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공을 보고서도 느꼈지만 애드립의 여지가 많지 않은게 조금 아쉬웠는데, 예기치 못하는 부분에서 내뱉어지는 토드의 숨소리가 그 허전함을 메워주는 것을 느꼈다. 나지막한 한숨 같기도 하고 나른한 신음 같기도 한 숨소리를 어떻게, 어느 상황에서 내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숨소리가 느껴지도록 내쉬는 부분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15일에서는 마지막 춤에서의 숨소리가 두드러졌는데 오늘은 전반적으로 숨소리를 섞어가며 노래하고 연기했다. 마지막 춤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하아- 소리를 내쉴 때는 한없이 나른하고 섹시했는데, 전염병 넘버에서 대놓고 숨결을 마쉬고 내쉴 때는 사악하고 개구지면서도 섹시했고. 또 오늘 특히 마이얼링 왈츠에서 루돌프가 죽은 후 총을 집어들고 빵 할 때 앞뒤로 내뱉었던 한숨은!!!!!!!!!! 옅은 숨소리 한 번, 길고 나른한 숨소리 한 번, 빵! 하고 나서 음미할 때 살포시 입꼬리를 올리면서 소리죽인 숨소리 한 번 이렇게.. 아 최고야. 숨소리로도 연기하는 시아준수였다. 샤토드가 한숨을 내쉴 때마다 내 속에서 막 불길이 막 치솟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해야할까.

그 이외에 장면 장면 기억으로 남은 것을 적어두자면,

<그림자는 길어지고>

오늘 공연에서 제일 좋았다. 항상 좋았지만 오늘이 특히 좋았고, 동시에 회를 거듭할수록 이 넘버만큼은 매번 정점을 찍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노래의 강약조절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짜릿하고, 시아준수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도 무척이나 즐겁다. 크게 기억에 남은 것은 두 가지. 토드가 뒤로 걸음질하면서 손으로는 루돌프를 끌어당기기 시작하면 루돌프가 홀린 듯이 끌려오는 부분과 루돌프를 한 차례 꼬드기고(?) 나서 가뿐한 몸짓으로 계단에 오를 때의 몸짓이다. 두 팔을 벌리고 뒷걸음질을 쳤는데 날갯짓하듯 사뿐사뿐했던 움직임이 좋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두 팔을 날개처럼 펼치고 계단을 오르는 동작은 계속해주었으면, 짧은 동안에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로.

정말이지 곡 자체로도, 시아준수 때문에도 음미할 거리가 많은 넘버다. 애초에 이 넘버가 토드의 사악한 면모와 절대적인 배후의 존재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주는 장면인데, 이렇게 멋있고 사악하라고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능수능란하게 연기하고 노래하는 시아준수를 보는 즐거움이 크다. 계속해서 보고 싶고 계속해서 생각나고. 이 넘버의 악개가 될 것 같다.

아, 또 한가지. 시작 부분에서 죽음이 등장하는 순간의 환상적인 분위기가 좋다. 샤토드 위로 드리워진 극적인 명암과 함께, 그의 뒤에서 일렁이는 초현실적인 물결이 주는 비현실감이란. 그 시각적인 효과에 첫공 때부터 가슴에 둔탁한 충격을 느꼈는데, 여전히 볼 때마다 멋있다.

<프롤로그>에서 "이것은 사랑"하며 음을 길게 늘어뜨리는 부분이 좋았다. 프롤로그에서의 토드는 갈수록 무념하고 권태로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엘리~자벳"을 부르는 순간 깊이 잠겨있던 그의 눈동자가 생기로 반짝이기 시작한다.

<마지막 춤>에서는 "공기는 습하고 탁해" 하는 부분에서 얼굴 앞에 왼손을 가져다대고 손가락을 촤르륵 펼쳐 보였는데 그 순간만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을 정도로 임팩트가 굉장했다.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는 마지막에 중심을 살짝 잘못 잡은 건지, 상체가 뒤로 밀리고 한쪽 다리가 허공으로 붕 뜨면서 약간 버둥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곧 중심을 잡고 멋진 안무로 이어지긴 했지만 귀여웠다. 어떤 상황이 와도 몰입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모습이 프로다웠던 것은 물론.

