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린 샤큘.

비주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정말 예뻤다. 평소와 뭐가 달랐지? 모르겠어. 늘 보던 그 예쁜 얼굴이었는데 '그 예쁨'이 유달리 반짝반짝했다. 단풍잎이 계절의 정점에서 가장 아름답고 생기있게 물들어 팔랑거리는 것 같았어. 아름답고, 생기있고, 그리고 처연하고. 오늘의 그는 그랬다.

그리고 오늘의 2막. 전 회차를 통틀어 가장 감명 깊었다. 마음에 닿는 느낌. 여전히 심장에 남아 맴도는 이 느낌. 시아준수를 비롯, 정선아 미나와 다른 배우들까지 썩 조화로웠다.


무엇보다 The Longer I Live.

아아.. 압도적이었다. Fresh Blood나 She가 파괴적인 아름다움으로 심장을 움켜쥔다면, 이 넘버는 숨 막히는 허무함을 선사한다. 모든 것이 공허해져. 눈앞으로 안개가 자욱해진다. 그리고 오늘의 안개는, 삼연곡과 It's Over, Seduction의 여운을 말끔하게 지워버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세상의 모든 허무와 회한이 소용돌이치며 그라는 동심원을 이루고 있었다. 사랑하기에 고독하고, 그래서 아프며, 그렇기에 혼자인 그였다.

사방을 메우는 고적한 목소리 속에서 1막과 2막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혼자만의 벅찬 해후, 혼자만의 세레나데 러빙유. 한결같은 외사랑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함께하게 되었나 했으나 그 사랑을 두드리는 뼈아픈 깨우침. 그가 바랐을 뿐인 '죽음이 없는 삶'이, 그가 줄곧 '삶'이라 믿어왔던 것이 사실상 삶이 아니었음을 깨달아 버린 순간의 무너짐. 애써 애써 견뎌왔던 400년의 의미가 송두리째 퇴색하는 순간의.. The Longer I Live..

이 노래는 그의 시였고, 눈물이었으며, 드라큘라로서 그가 보여주는 뜨거운 사랑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여기서부터 그가 더 울었나 내가 더 울었나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나 오늘 너무 힘들었네..


1.

조나단의 도착. 못내 환영하기 싫었던 걸까 ㅋㅋ 앞부분 그의 대사 ㅡ '너무 고된 여정은 아니었는지요.'를 하지 않았다. 굉장한 마가 드리워졌고, 나는 당황.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체 작사한 적은 있어도 아예 대사하지 않은 것은 시아준수의 뮤지컬 역사상 처음이야. 쭈뼛쭈뼛 분위기를 살피던 조강현 조나단이 자기 대사 '비스트리츠에서 여기로 오는 마차를~'로 넘어간 이후부터는 평소와 같았다. 너무 평소와 같아서 나 순간 내 기억이 잘못됐나? 시아준수가 아니라 조나단이 대사를 안 했던 거야? 아니면 이젠 대사 없는 건가? 잠시 헷갈리기까지 ㅋㅋ


2.

Fresh Blood. 오늘은 망토의 난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침대에서 내려오다 왼손이 망토 안으로 쏙 들어가는 바람에 망토 자락을 바쁘게 헤쳐 손을 끄집어냈다. 장갑을 벗을 때도 같은 손이 또 망토에 덮여서 ㅋㅋ 툭툭 털어내 꺼냈다. 언뜻 보기에는 무엇이 다른지 모를 정도로 태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에서 더 웃음이 났다. 귀엽고, 프로다워서. 도대체 시아준수는 무대 위에서 당황하는 법이 없다.

아아, 그리고 오늘 망토 벗은 머리가 가장, 가장 멀쩡했다. 굳이 머리를 쓸어넘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오오.


3.

윗비에선 정말 항상 너무 근사하다. 이 자신감으로 빛나는 미소를 왜 지켜주지 않았어요 미나? 당신과의 만남에 이토록 기쁨으로 부풀어 있는 얼굴을 꼭 그렇게 울려야만 했던 거야? 야속한 그녀. 다가올 운명도 모르고 기대감과 자신감에 빛나는 얼굴이 안타깝다. 말쑥한 모습이라 더 애석해.


루시와 드라큘라. 기대감에 부풀어 + 혀로 입맛을 다시며 + 살짝 미소까지. 오늘도 트리플 세트 ㅎㅎ

미나와의 대사연기도 참 좋았다. 특히 '영혼을 팔아서라도!' 일갈할 때와, 다가오지 말라는 미나에게 '두려워하지 말아요.' 할 때. 그와 그녀의 온도 차가 가장 또렷하고, 두 사람의 속도가 현저하게 다른 순간의 대사라서. 마음 먹은 대로 곧장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그의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리고 The Mist.

