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을 하는 것은 즐기며 노는 것이기도 했다. 볼프강은 <네 손을 위한 클라브생 소나타>(K.19d)를 작곡했고, 누나인 난네를과 함께 그 곡을 연주했다. 악보는 두 연주자의 묘기가 잘 드러나도록 만들어졌는데, 특히 저음부를 담당하는 난넬의 왼손이 건반의 고음부를 맡은 동생의 오른손 위로 교차해 들어갈 때가 압권이었다. 78p
몸이 완쾌되진 않았지만 소년은 관악기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면서 G단조로 이루어지는 느린 악장의 밝고도 진지한 교향곡(K.22)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82p
최근의 작품들(K.24,25, K.26~K.30)은 얼마 전 죽음의 근처까지 갔다가 이제 삶의 품으로 돌아온 개구쟁이 소년의 풍모를 완연히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었다. 86p
이듬해 1월, 열한 살의 어린 창조자는 그간의 여행 중 터득한 모든 것을 종합해낸 4악장짜리 교향곡(K.76)을 작곡했다. 그즈음부터 볼프강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이탈리아 풍 음악에서 한 걸음 벗어나, 당대 비평계에서 인정받은 유명 작곡가들, 예컨대 에베를린, 푹스, 하세 등에 귀 기울이며 독일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다. 94p
굳어버린 언어를 취해 생명을 불어넣는 그 능력만큼은 어디 내놔도 빼어나달 수밖에 없었다. 기쁨에, J.P.우츠, K.53
피르미안 백작의 궁정에서 열린 고별 음악회에서, 메타스지오의 극본에 붙인 볼프강의 성악곡 몇 곡(K.77~K.79, K.88)이 공연되었다. 처음보다 확연히 발전된 음악가의 모습이 레오폴트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이제 아들은 특별한 악기인 사람의 육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차츰 깨달아가고 있었다.
1770년 3월 12일, 밀라노
155p
저녁식사를 끝낸 뒤, 그는 방에 처박혀 종이 위에 기이한 음표들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 아들을 깨우러 방에 들어간 레오폴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악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제야 소년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말했다.
"현악 4중주(K.80)예요."
"별난 장르다, 별로 실속 없어…… 어쨌든 음악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분야다!
"그 생각은 못 하고 있었어요."
"그래……? 그럼 대체 무슨 생각을 한거냐?"
"모든 제한을 떠나 저 자신을 위해 작곡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냥 음악을 만들겠다는 생각 말예요. 그 첫번째 4중주곡은 그저 시험삼아 만들어본 거예요. 앞으로는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서 준비나 하거라. 한 시간 후에 출발이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이러한 일탈행위를 그저 그런 변덕 정도로 치부했다. 자고로 직업 음악가라면 당연히 청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의무 아니겠는가!
1770년 3월 15일, 로디
157~158p
'음악의 기사'라는 칭송까지 들을 만큼 유명해진 볼프강은 그해 겨울을 뿌듯한 기분으로 지낼 수 있었다. 오페라를 무려 스무 차례나 공연했고, 폰 피르미안 백작 저택에서 한 차례 음악회를 열었으며, 투렌에서 며칠간 느긋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또한 그리 무겁지 않은 교향곡(K.74)도 하나 썼는데, 그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모두 여섯 작품을 다 끝내는 순간 볼프강의 입에서는 감탄의 말이 새어나왔다.
177p
그 무렵 볼프강은 이상한 선물을 하나 받았다. <의연한 평정> <비밀 사랑> 그리고 <빈자들의 행복>이라는 제목이 달린 시 세 편이었다. 그는 이 역시 신비스런 보호자로부터 날아든 전언이라 생각하면서 곧장 거기에 곡(K.149~151)을 붙였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각박한 마음을 돌아보아 평정심을 회복하며, 원한도 시기도 품지 말고, 상황이 어떠하든 언제나 너그럽고 의연할 것. 이러한 삶의 준칙 속에는 젊은이로서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할 자기로부터의 해방과 초연한 태도가 담겨 있었다.
210p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할 때부터 볼프강은 잔뜩 침울한 얼굴을 한 채, 다른 세상에서 파견된 사람의 충고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현악 4중주 D장조>(K.155)의 작곡에 들어가, 볼차노에 잠시 기착한 10월 28일에 깔끔히 완성해냈다.
