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에 관하여 하고 싶은 말은 13일의 후기에 모두 써버려서, 막공은 공연의 이미지를 남기는 정도로만 적어볼까 한다.

시아준수적으로는 잘생쁨, 예쁨, 귀쁨, 아름다움. 그리고 늘늘티까지 총출동한 오늘의 공연.
과연, 마지막이구나 싶었던.


*

The Game Begins. 흥미로운 놀잇감을 발견한 기색으로 반짝이는 시작점에서의 얼굴. 엘리자벳 막공 프롤로그에서의 감회를 끌어다 주었다. 백 년의 기억에서 깨어나 엘리자벳과의 시간을 무한히 되살려내는 죽음처럼, 죽음의 게임을 다시금 시작하는 엘. 무한한 루프의 출발점에 재차 선 모습에 공연히 마음이 시렸다. 그와의 만남은 오늘의 공연으로 끝이지만,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도 엘은 계속하여 이 위험한 게임을 시작하고, 끝내고, 또다시 시작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 

본격적인 게임의 시작. 신인가, 인간인가. 미묘한 경계에 걸쳐 선 그가 웃었다. (나에게는) 마지막이 될 웃음으로 포고했다. 이제부터 알려줄게. 게임을 시작해볼까. 

가성의 스타카토는 몇 번을 들어도 인간 아닌 존재의 것 같다. 인간과 신의 경계에서 본능적인 비인간성ㅡ다시 말하면 '신성'을 드러내는 몇 되지 않는 순간이야. 그렇게 느껴져. 이 세상 너머의 소리와 홀린 듯한 눈동자, 경직된 채 오로지 키라의 존재에만 반응하던 육신이. 

건방진 멍~청이, 착각에 빠졌어! 있는 그대로의 분노를 숨기지 않고 그르렁대며 발음했다. 이를 악 물고.
이어, 신성을 걷어낸 인간적인 감각이 그야말로 '쏟아져 내렸던' 횡단추리.

숫자들과 데이터. 어제의 관록을 뛰어넘어 압도적이었다. 이런 파워와 여유로움은 또 처음이야. 별안간 눈물이 났다. 그 파워, 이 관록. 죽음의 게임을 향한 삶을 또 한번 시작하는 길목의 그가 너무도 청아하고 아름다워서. 단단하고도 뿌리 곧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반짝반짝하여서. 
 

비밀과 거짓.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다소 화가 난 듯하면서도 즐거움이 느껴지던 음성. '게임'을 대하는 얼굴이었다. 그 게임이 다만 생과 사를 대가로 할 뿐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아하던 기색의 비범함. 

아, 류크ㅡ성큼성큼 라이토가 엘의 영역(정확히는 엘의 영역을 상징하는 조명)으로 걸어 들어감과 함께 그의 시선이 라이토의 뒷모습으로 날아가 박혔다. 엘의 공간 속으로 들어온 라이토가 엘을 찾아낼 단서를 류크에게 읊는 것과 동시에, 엘 역시 라이토의 사고 속으로 침투해 가기 시작한다. 라이토의 걸음을 집요하게 좇는 그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짓궂은 미소를 사르륵 머금었다. 너의 생각이 훤히 보인다는 듯이. 

사신의 눈. 마침내. 발견에 다다른 그가 검지를 일으켜 세웠다. 류크의 형상을 매만질 듯 다가선 두 손이 주먹으로 오므라지더니, 자신의 관자놀이께로 물러나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형형히 빛내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비스듬히 말려 올라간 입 끝에서 확신이 묻어났다. 네가 날 죽이는 데 필요한 건 얼굴이었어. 그의 확신이 말했다. 

돌출. 마지막 듀엣. 거짓말과 비밀을 자유롭게 이용하여, 직후 잠시간의 침묵. 게임에 사로잡힌 것처럼 잔뜩 확장되어 흥분으로 떨리던 눈동자가 정면을 훑었다. 달뜬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아름다울 정도로 순수하게. 잔인할 정도로 거침없이.


정의는 어디에 reprise. 강해진 오케스트라의 자기주장. 막공임을 의식해서인지 그간의 페이스를 뒤흔들어버린 오케스트라의 강약.... 그것을 곧장 캐치해내고, 오케스트라의 울타리를 뚫고 치솟던 진정한 정의란 과연 무엇인'지'! 오늘의 소리는 바로 너다. 의심의 여지 없어. 