오늘 이 곡이 왜 이렇게 슬펐나. 이 노래가 꼭 그의 외로움처럼 들렸다. 마치 루시를 통해 그의 고독과 오랜 사랑을 전하는 것만 같았어. 특히 그의 영상이 나타나는 순간의 가사와 멜로디는 평소에도 종종 울컥하는 부분이었는데 오늘.. 흑흑. 그 순간 내가 다 쓸쓸하고 아련아련해져서.. 조심스럽게 미나 주위를 감싸는 그의 그림자가 한없이 안타까웠다.


4.

삼연곡.
1-2회차 전부터인가. 정선아 미나는 '난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이 대사를 하지 않는데, 없는 편이 나은 것 같다. 지나치게 벽을 세우는 느낌의 대사라.


She.
사랑의 노래, 흑화, 비명. 하지만 가장 압도적으로 눈에 박혔던 건 '끝내주소서'라며 절규할 때였다. 이 순간은 그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그 얼굴만 보게 된다. 너무 아름다워. 괴로움과 절망과 애수가 만개하여 더없이 아픈 순간의 얼굴인데, 정말이지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말은 이 순간의 그를 위하여 존재할 거야.. 이때의 얼굴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요... She를 부디 영상으로...


At Last.
그의 눈물과 함께 그녀의 눈물, 나의 울컥함이 동시다발적으로 터트려지는 순간. 그녀의 손을 부둥켜 쥐고 속삭이는 목소리. '이제 깨달았나요.' 그러면서 오늘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조심스럽게 볼을 따라 흐르는 눈물을 훔치는 그의 손길이 참 아팠다.

항상 숨죽여 기다리는 격통의 순간은, 오늘도 반말. '당신은! 이미 결혼했어..'


러빙유.
오늘과 같은 도입부는 없었다. 오늘 그는 꼭 한땀 한땀 바느질하는 것처럼 한 음 한 음 새기듯이, 속삭이듯이, 사랑이 철철 흘러넘치는 간절함으로 그녀에게 애원했다. 평소가 눈물의 세레나데였다면 오늘은 눈물범벅의 세레나데였어.

'내게로 와요'는 일전에 한 번, 애절하고 가련하게, 옅고 얕은 목소리로 처연히 불렀을 때와 같은 강약이었다. 그녀의 심장과 함께 내 마음을 녹이는 목소리였어. 아아, 오늘의 도입부가 얼마나 절절했는지. 그 절절함으로 오직 하나 사랑만을 호소하고 있어서, 순수함마저 엿보일 정도였다.

(+) 그런데 오늘 염색 새로 하였나? 앞면에 핏물이 뚝뚝 묻은 건 물론이고 뒷목이 이 정도로 새빨갛게 물든 건 22일 이후로 처음인 듯하다.


5.

Life After Life

루시 쳐낼 때 단호한 건 물론이고, 이젠 루시의 존재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느낌마저 준다. 불쌍한 루시;; 묘지 문밖으로 향할 땐 상체를 살짝 틀어 남겨둔 피조물들을 향해 시선을 한 번 주었다가, 망설임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멋졌어ㅎㅎ 상체를 젖혀 머리 넘기는 동작도 (오랜만에) 바로 이어서 했는데, 아 이건 매번 하면 좋겠다 ㅎㅎ 멋있음 ㅎㅎ


6.

The Master's Song (rep)

깐샤큘일지, 내린 샤큘일지 결정되는 새로운 기다림의 묘미가 생긴 순간. 오늘 1막에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예뻤던 그 때문에 내심 계속 내린 머리이길 바랐는데 진짜 내린 머리였다. 아 나 좀 기뻤어 ㅎㅎ


7.

Mina’s Seduction

아아 이 아름다운 쇳소리. 풍부하게 긁힌 음.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소리.

소리도 소리지만 미나가 망설일 때 시아준수 표정 연기 정말 섬세해서.. 미나가 망설이는 첫 순간, 오늘은 꼭 '그래? 이걸론 부족하단 말이지?' 하는 얼굴이었다. 그럼 조금 더 주문을 걸어볼까 하는 것처럼 이어졌던 '끝이 없는 쾌-락!'

미나를 설득하면서, 그녀에게 끝없이 고정된 그의 눈빛은 러빙유 때와는 다르다. 사랑의 간절함보다도, 열망으로 이글이글해. 노려보는 것도 같고.