그걸 보고 레오폴트는 괜히 구시렁거렸다.
"또 4중주곡이냐? 아무튼 그런 게 밀라노 사람들 구미에 맞기를 기대해보자꾸나."
212p
그런 사정 속에서 볼프강은 E단조의 비통한 아다지오 현악 4중주 한 곡을 작곡했다. 그것은 사색에 깊이 잠기거나 마음이 침잠되어 있을 때 특별히 그가 선호하는 형식이었다.
215p
그런 와중에, 카스트라토인 라우치니를 염두에 두고 쓴 모테토 <엑술타테, 유빌라테>(K.165)는 모든 청중을 천사들이 노니는 천상의 희열이 가득한 분위기로 단숨에 끌어올렸다. 이로써 레오폴트의 지난 모든 근심이 깨끗이 사라졌고 다시 젊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정녕 아들에겐 영혼을 달래는 재능이라도 있는 것일까?
217p
그렇게 쓰게 된 작품(K.184)에서는 어둡고 격렬하면서 비장한 울림을 갖는 노래 하나가 아주 참신한 교향곡으로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악절이 거듭되면서 긴장은 서서히 늦춰지지만, 처음의 강력한 도약은 매우 심원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그것은 궁정이나 잘츠부르크의 교향 넘치는 사교계를 위한 여타 소나타와 교향곡들, 디베르티멘토의 우아한 이탈리아 취향과는 확연히 다른 무엇이었다.
1773년 3월 말, 잘츠부르크
221p
하지만 무엇보다도 특별한 작품은 그즈음 최초로 등장한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 제5번>(K.175)였다! 이는 당시 유행이던 소품들을 모방한 것이 전혀 아니라, 완전히 독창적이고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마음을 끌어당기면서 알레그로로 시작되는 도입부와 시정이 절절한 느린 악장 그리고 네 가지 주제가 레오폴트를 불안하게 할 만큼 복잡하게 진행되는 종지부…… 기법상의 지나친 난이도와 음악적으로 대범한 시도가 자칫 그동안 쌓아온 볼프강의 명성에 누를 끼칠지도 모를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 콘체르토는 주문작이 아니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썼다는 얘긴데…… 그럼 하인 음악가로서의 자기 본분을 망각했다는 말인가?
1773년 12월, 잘츠부르크
249p
볼프강은 점심을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는 새로운 교향곡(N 25, K.183)을 하나 작곡하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전체가 단조로 이루어진 곡이었다. 역시 처음 사용되는 용어인 '알레그로 콘 브리오(allegro con brio)'로 묘사된 첫 악장은 당시 그를 지배하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251p
볼프강 모차르트의 <C장조 대미사곡>(K.262)은 청중들 그 누구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뛰어났다. 통상적인 종교적 테두리에서 다소 벗어난 듯한 이 곡은 기도나 명상을 북돋우는 분위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젊은이는 기어코 콜로레도의 요구에 굽히지 않고 <미사 롱가>, 즉 '장(長) 미사'를 작곡해낸 것이다. 결국 그 작품은 너무 길어서 대성당에 헌정할 수는 없었다. 대신 성 베드로 성당이 신자들의 보다 큰 기쁨을 위해 작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300p
11월에는 특별히 크레도가 강조된 <Cc장조 미사곡>(K.257)이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연주되었다. 대주교가 억지로 부과한 사십오 분이라는 제한 시간을 곧이곧대로 지키면서도 그 작품은 진정한 열정을 담고 있었다. 기독교도의 신께서 드디어 젊은이에게 정신적 안정을 선사해주신 것일까? 자기 자신과 예술, 자신의 장래에 관해 그동안 던져온 숱한 질문들에 결국은 응답하신 것일까?
319p
난데없는 전망이 젊은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는 무프티가 주최하는 공식 만찬의 여흥거리로 작곡한 <B플랫 장조 디베르티멘토>(K.270)의 마지막 주제 속에 단아하면서도 심오한 또다른 테마*를 슬그머니 끼워넣었다. 적어도 작곡할 당시, 생각지도 않은 어떤 풍경을 젊은이에게 지평선처럼 활짝 펼쳐주는 테마였을 것이다. 그런 다음, 또다른 작품 하나를 서둘러 끝냈는데, 같은 성격의 여섯 작품 중 마지막인 디베르티멘토(N 16, K.289)는 주목적이 대주교의 소화를 돕기 위한 것으로, 그저 관례적으로 성급히 처리된 작품이었다.