키라는 당신의 아들. 당신 누구야? 엘. 꼬박꼬박 수사관들을 상대해주는 오늘의 그는 옜다 반응. 이런 느낌이었어. 젠틀하고 상냥하면서도 거리를 좁힐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이어진 애드립의 향연. 장면 전체가 애드립이었다. 놀라웠던 건 쏟아지는 애드립 속에서 균형을 유지해가던 그의 감각. 경계와 융화의 지점을 정확히 캐치하고 장면을 유지했다. 배우들의 애드립으로 공기가 붕 뜨는 순간 적당한 말미와 함께 본래의 연기를 관철시킴으로써(이를 위함인지 대사의 톤은 프리뷰 즈음의 정돈되고도 차분한 억양으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이룩해낸 균형. 보면서도 참 감탄스러워서. 프로배우를 넘어 천상배우야, 시아준수. 


죽음의 게임. 노래적인, 연기적인 기억이 거의 없는 건 그 때문이다. 눈맞춤의 향연이었어. 선물처럼, 작별인사처럼. 오블이기에 조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첫공부터 조금의 거역도 허락하지 않았던 형형하고도 아름답고 근사한 눈빛과의 정면의 인사. 생각이 지워져 버릴 정도의 황홀함에 더하여, 이것이 마지막임이라는 깨달음이 겹쳐지자 울컥하고 말았다. 마치 그가ㅡ시아준수가 그의 엘과 작별할 시간을 주는 것만 같아서.. 그것도 가장 사랑하였던 모습을 생생히 새겨둘 수 있도록 유예를 주는 것 같아서. 


변함없는 진실. 나의 무의식은 몸부림치고 있다ㅡ무의식에서 꿈틀이며 일어나던 그의 자아. 결계를 깨고 세상 밖으로 솟음치는 선언의 '받아들인다.'

변함없는 진실에서 좋아하는 순간은 끝도 없지만, 소리적으로는 '받아들인다'의 도약하는 음성. 이미지적으로는 찾아낸다에서 늘 머금곤 하였던 도전적인 미소. 여기, 이 찾/아/낸/다를 음절음절 똑 부러지게 발음해내며, 끄트머리에 실어내는 웃음을 정말이지 참 좋아했다. 그다운 자기확신과 자신감이 너무나 명백히 날개 달던 순간이라.

막공에서 이미지적으로 가장 강렬하였던 모습은 돌출로 걸어 나오던 옆얼굴이었다. 조명에 반사되어 하이얗게 명멸하던, 희미하고도 날카롭게 빛나던 눈빛. 안개 더미를 헤치듯 뿌옇고도 발견을 찾아 따가울 정도의 빛을 발하였던 그 눈. 이 극에서의 엘 자체를 표상하는 것도 같던 눈빛.

돌출 최전선에 우뚝 서서 '판단하는 건 인간이지.'라며 씨익 웃는 얼굴은 모순적인 동시에 비인간적이었다. 키라의 심판을 인간의 행위로 귀결지으며, 그 자신은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존재로 젖혀둔 듯하여서. 그런데 이상하지. 기묘하게도 납득이 되었다. 변함없는 진실에서 극대화되는 그의 존재감 때문일까. 팽창하는 그 존재감이, 꼭 사신과는 다른 평행의 세계에서의 신성을 표상하는 것처럼 다가와서 그랬나.


거짓과 진실의 경계를 포착해 사느냐 죽느냐 갈리는 경계선. 찰나의 눈맞춤. 신기하게도. 황홀할 정도의 눈맞춤의 향연이었다. 소이치로와 사탕의 신 시작부에서도, 테니스 시합의 엔딩에서도. 꼭 그가 오블에서 바라볼 수 있는 모든 정면의 얼굴에서 눈맞춤을 선물하여주겠노라 작정한 것처럼. 그래서 2막 후반부의 기억이 잘 없는 것도 같고..


캠퍼스. 안녕하세요, 류우가 히데키에요. 어? 보이는 이름이랑 다른데? 실언을 황급히 막아서는 라이토. 그 모양새를 주시하던 그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모여들며 깊은 주름을 그렸다. 주름진 미간과 볼이 쏘옥 패인 옆얼굴. 섹시할 정도의 즉각적인 반응.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숨까지 죽이고 미사와 라이토 사이의 기류를 샅샅이 분해하는 옆얼굴의 그를 참 좋아했었지. 이 모습도 오래오래 잊지 못할 거야.


