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잘한 실수가 더러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합이 잘 맞았던 공연이었다. 첫날을 제외하면 여태까지 중에선 제일 뮤지컬답게 풍성했던 느낌. 보면서 오늘 캐스트(민영기, 이정화 배우님)가 가장 나의 취향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는데, 그래서 그런지 다른 날보다 극에 몰입하기도 훨씬 수월했다. 민배우님은 물론이고 이정화 배우님의 조피.. 정말 좋다.

김선영 엘리자벳도 다른 날보다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일요일 낮공보다는 평일 저녁 공연 때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 듯했다. 옥주현 엘리자벳이 왈가닥 같다면, 그래서 속박당한 삶을 견디지 못해 온몸으로 몸부림을 치는 느낌이라면 김선영 엘리자벳은 숨조차 겨우 연명하는 어린 새가 파르르 날갯짓하며 자유를 갈망하는 느낌이다. 자유를 떠먹여 주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톡 부러질 것 같은 여리여리함이랄까.

그리고 오늘의 토드는 비쥬얼 올킬! 머리가 정말 예뻤다. 가르마가 바뀐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고 빗질을 여러 층으로 나눠서 머리칼을 섬세하게 세팅했다. 그래서 부쩍 단정한 느낌도 들고, 왕자님 같기도 하고 무척 예뻤다. 구레나룻도 곱게 내려서 청순하기까지. 그런데 그 얼굴로 연기는 점점 악랄해지고 있으니.. 예쁘고 섹시하고 사악한 3종 세트를 보고 싶다면 샤토드를 봐야만 한다.

마지막 춤은 오늘따라 굉장히 과격했다. 시작은 나른했는데, 어느 순간 돌변해서 말 그대로 저돌적인 공세를 펼쳐 보이는 게 아닌가. 엘리자벳을 사람을 대하는 건지, 인형을 다루는 건지 모르겠는 손길이 완~전~히 무자비해서 놀랬다. 옥주현 엘리자벳과도 비슷하게 거칠지만 체격 차이가 크지 않은 탓에 약간 다루기 버거워하는 느낌을 받았다면 김선영 엘리자벳은 정말 샤토드의 손길에 따라 몸이 마구마구 꺾이고 흔들리다 보니 더 과격하단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몸을 쓰다듬거나 얼굴을 들이밀 때도 정도껏(?)이라는 느낌이 없이 활활 타올라 다가서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시아준수가 저만큼이나 몰입하고 있구나 싶어져서 신기하고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시아준수는 멋있는 사람이야.. 춤추고 발을 구르고 하는 시아준수를 멍하니 보다 보면 어느새 노래가 끝나 있다. 리프트 위로 사뿐하게 발을 내디디며 등장하는 것을 분명 보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몰아치더니 휘리릭 지나가 버린 폭풍처럼 순식간에 끝이 나버렸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충격으로 몰아쳤던 것이 있으니 그건 역시 그림자는 길어지고. 정말 좋다. 오늘도 역시 제일 좋았다. 이 넘버의 잘 짜여진 하모니가, 죽음의 꼬드김이 강도를 높여감에 따라 서서히 맞물리며 하나의 포르티시모로 나아가는 것으로도 충분히 짜릿한데, 중간중간 시아준수가 버럭하면서 불협화음 같은 쇳소리를 넣으면.. 아아.. 으으... 멋있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목이 많이 쉬었는데 그럼에도 능란하게 음을 넘나들며 무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림자는 길어지고야말로 토드의 예쁘고 섹시하고 사악한 3종 세트의 진면목을 다 볼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넘버임을 확신한다.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는 계속 입을 요만큼씩 벌리면서 당장에라도 쇳소리를 낼 것 같이 웃음 짓고 있었는데, 그때 혀의 움직임! 입 밖으로 나온 건 아니고 안에서 날름거리면서 마구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토드의 광기를 느꼈던 순간이 이것 이외에도 전염병 넘버에서 성병입니다~ 할 때 아주 잠깐 턱을 치켜드는데, 그때 눈동자가 뒤집힐 듯 동그래지면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게 진짜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또 오늘은 캄염되셨습니다가 아니라 무척이나 또박또박하게 감염되셨습니다 라고 발음해서.. 귀여웠다 후후.. 쓰다 보니 자꾸 생각이 나는데, 이 넘버에서 진맥을 볼 때 이전에는 두 손이 엘리자벳의 어깨를 타고 내려와 손목을 감싸 쥐었다면 오늘은 한 손은 처음부터 엘리자벳의 손을 잡고 한 손만 어깨를 타고 내려와 손목에 닿았다가 다시 어깨로 거슬러 올라갔다. 심지어 엘리자벳의 향기를 맡을 때도 손을 계속해서 꼬옥 잡고 있었다 으잉.

