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 삶의 아름드리 나무와 같다. 당신의 그늘 아래에서 쏟아지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나의 하루를 채워 주었지. 그뿐일까. 당신은 비 오는 날의 우산을 자처했다. 강을 이루어 넘실대는 눈물 앞에서는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흠뻑 젖은 당신의 등을 따라, 나는 당신이 앞서 두드려 가며 확인해놓았던 마른 돌에서 돌로 걸었다. 그 덕분에 나의 발은 흙투성이가 될지언정 당신의 것처럼 온통 적셔지는 일은 없었다. 내 삶은 늘 그런 당신과 함께 돋움했다.

그랬던 당신이 조금씩, 젖은 어깨를 내보여 온다. 나의 숨이었던 당신의 노래에 울음이 깃든다.
4년 전 봄에 참아내지 못하였던 그 눈물로부터도 어언 반십년의 세월을 품은 눈물을 함토해낸다.

늘 앞서 걷던 당신이 나의 걸음에 맞추어 서며, 우리가 걸어왔던 뇌우 속 빗줄기를 내게도 보여주는 것이다. 그때서야 나는 그와 나란히 본다. 그러나 굵은 빗다발을 내가 온전히 가늠하기도 전에 당신은 나의 시야를 자신의 웃음으로 돌려놓는다. 젖은 어깨로부터도, 소나기로부터도 시선을 강탈하여 간 말간 웃음을 뒤로 하고 당신은 다시 걷는다. 앞서 걸어가는 그 등 뒤에 남겨진 나는 표정의 갈피를 잃는다. 웃음에 대한 화답은커녕, 웃음 너머의 얼굴도 바로 보지 못한다. 비 개인 뒤의 구름 속 빛처럼 먹먹하게 반작이는 그 웃음을 거듭하여 되새길 뿐이다.

앞서 가는 당신이 멀어짐에 따라 작아지는 등을 보면서도 나는 섣불리 따라 걷지 못한다. 폭우의 파편일 것이 분명한 기억들이 일제히 일어나 나의 걸음을 붙든다. 



파편으로 박힌 기억이 넘실이며 시야를 덮는다. 언제든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던 말은 그 조각의 커다란 일부다. 3월 8일의 당신은 말했다. 언제든지, 어느 때라도 준비가 되어있노라.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끝을 이야기하는 당신을 마주하는 일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듣는 말이 아니었기에 더욱 명치에 맺힐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거듭 새기느라 콘서트에 대하여는 끝내 무엇도 적을 수 없었던 3월의 내 모습을 나는 본다.

어제 당신은 다시 말했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다.'
허언하지 않는 당신의 심성으로는 당연한 언동일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 관철하여 왔던 당신이다. 그런 당신이 낙관하지 않는, 혹은 낙관할 수 없는 현실이 당신의 목소리를 통하여 선언되었다. 상상 이상의 아픔이었다.


그 말대로일지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보는 시야의 일각일 뿐이다. 그가 겪어 왔을 일도, 겪고 있을 일도 온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나로서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나의 자리에서 확언할 수 있는 하나가 있다. 



나는 당신을 안다. 당신은 단단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뿌리 깊이 내린 나무다. 그러나 당신은 또한 사람이다. 당신이 딛고 선 대지 위에 강인하게 뿌리 내린 채, 심지 굳고 곧은 마음 반짝반짝한 그 심성으로 웃기도 하지만 울음할 줄도 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이 보여주고, 내가 보는 확신ㅡ긍정적이며 맑고 강인한 당신이라는 뿌리 깊고도 잔인한 신뢰 안에 당신을 가두지 않는다.

저만치 앞서 가는 곧은 등을 향하여 나는 다짐한다. 당신의 단단함에 학습되지 않겠다. 당신의 단단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언제고 웃어주는 당신의 얼굴도, 늘 노래로 다가와 주는 당신도 결코 당연하다 여길 수 없다. 그저 기억하겠다. 당신이 늘 단단한 마음으로 마주하여 왔던 대기와, 당신의 울음을 머금었을 공기, 그리고 당연할 수 없는 이 모든 일을 당연한 것처럼 가능하게 한 당신을.

나는 다시금 준비를 마쳤다. 걸음걸음 발맞추어 걷는 우리의 길 앞에 놓일, 당연하지 않은 그 모든 풍경을 당신과 함께 바라볼 준비 말이다. 당신은 마음껏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도 좋다. 늘 앞장서는 쪽이 당신이 아니라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 길을 걷는 나의 호흡이 당신의 것보다 가볍지만은 않았으면 한다. 그렇게 나는 당신과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이 길을 함께 걷겠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언젠가 당신이 보는 시야의 일각이나마 내게 허락되는 날이 다시 오거든, 그때는 곧장 당신을 안아줄 것이다. 함께 걷게 해주어 고맙다고. 당신이었기에 결코 오르막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보라고, 우리가 걸어온 길에는 당신의 말처럼 찬연한 사랑의 향기만이 가득하지 않으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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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5.01

4월 30일을 보낸 나의 마음은 4월 13일을 보냈을 때와 같아요. 두 하루는 나에게 같은 색, 동질한 감격. 이 행복을 품고 내가 오빠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13일에도 30일에도,

고마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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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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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당연하지 않은 우리의 오늘을, 이 오늘을 딛고 다가오는 내일을 언제나 생경한 기쁨과 감사 속에서 맞이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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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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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오빠로서 존재하여 주는 기적 같은 오늘을, 이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도, 이 소중한 하루하루에 익숙해지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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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5.01

온 몸을 다해 외쳐 너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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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5.08

익숙해 질 수 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감각해지는 거다. 하지만 익숙해진 내 모습이 불쌍해 보일 거다. 그래서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건 팽팽한 긴장이다. 익숙해지면 우리가 힘들거다. - 김준수, 2009.


이조차도 당신에게서 배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