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극이 특이한 건 감정을 소모하는 넘버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물론 주어는 시아준수). 분석하고, 골몰하고, 때로는 분노한다. 하지만 쏟아지는 마음을 노래에 담고, 그것이 울음이 되고 흐느낌으로 번지는 장면은 전무하다. '나도 힘들다'는 말조차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흘러가는 말처럼 내뱉고 만다. 속을 알 수 없는 그 눈빛처럼 샤엘의 의중은 도통 짐작키 어렵고, 그의 마음은 더더욱 들여다보기 힘들다. 극 안에서의 샤엘의 캐릭터가 그렇다. 그래서 프리뷰 때 참 색다른 느낌이었는데, 오늘 왜... 마지막 순간의 엘이 너무 안타까워 마음이 아팠다. 샤엘의 연기가 그랬다.

확신과 혼란스러움 사이를 오가는 얼굴이었다. 창고로 향하는 시점에선ㅡ그것이 노트의 힘에 의한 불가항력적 선택이었다 해도ㅡ 그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자신이 믿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탕으로 도출해낸 결론. 그것을 또렷하게 움켜쥐고 있었어. 

하지만 그 확신이 라이토의 이야기에 점차 구름처럼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라이토를 쏘고 난 후에는 신기루가 되어 사라졌다. 

흔들리는 동공. 혼란스러움 가득한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얼굴. 갈피를 잃고 떨리는, 그러나 차마 주먹으로 움켜쥐지도 못하는 손. 남은 이성이 라이토에 대한 분노로, 키라의 단죄를 위해 다시금 총구를 겨누게 하지만 그것뿐. 노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은 옆얼굴이 아팠다. 

그 모습이 천 년같이 흘렀다. 그대로 멎어버린 얼굴. 라이토를 바라만 보는 눈. 멈춘 총구. 총구의 방향을 뒤트는 손길에 미세하게 버티는 팔. 하지만 무력하게 꺾이고 마는 저항.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게임의 끝은 다가왔는데 스스로 게임을 끝낼 수도, 키라를 단죄할 수도 없었다.
단지 말했다.
'역시 난 틀리지 않았어.' 

이 대목에서 프리뷰의 그는 기뻐했다고 느꼈고, 첫공 때는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것 같다 여겼다. 반면 오늘의 샤엘은 기쁨과 분노가 동일수치를 이루어 양자가 서로를 상쇄해버린 것만 같았다.

흐느끼는 듯한 웃는 얼굴에서 환희와 희열, 자조와 무력감이 맞부딪히는 충돌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러나 그 치열한 싸움은 어느 한쪽으로의 결론을 채 이루기도 전에 총성에 멎어버렸다. 그래서 여느 사람들처럼 죽음을 맞이하여 땅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선 채로 죽었어. 눈을 감지도 못했다.


*

극 자체는 오늘은 무척 즐겁게 보았다. 모든 장면이 흥미진진. 수사관의 넘버조차도 관대하게 들렸다. 깊이 빠져 들으니, 새삼 1막의 노래들도 하나같이 좋다. 그럼에도 프리뷰 때 처음 듣고 이거다 싶은 넘버가 없었던 건, 오늘 보니 넘버 중간중간에 대사를 넣는 연출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디셈버에서도 아쉬웠던 부분인데, 노래가 진행되어 서서히 탄력을 받을 만하면 뚝 끊어질 때가 상당히 많았다. 노래를 끊고 대사를 삽입하는 연출은 노래 감상의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맥을 빠지게 한달까. 이런 점에서 가장 안타까운 넘버는 <비밀과 거짓>. 연출적으로야 엘-수사팀-라이토를 오가며 많은 양의 정보를 한꺼번에 전달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편을 선택한 것이 맞다. 하지만 압축 효과를 얻은 대신 이 넘버가 지닌 폭발력이 제대로 발휘될 기회를 잃은 듯하여 아쉽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온전한 노래로도 들어볼 수 있었으면.

오늘 가장 좋았던 넘버로는 The Game Begins 라고 해야 할지, 변함없는 진실이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마음.

'어둠에 가려진'에서 눈을 살짝 가리는 왼손이 너무 우아하고, '숫자들과 데이터'의 순간이 너무도 좋다.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동공. 최면에 걸린 것처럼도 보였던 광기. 그 자신이 노래한다기보다도 엘이라는 천재를 있게 한 지성 그 자체가 노래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변함없는 진실에는 대단한 변화가 있었다. 그건 바로 폭풍 고개털기! 프리뷰 때도 서너 번 격렬하게 존재했는데, 오늘은 정말. 고개로 진실을 찍어누르는 움직임이었다. 도장 찍는 것처럼 분명하고 격렬하며 본능적인 움직임이, 반드시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엘의 의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멋있음은 옵션.

비밀과 거짓에서는 오늘도 딸기 하나를 세입에 나누어 먹었는데, 가장 처음 딸기 앞코를 베어 물 때가 왜 이렇게 간지러운지.

테니스신의 훌륭한 선은 여전히 놀랍다. 두 사람이 나란히 정면을 향하여 절정을 맞이할 때, 샤엘의 동작은 안무가 된다. 그전까지는 어느 정도 스포츠다운 움직임도 있었는데, 정면을 보면서부터는 그 움직임이 예술임을 숨기지 않아. 감사합니다 ㅠㅠ

신발은 벗을 때 살짝 삐끗하는가 싶더니, 오늘도 신을 때 오른쪽은 손가락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예상외의 복병은 왼쪽 바지 주머니. 휴대폰이 한 번에 쑥 빠지지 않아 약간 애를 먹는 뒷모습을 보았다. 귀여워...

사탕은 소이치로와의 대화에서는 콜라 반 밀크 반. 미사의 수사에서는 체리 맛 핑크색. 그런데 콜라 맛이 맛이 없었구나. 그랬구나. 어쩐지 열과 성을 다하던 첫공과는 달리 우물거림 없이 이리저리 굴리기만 하더니!


마지막으로 오늘 나의 영혼을 묻고 온 곳은 돌출 앞 <죽음의 게임>.

겉옷을 걸쳤을 뿐인데 섹시함이 상한에 치달은 느낌. 아이도루의 느낌. 멋짐. 잘생김. 섹시함. 예쁨. 그냥 바라만 봐도 예쁜데 노래와 가삿말은 두 사람의 첫 대립이라 두근거리기 그지없고, 표정을 굳힌 채 라이토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눈이 정말 멋있다. 어디 틈이라도 잠시 보여봐, 즉시 물어뜯어 주겠노라 하는 듯한 눈. 라이토는 정말 좋겠다. 샤엘이 그런 시선으로 봐줘서.




시아준수 이외의 이야기:

나의 히어로. 이 넘버가 눈물 포인트가 될 줄은 몰랐는데.. 사유의 청아한 노랫소리와 가삿말이 안타까웠다. 미사와의 듀엣에서는 두 사람이 라이토라는 한 사람의 정반대되는 모습을 각각 사랑하는 대비적 구조가 좋았다.

렘이 엘을 죽인다고 해서 렘이 밉진 않은데, 야가미 국장님은 밉다. 국장이면서 사건을 바라보는 눈도 없는가? 자신을 신뢰하지도 않는 수사팀과 함께 일하는 엘이 안쓰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