(+) 오늘 가슴을 너무 세게 그었나 봐. 왼쪽에 일자로 선명한 생채기ㅜ
(+) 자켓이 이렇게 안 벗어진 건 오늘이 처음이다 ㅋㅋ 그동안에도 자켓이 한 번에 안 벗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혼자 해보곤 했는데, 음. 막상 그런 순간이 닥쳐도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소매 부근에 걸린 느낌이었는데 되게 연기처럼, 한쪽 팔씩 탁 탁, 꽤 절도 있게,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빼냈다. 멋있었어 이것도...

(+) 시작할 때 '그, 그-대' 살짝 멈칫함 ㅎㅎ


8.

It’s Over

'그녀는 이미 <나의 것!>' 오랜만에 듣는 날카로운 강세. 여기서부터 강하게 치고 나가면 짜릿함이 두 배가 된다. 그리고 그에게 엄청 동조하게 돼. 반 헬싱 이하 인간들이 매우 번잡스레 느껴진다.

시작부터 파워파워해서 왠히괜지 그럴 것 같았는데, '포↗기해!'도 무척 오랜만에 돌아왔고!

재입장할 때 커튼과 투쟁할 뻔했지만 오늘은 재빠르게 위로 들쳐 올림으로써 커튼과 싸우느라 발이 묶이는 상황을 면했다. 미나의 배신 이후에 뛰쳐나갈 때는 항상 멋있다. 양 갈래로 챠르륵!


9.

Train Sequence

고독한 목소리. '어둡다, 세찬 물소리 들려와.' 이 고독의 소리 차례가 되면 미나가 정말 야속하다. 그들을 편들지 않았더라면 그가 상처받을 일도, 다시 고독 속으로 돌아갈 일도 없었잖아. 그가 그들을 처치하게 내버려 두었다면 유일한 안식처인 성으로 돌아가야만 했을 일도 없었을 테고. 이래저래 미나가 문제다. 루시가 죽은 것도, 아더의 불행도. 다 미나 때문이야.


10.

The Longer I Live는 앞서 이야기하였으므로 바로 At Last.

미완성 조각상을 대면할 때의 연기는 정선아 미나 쪽이 더 설득력 있다. 점진적으로 단계를 밟아가기 때문. 조정은 미나는 이 부분에서 지나치게 앞서 나간다. 관겍에게 틈을 주지 않고 홀로 달리기 때문에 연기가 매끄럽지 않다. 더불어 '내 마음의 빛, 태양이 아니라 그대 눈빛' 이 부분도 정선아 미나의 음색이 나를 더 울컥하게 해. 뒤 이어지는 '돌이킬 수 없는'에서 휘몰아치는 열병과도 같은 열정의 표현은 조정은 미나를 더 선호하지만.

이래저래 At Last는 더 선호하는 미나를 가릴 수 없게, 두 미나가 각자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어느 미나를 보더라도 항상 아쉬움이 남았는데, 오늘은 그 아쉬움이 굳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정도로 미나 자신과, 그와 미나의 호흡이 좋았다.

두 미나 모두 이 넘버에서만큼은 그를 절절하게 사랑하고 있고, 그의 선택에 무너지며, 그의 눈물에 아파한다. 400년의 외사랑이 마침내 쌍방향이 되는 기적의 순간이자, 아픔의 최정점.

여기서 (내 기준) 슬픔의 수위를 넘는 순간이 정말 많은데, 오늘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아팠다. 그도 그녀도 나도 내내 눈물바다였어.

'내 마음의 빛, 태양이 아니라 그대 눈빛'
'돌이킬 수 없는'
'차가운 암흑 속에'
'사랑해요 그대, 그대 사랑해요.'

그리고 마지막 입맞춤 전에, 그가 두 손으로 단검을 그녀에게 쥐여줄 때. 그 마지막 손길. 마지막 눈맞춤. 오늘도 그는 그녀를 달래듯이, 그녀를 위로하듯이 자신의 죽음을 의연하게 노래했고, 울음과 기쁨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사랑을 위하여, 사랑 속에서 떠났어. 그녀를 향한 마지막 손길을 남겨둔 채.



(+) 그런데 유난히 오늘 관이 빨리 닫힌 느낌이었어ㅜ 그가 아직 그 아픈 손길을 채 맘껏 뻗어보지도, 거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하필 이것마저도 슬펐다.
(+) 붉은 옷깃의 깃이 오늘! 완전히 납작하게 눌려졌다. 덕분에 옆얼굴을 가림 없이 매우 잘 보았어. 좋아요. 피드백 중 가장 마음에 든다.

(+) 반 헬싱은 다시 나무 막대로 십자가를 만들었다. 바뀌었던 것이 아닌 모양.


댓글 '1'
profile

연꽃

14.08.06

그리고 미나.. 노백작님 코트자락 밟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