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표현으로 서두를 시작해야 22일의 공연을 가장 날 것에 가깝게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22일의 공연은 재밌었고, 레어템답게 희귀한 공연이었고,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가도 어떤 때는 꼭 본 공연을 각색한 번외편이나 갈라쇼 같기도 했다.
 
우선은 깐토드. 눈썹은 다시 연해졌다. 끝까지 그리지 않아서 중간에서 똑 끊어진 느낌으로. 밤공은 낮공보다는 눈썹을 끝까지 길게 빼서 그렸지만 여전히 그리다만 느낌이었다. 올린 머리는 앞머리가 점점 길어지는 관계로 끝이 둥글게 말려서 완전히 C자 모양이 되었다. 뒷머리는 짧게 쳐버린 탓에 뾰족뾰족 솟아올라서 깐토드에게 잘 어울렸고. 프롤로그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날의 시아준수의 모습을 관찰하다보면 새삼 죽음으로 분한 이래 분장이 같았던 날이 하루도 없음을 느끼게 된다. 시아준수가 세심한 건지, 분장팀이 세심한 건지. 덕분에 매공연의 첫 순간을 기대하게 되는 생각지도 못한 설렘이 있다.
 
엘리자벳과의 첫 만남에서 정수리로 쏟아지는 초록 조명과 얼굴로 비추어지는 보랏빛 조명. 커튼콜에서도 그렇지만, 극 중의 조명은 항상 섬세해서 때때로 그림 같을 때가 있다. 22일 첫 만남의 순간 엘리자벳을 보는 죽음의 모습이 그랬다.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그 순간의 이미지. 그리고 프롤로그에서 이제는 항상 빼꼼히 내미는 혀.
 
본격적으로 생소한 느낌이 들었던 순간은 낮공의 <마지막 춤>에서 브릿지에서 내려올 때부터. 걸음걸이와 멈춰서는 동작에서 어딘지 모르게 이전과는 다른 느낌,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 보는 디테일이 많아서 새로운 마지막 춤이었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부분은 환상에서 깨어날 거야를 부를 때 '환상'에서 손을 굴려 뻗는 웨이브가 있었던 것과 죽음의 천사들을 엘리자벳에게로 보내기 전 그루브를 타며 손짓할 때 엄청나게 격해졌던 꺾기 ㅋㅋ 완전 격하게 각을 세워서! 능청능청한 부드러움과 거친 느낌이 공존하는 굉장히 미묘한 마지막 춤이었다. 여기에 브릿지 위에서 함께에에에~로 마무리하면서는 또 고개를 흥에 취해 흔들흔들.

이것이 낮공만의 디테일인지, 아니면 변화를 위해 새로 추가된 디테일인지 궁금했는데 밤공을 보니 어느 정도 후자이기는 하나, 낮공에서의 생소함은 아무래도 그 순간 시아준수의 즉흥적인 감흥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밤공에서는 '환상에서 깨어날 거야'에서 웨이브 대신 손을 연기처럼 뭉게뭉게 흔들어 보였고, 마지막 절정의 브릿지 위에서는 '우리 둘이서' 사이에 잠깐 숨을 고르는 타이밍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엘리자벳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밤공에서 나는 보았지. 생눈으로.. 또렷하게 그것을... 생눈으로....
 
아아, 참 낮공에서는 마지막에 암전이 되었다가 다시 희미한 스팟이 비추어져서 어둠 속 샤토드의 여운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는데 밤공에서는 다시 칼같이 암전해버렸다. 에잇 그런 건 상황에 따라 조금 유하게 달리해도 될 텐데.
 
밤공에서의 1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는 유난히 정성 들여 부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좋았다. 수를 놓듯, 어루어 만지듯. 꼭 촉감이 느껴지도록 촉촉하면서도 심장을 간질이는 것처럼 숨이 막히게. 한음 한음 심혈을 기울여 온몸의 세포와 온 얼굴의 근육으로 노래를 하는 그런 순간. 시아준수의 영혼의 한 조각이 노래로 승화되는 것 같은 느낌의 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런 순간.
 
낮공의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는 처음으로 가사 실수가 나왔다. 순간적으로 엄청 당황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요상한 가사를 만들어 부르는 모습에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 초반의 가사 실수로 혹시 이후의 감정선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역시 그런 걱정 따윈 필요 없었고.
 
밤공에서는 엘리자벳과 원을 돌면서 대치할 때 얼굴이 객석을 향한 타이밍에서 눈썹이 일자가 되며 웃은 순간이 있었다. 사악하지만 무척 젠틀한 느낌이라 설렜다.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에서도 새로운 디테일이 많았다. 원래 '우리 다시 만날 거란 그 약속'에서 '약속'을 부르는 동시에 계단 난간에 엎드리듯 달라붙곤 했는데, 낮공에서는 몸을 꼿꼿하게 편 채로 오른손만을 내밀어 뻗었다. 이어지는 '내가 여기 왔어'에서는 항상 해오던 대로 왼손을 바깥 방향으로 신사답게 뻗어냈는데,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간 그 일련의 동작들이 물결을 가르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이어졌던 탓에 너무 너무 너무 잘 어울렸다. 간단하게 손을 뻗는 동작마저도 안무로 승화시키는 몸놀림.
 