그리고 리프트는 정말 좋은 무대장치인 것 같다. 지상(무대 위)의 샤토드도 멋지고 섹시하지만, 리프트 위에서의 움직임은 정말이지 보관해놓고 싶을 정도로 사람을 홀린다. 다리를 옆으로 꼬아 걷는 동작이나 난간을 매만지는 섬세한 손끝, 또 상체를 난간 위로 한껏 구부러뜨리고 동물처럼 어깨를 곧추세울 때 등등.. 어슬렁거린다는 느낌의 걸음걸이나, 난간에 매달리는 동작도 점점 더 고양이과의 동물처럼 진득해지고 있다. 첫공에서는 처음이라 긴장했던 건지, 살랑살랑 어슬렁거리는 느낌으로 걷거나 행동해도 어느 정도 절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느낌이 꼭 연체동물 같기도 하고 물결이나 아지랑이 같기도 하고 그렇다. 시아준수의 전신이 그렇게 움직이는데, 2막에서는 하반신의 움직임이 유독 두드러지는 탓에 마이얼링 왈츠부터는 거의 시아준수의 하반신의 움직임만 보였을 정도.

카페신에서는 등장하다가 신문이 펄렁이는 바람에 그만 얼굴이 보였다. 이후로도 계속 오늘따라 신문이 펄렁댔는데ㅋㅋ 이런 변수 좋다. 소소한 즐거움. 마지막에는 루케니를 보면서 제대로 실소를 짓다가, 기지개를 켜듯 (마치 오늘의 할 일은 이 정도면 됐어 하는 개운한 느낌으로) 천천히 고개를 한 바퀴 빙~ 돌렸는데 어둠이 완전히 내릴 때까지 연기를 하는 프로다움! 그런데 카페신에서 루케니가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토드를 발견하고 어? 이 양반이 여기도 와있네? 하는 듯이 건들거리면서 피식 웃었던가?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언뜻 그런 느낌만 받았는데 아무래도 다음에 제대로 다시 봐야겠다.

연출상 변했다고 생각했던 부분(결혼식 장면에서 종 치는 것, 루돌프의 장례식에서 등장할 때의 자세)은 완전히 변화를 준 건 아니고 그때그때 그날의 컨디션이나 상황에 맞춰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첫공과 같이 무대 천장에 매달려서 종을 쳤는데 3층에서는 아쉽게도 시아준수의 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키스신도 두 번 모두 오늘이 제일 강했다. 매~우 길었다는 것 이외에도 음...ㅎㅎㅎㅎㅎ

사족으로 엘리자벳과 프란츠가 바트 이슐에서 처음 만났을 때, 헬레네 말고 엘리자벳을 선택한 프란츠 때문에 모두가 벙쪄하고 있을 때 엘리자벳이 "걱정했었어, 지루할까봐(?) 재미없을까봐(?)" 이렇게 노래하는걸 오늘에서야 봤는데 좀 충격적이었다. 옆에서 언니 헬레네는 10년이 넘게 불어연습에 예법을 익혔어~ 하고 슬퍼하는데 헉. 자기 재미가 문제인가.. 싶어서.. 어쩐지 얄밉게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황후가 되어서 행복해졌으면 또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었으니. 루케니의 "황후는 역겨운 이기주의자"라는 가사도 떠오르고, 주인공이긴 하지만 엘리자벳은 역시 좀처럼 몰입이 되지 않는 캐릭터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