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 남는 것은 '허무함 뿐'이라며, 음절마다 약한 고갯짓으로 방점을 찍었다. 눈에도, 입매에도 그가 내려찍은 음절이 달라붙어 얼굴을 메웠다. 공허함 가득한 표정.
총구를 스스로에게 겨누도록 방치하며, 라이토의 손길을 무력하게 받아들이며 아주 살짝, 아주 살짝만 시선을 내리깐 눈꺼풀 위로도 무상함이 맺혔다. 그래, 소용없군. 과연 그렇구나. 하는 듯하던 얼굴. '받아들임'이 완연하였던 눈동자.

절망이 한차례의 소나기처럼, 짧으나 강하게 휩쓸고 지나간 동공으로 그가 웃었다. 어쩔 수 없다면, 거부할 수 없다면 걸맞은 죽음을 택하자. 그런 기색이 엿보이는 얼굴로. 마지막에 토해내듯 뱉었던 웃음이 특히나.

죽음의 순간 그가 선택한 것은, 희열이었다.


*


오늘 낮공은 유일한 2층. 되도록 망원경을 들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려 노력했는데, 역시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다. 예쁜 얼굴을 보고 싶어 간질간질. 그래도 해냈당. 게임의 시작과 변함없는 진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성공. 시야의 반경을 무대 전체로 넓히니, 조각조각이던 퍼즐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놓치고 있는 것이 많아서, 더 기뻤던 발견들.

우선 멀리서 그의 전신을 보았을 때 바로 다가왔던 다른 점은 오자 다리로 의도한 바지의 곡선이 바로 보였다는 것. 늘 얼굴만 봐서 몰랐다. 구부정한 등에 굽은 고개, 휜 다리까지 외형상으로도 이미 충분히 괴짜. 그가 의도한 엘의 일각을 또 하나 보았구나 싶어 기뻤다.

인상 깊었던 무대 효과는 그의 등장과 늘 함께하는 스크린 벽. 가까이에서는 몰랐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보니 명멸하는 스크린 속 조명이 뇌의 파동을 쏙 빼어 닮은 것이 보였다. 깜빡깜빡. 심장 고동을 닮은 자의식을 저런 형상으로 옮겨 놓았구나. The Game Begins에서도, 변함없는 진실에서도, 비밀과 거짓에서도 내내 뇌파처럼 깜빡이는 빛을 보고 있자니 그 공간 자체가 곧 그의 머릿속이었다. 그의 의식으로 초대되어, 내면의 격류를 직접 보고 들었던 오늘.

특히 게임의 시작. 내가 상대해주지ㅡ가성이 흩트려지는 순간, 바닥과 벽면을 타고 흐르던 부호들은 그 자체가 그의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생각의 파편이었다. 숫자들과 데이터의 순간, 아래에서부터 위로 역류하며 번져나가던 수식들 역시. 여러 대의 모니터가 끊임없이 명멸하는 모습이 꼭 그의 뇌파를 닮았다면, 펼쳐 흐르는 부호들은 그의 뇌 속에서 충돌을 거듭하는 의식이자, 추리의 단서들이었다.

노래가 다 끝난 후, 빨갛게 번지는 모니터와 주홍빛 무대 조명은 본능적인 위험신호 같기도 하고, 발갛게 타오르는 그의 심장 같기도 했다.


비밀과 거짓. 등 뒤의 스크린은 내내 그의 뇌파처럼 깜빡이다, 듀엣의 순간 가장 치열한 빛을 냈다.


변함없는 진실. 늘 얼굴만 봐서 변함없는 진실에서도 스크린이 등장하는 줄 몰랐다. 바닥으로 스크린을 형상화한 조명이 쏘여지는 것도 몰랐어. 더욱 놀라웠던 건, '나의 무의식은 몸부림치고 있다'는 대목에 진입하는 순간 무대 바닥을 뒤덮는 어지러운 형상. 뇌의 형상 같았다. 그 뇌를 딛고 서서 그가 노래하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무대 자체가 그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었다. 변함없는 진실의 그는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엘인 동시에, 엘이라는 존재를 있게 한 '의식'이기도 했다.