그리고 엔딩에서 리프트 위에서 두 팔을 활짝 앞으로 내밀어서 엘리자벳을 맞이했던 것의 여운이 길게 남았다. 뻗은 두 팔에서 토드의 간절함이 느껴졌기 때문인가. 그 때의 숨소리와 눈빛에서도 뭐랄까, 이제 드디어 "마침내"의 순간이 온거야 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찡했는데.. 서로 마주 보게 된 두 사람의 손이 노래를 하면서 몇 차례 부딪히는가 싶더니 손을 꼭 잡고 노래를 하는게 아닌가. 손을 원래 잡았었나? 키스신보다도 한 번 잡고 절대 놓지 않는 다정한 손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두 사람이 가까운 거리에서 손을 꼭 잡고 노래를 하다 보니까, 이전처럼 몸을 뒤로 뺐다가 달려드는 것처럼 키스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여전히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춘다는 느낌은 강했다.

이렇게 다섯 번째 공연까지 끝났다. 기복 없이 오늘도 멋진 공연을 보여준 시아준수에게 고맙고 수고했다고 전하고 싶다. 막이 올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연출 상의 수정이 조금씩 있고, 그로 인해 토드에게서도 약간의 변화(정말 아주 자잘한 변화들. 종을 서서 치는 것이나, 루돌프의 장례식에서 이제는 선 채로 등장하는 것 정도)가 있기는 했지만 곧 완전해질 시아준수만의 토드가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첫공부터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었던 토드가 정립을 마친 연출과 극 속으로 완전하게 녹아드는 순간이 너무 기대된다.

댓글 '2'

유므

12.02.21

침몰하는 배 위에서의 마지막 모습도 머리 속에 자꾸 맴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을 망가트리고 나서, 문장을 향해 차갑게 뻗었던 손과 한 쪽만 살짝 들어올린 다리가 무대가 완전히 퇴색하는 순간까지 조각상처럼 멈춰 있었던 그 모습. 그 모습이 어둠에 잠기면서 그림자처럼 실루엣만 비추어졌던 순간. 아름다웠다.

유므

12.02.21

(+) 시아준수 이외의 이야기

밤공의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 이른바 침대씬에서는 옥주현 엘리자벳의 연기가 인상 깊었다. 여전히 섹시하고 나른하며 치명적인 토드에게 손가락을 마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다가섰다가(이전의 공연들에서는 그저 손을 앞으로 뻗으며 다가서는 시늉을 하는 정도였다), 괴로운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제끼는 표현이 대단히 극적이었다. 과장된 몸짓이 다소 연극적인 것으로 느껴질 여지도 있었지만 침대씬에서 죽음의 유혹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것인데, 엘리자벳의 몸부림치는 갈등이 첨가되니 훨씬 더 그 상황의 극적 긴장감이 높아지는 효과를 주었다. 그렇게 한 바탕 완전히 거부를 하고 나니 침대에서 내려와 엘리자벳에게 다가서려다가 마는 토드의 언짢음? 이래도 안 넘어와? 허탈함? 같은 감정들도 진하게 닿아왔음은 물론.

이외에도 전반적으로 그녀의 캐릭터 해석에 점점 살이 붙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장면들이 많았다. <전염병>에서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에 상관없이 마구 포효하던 엘리자벳(듣기 좋고 나쁨, 예쁘고 예쁘지 않았음을 떠나 바닥으로 무너지는 절규가 남편의 배신에 의해 영혼이 꺼지는 엘리자벳에 어울렸다)이나 <황후는 빛나야 해>에서 자잘한 대사가 추가되었던 것, 루돌프의 장례식에서 황제의 가슴을 부여잡고 마구 내리치는 것 등. 크고 작은 리액션에서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소 평면적이었던 이전에 비하여 엘리자벳이 나이를 먹고, 배신을 당하고, 자유를 갈망하며 겪는 시련들에 의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이외에, 개인적으로 힘겨웠던 오늘의 캐스트를 보고 나니 루케니와 대공비 역할의 중요성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인 엘리자벳보다도 루케니에 따라 극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는 것을 김수용 루케니까지 보고 나니 확실히 알았고, 비중은 그리 크지 않지만 대공비가 담당하고 있던 무게중심의 한 축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