미사가 제2의 키라라는 증거가 있거든요. 이 대목은 늘 그를 즐겁게 한다. 옷의 실밥ㅡ에서의 강세가 도드라질수록 그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밥'이 어디까지 솟아오르는지 두근두근 기다리곤 했다. 오늘의 실밥은 꽤 높이 솟아오른, 실빱! 

나도 괴로워요ㅡ끝까지 착한 얼굴의 가면을 두른 채, 빙빙 돌려 물음 해오는 라이토를 향해 오늘은 혀로 볼을 볼록하게 만드는 것으로 짜증을 표출해냈다. 두 눈동자로 깝깝하다는 듯 천장을 가벼이 쓸어 넘겼던 것은 덤.


취조신. 자신이 신이 된 것마냥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건! 키라의 행태를 꼬집으며 비웃는 그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변함없는 진실에서 '판단하는 건 인간이지'라 선언하는 그를 볼 때의 미묘함 또한 되살아났다. 키라를 잡기 위해 린드 L 테일러를 비롯, FBI 수사관, 모키 형사의 목숨까지 도구로 이용한 그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자신은 예외로 두는 듯한 언행. 꼭 그 자신은 인간 너머의 존재로, 인간과 자신을 분리시켜 바라보는 것 같은 순간의 그가 양가적인 의미에서 비인간적이라 생각했다.


변함없는 진실 reprise. 비척비척 자각 없이 끌려오는 듯한 걸음걸이에서 그 자신의 보폭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어스름한 조명 속에서 폭발하는 그의 자아가 밝기를 더해갈수록 마음이 가라앉았다. 변함없는 진실의 본무대에서와는 정반대 밝기의 조명. 최대 밝기에서 최소한의 조명으로 변한 무대. 어스름과도 같은 그 희미한 빛 속에서도 빛내기를 멈추지 않던 자의식. 어떤 상황에서도 엘은 엘이라 말하는 것만 같은 그가, 장면이 전환된 후에도 오랜 잔상으로 남았다.


마지막 순간. 성큼성큼, 노트 앞으로 다가선 마지막의 그는 검지와 중지를 허락했다. 곧이어 미심쩍다는 듯 고개 갸웃했다. 어떤 발견이 도사리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듯이.

모든 진실이 장막을 걷어낸 게임의 최종장. 처음부터 다 보였다, 널 놓치지 않을 거야.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게임의 끝에서 엄습해온 허무함이 그의 어깨를 도닥이듯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죽음을 목도한 후에도 의연하였다는 점에서는 그의 신성이, 무(無)로 귀결되는 결말을 예감하고도 포기를 놓지 않은 오기에서는 그의 인간성이 발휘되었다. 마지막으로 라이토를 겨눈 행위에서는 결의 이상으로 더이상 어떤 기대도 없다는 듯한 도탈의 기색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스스로 겨눈 자세가 되었을 때, 살짝만 미간을 일그러트리는 것으로 모든 반응을 대신한 그의 얼굴에서 비웃음과도 같은 허무함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최후의 순간. 역시 난 틀리지 않았어. 웃음으로 시작하여 울음으로 끝났다. 울음이었다. 게임의 허무가, 인간 생의 덧없음이 두 눈가에서 휘몰아쳤다가 총성과 함께 소멸하였다. 인간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생명이 멎은 눈동자가 어떤 의미도 담지 않고 반짝거렸다. 삶을 앗아간 총성이 그의 인간성을 걷어내고, 신성만을 오롯하게 남겨 둔 것처럼.

그것으로 끝이었다. 인간의 육신은 스러져 어둠을 품었다가, 발그스름한 노을빛을 머금었다. 황혼에 물든 붉은 대지 위로 흐르는 인간의 노랫소리를 등진 채.



*


오늘의 애드립:
조울증이 있는 모태귀요미라고도 하죠. 
치사빤슨가요? 를 필두로 애드립의 향연이었던 키라는 당신의 아들ㅡ는 해당 넘버 플레이어에서 따로 상술할 것.
여성동아 3월호에 나왔었죠? 누나 집에서 라면 먹고갈래 편 보고 완전 팬됐어요.

사탕은 연분홍과 하양. 샛노랑과 하양.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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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08.23

이것으로 나의 엘은 안녕. 오빠의 엘이 향한 곳으로 떠나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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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5.10.15

오늘로 꼭 두달. 아직 이 전부가 기억난다. 이미지, 기억, 감각 전부가. 기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