노래로, 연기로, 무대 조명으로 혼란과 탐색을 거듭하던 그의 의식이 미궁을 딛고 일어서는 순간(가사로는 "그래 좋아 인정하지 사신의 존재"). 그는 왼쪽 돌출을 향해 걸음을 떼고, 뇌의 형상도 사라졌다. 대신 돌출 무대 바닥의 조명이 점화되는데, 어지러웠던 뇌의 형상과 대비되는 간결하고도 단출한 그 조명은 그의 생각이 갈무리되었음을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절정. 사느냐 죽느냐, 갈리는 경계선. 모든 조명, 심지어 그의 상징과도 같던 스크린 조명까지도 소거되고 환한 백색 조명만 그의 발아래에서 빛나던 그 순간. 무대 자체에 그의 확신이 팽배했다. 무대의 벽면까지도 노래에 임하고 있었다. 오직 하나, 변함없는 진실이 떠오를 것이라고.


소이치로와 사탕의 신에서도 모니터가 등장하는 줄 몰랐다. ㅋㅋ 나 정말정말 시아준수만 봤네. 그런데 재미있는 발견. 여기에서 스크린은, 다른 장면에서처럼 깜빡깜빡하지 않는다는 것. 미세한 명멸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동질한 밝기를 유지한 채로 멎어 있다. 키라에 대한 그의 심증이 확신의 단계로 완전히 나아갔기 때문이겠지. 이제 더는 탐색조차 필요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 순간.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의 위로 드리워진 어둠이 생각 이상으로 짙었다. 아직은 생을 붙잡고 있는 라이토의 시간과는 달리 어둠에 속한 그의 시간은 완전히 멎어 있는 것이 실감 났다. 그의 죽음이, 조명 효과에 의해 시각적으로도 강제되는 느낌이라 마음이 아팠다.



그밖에 2층에서 보았던 것들:
1. 비밀과 거짓. 잔에 든 것은 하얀색. 찰랑거리던 액체를 보고 놀랐다. 진짜 있구나. 그런데 그게 우유라니. 우유라니. 귀여워서 원.
2. 정의는 어디에 reprise. 지지대를 보았다. 왼발이 비스듬히라도 완전히 닿는 너비는 되어서 다행이다.
3. 키라는 당신의 아들. 수사관들 전용 조명ㅡ 2행 3열의 여섯 개의 직사각형 조명 위로 하나의 직사각형 조명이 덧대어졌고, 그 안에 엘의 의자가 있었는데 꼭 왕좌 같았다. ㅋㅋ

4. 미사 콘서트. 올챙이처럼 방글방글 돌아가는 조명이 내려다보는 각도에서 그렇게 예쁠 줄이야. 그밖에 다른 조명도 예뻤다. 알록달록 공들인 조명에서 영혼이 느껴졌다.
5. 지하철 사고. 멀리서 보니 더욱 리얼하게 '전철'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놀랐던 건 그 전철 위로 까맣고도 거대하게 드리워지는 그 상황의 지배자, 키라의 그림자. 절묘한 어우러짐이었다.


*


이제 연기 이야기를 하자면:

비밀과 거짓. 낮공. 오늘의 소리는 마지막 듀엣의 '거'짓말과 비밀을 '자'유롭게 이용하여 코너로 몰'아'주지. 날카롭게 그러쥐는 소리로 매섭게 귓가를 건드려왔다. 특히 코너로 몰'아'주지에서는 이를 앙물며 강조. 어림짐승미 폭발♡
밤공에서도 마지막 듀엣의 그르렁 소리가 굉장했다. 심지어 코너로 몰'아'주지에서 어깨에 힘을 주어 음을 터트려냈다!! 

