서 오빠에게 갖는 의미를 깊이 공감하고 본인의 일처럼 축하해줄 수 있는 동료, 대표로서 앓는 소리를 할 법도 한데 그저 괜찮다는 오빠를 염려하고 헤아려 돕고자 하는 동료, 오빠를 귀히 여기는 마음 표현하기를 아끼지 않으며 나아가 행동으로도 보여주는 동료가 오빠 곁에 있었다.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다. 아, 마음이 부드럽게 채워지다 못해 이내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따듯해졌다.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일만큼은 누구보다 분연히 해내는 이 사람의 곁에 팬들 이외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눈높이를 맞추어 걸으며 마음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기를 얼마나 바라왔던가. 심장 깊숙한 곳에서 긴 시간 잠들어 있던 매듭 하나가 탁하고 풀려나간 것만 같았다.
새삼 홀로서기 후 얼마나 많은 것들이 꿈결과도 같아졌는지. 오빠가 뜻하고자 하는 바를 곧대로 받아 행하며 오빠와 팬들 양쪽을 살뜰하게 챙기고자 하는 오빠 둥지 안의 사람들, 오빠를 사랑하여 그와 한솥밥 먹기를 자처한 오빠의 친구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편안한 얼굴로 웃는 오늘의 오빠.
23년 차, 긴 시간 오빠가 달려와 안착한 낙원이 바로 여기, 우리의 오늘인 것이었다.
아그라바의 계절 한중간에 이렇게 따로 챙겨준 방송 자체가 이미 선물인데 열어보니 선물 안에 선물이 포개어져 있는 시아준수식 사랑을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적당히 하는 걸 잘 모르겠다고 오빠가 그랬죠.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저도 그래요. 정말이지 김준수를 적당히 사랑하는 법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