332p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부인과 하녀 수잔나가 함께 부르는 이중창 <산들바람이 부는 저녁에>의 전조라 할 수 있는 주제이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준비한 곡(K.272)*이 하나 있는데, 불러봐주시겠습니까?"
"저를 위해서요?"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요. 치냐잔티 시인의 작품을 토대로 이야기 하나를 만들었어요."
344p
*<아, 난 알아차렸네!>
사실 볼프강은 누굴 가르치는 게 질색이었다. 고만고만한 재능의 호사가들 교습을 해주다보면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아무튼 뭔가 고무적인 이번 접촉으로 기분이 흐뭇해진 볼프강은 슈타인의 피아노포르테 덕분에 한층 향상된 연주 기법을 적용하여 피아노 소나타 한 곡(K.309)과 예수회 신부가 들으면 기겁할 프랑스 풍의 우아하고 가벼운 아리에트 한 곡(K.307)*을 내리써냈다.
376p
*<너희 새들은 늘 그렇듯이>
볼프강은 슬픔에만 파묻혀 있기를 거부하고, 불같이 타오르는 창작열을 발휘함으로써 잠시만이라도 눈앞에 닥친 출발을 잊기로 했다. 쾌할하고 통속적인 선율의 대구로 가득한 <피아노와 바이로린을 위한 소나타> 네곡(K.301,302,303,305), 노년에 이른 테너 라프의 친화력 있는 목소리를 염두에 둔 이리아 한 곡(K.295), 소프라노 아우구스타 벤들링이 부르게 될 <어둡고 외딴 숲 속>, 어느 젊은이의 행동을 비난하는 또다른 아리아 한 곡(K.308),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수 알로이지아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듯한 가사의 레치타티보를 포함한 또다른 아리아 한 곡(K.294)…… 볼프강은 알로이지아에게 장담했다.
"이 작품으로 당신은 이탈리아에서 성공을 거둘 겁니다."
402p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E단조 소나타>는 슬픈 분위기와 거의 귀에 거슬릴 정도의 음색으로 볼프강의 당시 좌절감을 표현해내고 있었다.
1778년 5월 13일, 파리
423p
그동안 볼프강은 <피아노를 위한 A단조 소나타>(K.310)*를 작곡하고 있었다. 그 곡은 결코 좌절하지 않으려는 반항심, 답답한 상황 앞에서 느껴지는 우울한 순간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전진하려는 의지를 고스란히 표현해내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이런 심정을 담고 있었다.
'저는 종종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날이 더운지, 추운지…… 그 무엇에도 진정한 기쁨을 못 느끼겠어요.'
1778년 6월 5일, 파리
426p
*어떤 음악학자들은 이 곡이 어머니의 죽음 이후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작품, 마치 미소짓는 듯한 <C장조 소나타>에서는 최근 겪은 비극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다음 연달아 만든 A장조의 다른 소나타(K.331)는 초기 도입부가 뜻밖의 느린 템포로 진행되는데, 볼프강은 그처럼 의외일 정도로의 자융롭고 평화로운 행복감을 통해 어머니를 회상했고 활기차면서도 부드러운 이 작품들을 어머니에게 바치고 있었다. 안나 마리아는 그 음악들과 마찬가지로 평생 가족에게 유쾌함과 조화로움을 베풀다가, 집에서 멀리 떠난 뒤에야 비로소 슬픔이라는 걸 경험한 여인이었다.
438p
볼프강이 가르치는 학생들은 <아, 어머니께 말씀드리죠>(K.265)나 <아름다운 프랑스 여인>(K.353) 같은 유행가 곡조를 바탕으로 한 피아노 변주곡을 칭송했지만, 그는 자신의 창조적 활력과 의문들, 찬란한 빛과 어둔 갈등의 반복 현상을 <F장조 소나타>(K.332)에 모두 쏟아부었다. 그러면서, 베일에 가려진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무작정 건너온 혼돈의 삶, 그 온갖 곡절을 작품 속에 새겨넣었다.
44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