두 번째 점프에선 오늘도 콩-콩 한 번 더 앞으로 뛰었고 (낮공).
딸기 간택도 굉장히 느릿하게, 음미하듯 탐색하듯 고르고 골랐다. 딸기들 심장 떨리게 ㅎ


키라는 당신의 아들. 낮공도 밤공도 어깨의 활약이 유난했는데, 특히 낮공. 오늘은 진짜 위험했다. 겨드랑이의 오목한 부분과 가슴 윗부분의 근육까지 훤히 보여서... 그냥 아예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도록 만든 옷인 줄.... 게임의 시작에서 이미 작정한 듯한 어깨와 쇄골이 심상지 않다고 느끼긴 했는데.. 이쯤 되면, 어깨가 드러나지 않으면 능력치가 40퍼센트 감소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이 사건에서 삼 퍼센트는 아주 높은 수치에요."라면서는 입을 야무지게 다무는데, 그 느낌이 토 달지 마. 하는 것 같아서 귀여웠당.


죽음의 게임. 늘 라이토를 앞장세우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감으로 뒤따라 걷는다. 두 눈으로는 끊임없이 그 뒷모습을 쫓으며, 언뜻언뜻 웃음을 머금는 얼굴이 라이토의 말대로 집요하다.

테니스 시합. 정면을 향한 절정에서의 동작은 점점 안무가 되어 간다. 각이 살아있어. 오늘 특히나 춤사위인 줄.

밤공의 변함없는 진실. 그래 좋아 인/정/하/지. 고개를 단계별로 (왼쪽으로) 기울이며 강조했다. 멋있음. '변함없는'에서는 위아래로 크게 끄덕끄덕.

그리고 봐도 봐도 좋은 눈썹 앞머리의 섬세한 움직임. '미사가 정말 사람을 죽였을 거라 생각해?' 묻는 라이토에게 되묻던 눈썹. 너도 알면서 뭘 물어? 하던.

참. 낮공. 테니스 시합. 서브를 날린 후, 왼쪽 소매를 휙 걷어 올리는 동작이 귀여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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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애드립:
낮공은 치사 뽕인가요? 밤공은 치사빤슨가요?
맛있는데..
이거나 드세요
맥심 3월호에 나왔었죠? 비키니 입은 사진 보고 완전 팬됐어요.

"여보세요?"의 말투에는 어느 때보다 본인의 뉘앙스가 섞여 있었고 (낮밤 모두), 낮공에서 유난히 사탕즙을 호로록 마시는 소리가 잘 들렸다. 글자 그대로 '호로록' 마심.
정의는 어디에 reprise에서는 낮밤 모두 읏-챠, 차분하게 내려와 천천히 걸어서 퇴장.

낮공의 사탕은 첫 번째는 오렌지와 하양의 1/2. 두 번째는 핑크와 하양의 1/2
밤공의 사탕은 첫 번째는 샛노랑에 하양 약간, 두 번째는 핑크와 하양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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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준수 외의 이야기:
바뀌었던 수사관이 돌아왔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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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7.12

종일반일 때, 낮공과 밤공의 층이 다를 때의 문제점. 특히 낮공이 위층일 때:

밤공에서 확 달라진 거리감으로 공연 자체보다 '시아준수'와 '가까움'을 만끽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밤공의 기억이 잘 없는 것도 그 때문. 내가 생각해도 어이 없을 정도로 얼굴만 보았다. 낮공 때, 전체적으로 본다고 노력했던 것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더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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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7.12

그리고 낮공 때 보아두었던 무대 전체의 그림을, 밤공 때 1층에서 보는 시야에 맞추어 되살려 보려고 노력했던 것도 밤공의 기억이 잘 없는 요인 중 하나인 듯.

나의 봄

15.07.13

매번 1층만 고집해서 1층만 갔었는데 스크린이 그렇게 많이 나오나요? 좀 위로도 가봐야겠어요! 그리고 우유요..? (동공지진) 입가에서 흰색조차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우유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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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7.13

하얀색이 찰랑거리더라고요! 근데 정말 입가에 묻어나는 건 없죠? 닿지 않을 정도로만 잔을 기울이는 걸까. ㅋㅋ
위층에서도 한 번 관람해보세요. 전체적으로 보는 즐거움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변함없는 진실의 조명효과가 반전이라 느껴질 정도로 새로운 발견이었어요. 무엇보다 멀리에서도 흠뻑 느껴지는 오빠의 존재감이.. (황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