그렇게 멋들어지게 서두를 시작해놓고는 쫑쫑쫑 빠르게 계단을 내려올 때는 꼭 병아리가 종종거리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계단을 올라갈 때도 날래게 다리를 쓰는데, 이전의 공연들에서 주로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사뿐한, 공기같은 움직임을 보여줬다면 낮공에서는 날랜 동물의 민첩한 움직임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그리고!!! 계단에 위에서 '무너지는 이 세상을'을 하기 직전에 난간 위로 상체를 기대고 있다가 웨이브를 타며 몸을 일으켜 냈는데, 헉 시아준수와 웨이브의 조합은 정말이지 좋다. 밤공에서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의도한 디테일이기보다는 본능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던 것 같다.
 
밤공의 <죽음의 춤>, 마이얼링 왈츠에서는 어두운 조명 아래서 실루엣처럼 드러나던 그의 몸매. 초반에는 주로 골반을 봤는데 요즘에는 허리를 자꾸 보게 된다. 잘록하고, 예쁜 굴곡 때문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그리고 총을 쏘고 나서 휘청 거렸는데, 무대 바닥에 발이 걸린 건가 싶었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훨씬 비틀거리는 연기를 하며 퇴장해서 꼭 취한 사람(drunk) 같기도 했고,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들에 흠뻑 도취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베일은 떨어지고>에서는 낮공과 밤공 모두 8일 밤공처럼, 18일 공연에서처럼 심하게 울먹거렸다. 낮공에서는 엘리자벳이 브릿지로 올라오기 전부터, 엘리자벳과 나란히 서 있을 때도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울먹울먹. 오물거리는 입술과 이마에 잔뜩 돋은 힘줄에서 그게 묻어났어.

밤공에서도 감정이 물씬 묻어나는 얼굴이었는데, 오랜만에 두 팔을 뻗어서 엘리자벳을 끌어당겨 안고 나서는.. 엘리자벳이 '어둠은 끝났어' 하고 노래하는 순간 오히려 자기가 감동받은 얼굴이 되었다. 감격과 벅참이 얼굴에서 막 묻어나서.. 이런 순애보 같으니ㅠ 거기까진 좋았는데 키스신에서 고개가 돌아가서 깜짝 놀랐다. 고개를 그렇게 눈에 띄게 좌우로 꺾은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게다가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죽음의 입술이 그녀를 따라가면서 끝내는 츄읍하면서 떼졌던 느낌. 아, 오랜만에 충격적인 키스신이었다.
 
 
(+) 밤공에서는 그날 따라 유난히 프롤로그에서 김수용 루케니의 격한 안무가 시선에 잡혔다. 머리와 상체를 써서 완전 격하게 춤을 추는데, 그 순간의 김수용 루케니는 세 루케니 중 가장 과격하다. 프롤로그에서 김수용 루케니의 안무가 꼭 창작무용이나 무언가에 사로잡혀 주술을 거는 종교의식 같다면 최민철 루케니는 적당히 선동하는 몸짓, 지휘하는 느낌을 주는 정도로 팔을 움직이는 것에 그친다. 박은태 루케니는 안무 없이 눈을 크게 부풀려서 객석을 노려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행복한 종말에서 어느 순간 등장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토드를 발견하고 의식하는 행동을 조금이라도 하는 루케니는 역시 박은태 루케니 뿐이다.
 
체감상 다른 루케니에 비해 박은태 루케니와의 회차가 적어서, 박은태 루케니는 항상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새로운데 낮공을 보면서는 불현듯 박은태 루케니가 다른 루케니에 비해 세세한 안무가 많다고 느꼈다. 다른 루케니들이 대사나 가사에 맞춰서 특정한 포인트가 될만한 동작을 제스쳐로 간단하게 곁들이는 느낌이라면, 박은태 루케니는 모든 가사에 자신만의 해석을 곁들인 안무를 꽉꽉 채워넣어서 공연 내내 그것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키치나 볼프 살롱을 비교해보면 박은태 루케니의 쉴 틈 없이 꽉꽉 찬 안무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데, 심심하지 않고 안무도 하나하나 다 깨알 같은 재미가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지만 가끔은 과한 느낌, 어떤 때는 끊임없이 안무와 노래를 병행해야 하다 보니 이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구나.. 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깨닫게 만드는 부분이 있어 일장일단이 있었다. 그리고 낮공의 1막에서는 특별히 의식하지 못했는데, 2막에서는 말끝마다 덧붙이는 괴이한 웃음소리가 듣기에 다소 거슬리는 감이 있었다.
 
 
(+) 전반적으로 배우들이 이끌어 간 공연의 흐름과 분위기 자체는 괜찮았는데 무대 세트를 옮기는 중에 잡음이 꽤 있었다. 특히 낮공의 거울송에서 엘리자벳의 거울이 우당탕하며 넘어질 뻔했던 것. 또 1막의 엔딩에서는 유난히 귀에 박히는 오케스트라의 실수가 있었다. 무대 세팅 시의 자잘한 소음이나 오케스트라의 잔 실수의 경우 관극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는 크게 (그러니까 이렇게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는) 의식하지 않는 편인데 22일은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공연이었다. 더군다나 낮밤 모두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가 좋았기에 더더욱 오케스트라와 스텝들이 그것을 뒷받침해주지 못한 점이 안타까웠다. 이래저래 뮤지컬 엘리자벳은 기억으로 남길 '단 하루의 공연'을 올리기가 참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