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의외로 종일 시간이 나지 않아 이제서야(21:30) 자리에 앉아 기억을 더듬는데, 으으 기분이 좋아. 어떻게 표현할 수 없게 기분이 좋다. 이 순간이 다시 왔다는 사실이 주는 흥분, 행복. 계속 구름 위에 있는 것 같다. 행복해..


1. 드라큘라 성에서의 첫 만남. 400년 만의 재회에 백작님은 말을 잃으시지만, 내가 목격하는 미스 미나 머레이의 첫인상은 썩 유쾌하지 않다. 그 어떤 미나보다도 그의 손키스에 진저리를 치는 그녀라. 유난할 정도야. 첫공부터 그 표정이 눈에 콕.

그나저나 노백작님의 걸음걸이는 왜 이렇게 멋있으신 거지요? 매력적이야. 섹시해. 분명 '허우적'거리고 계신데, 그런 느낌의 몸짓인데도 불구하고 섹시하다. 우아하시고요.


2. Fresh Blood
이 넘버에서 심장이 뛰지 않는 순간이 없지만, 최초의 극점은 노백작님이 무대를 가로로 횡단하시는 순간. 그리고 오늘 그의 '목소리'가 젊음을 머금던 순간.
흡혈 후 그에게서 흘러나온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젊음 그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소리의 변화. 이제껏 들었던 어떤 흡혈 직후의 소리에서보다도 선명하고 또렷한 젊음을 들었다. 짙고도 굵은 거미줄로 엮은 듯하였던 소릿결이 순식간에 단정하고도 강하게 단련되어 나타났다. 대단했어. 그 변화가 주었던 카타르시스란! 아 벌써 또 듣고 싶다.


3. 윗비베이
새신랑처럼, 도련님처럼. 흡혈 직후 신생아의 것처럼 찰랑거리던 생머리를 말쑥하게 빗어넘긴 그가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콩닥콩닥. 반짝반짝 빨갛게 반짝반짝하여 너무도 근사하다. 미나와 만날 생각에 이케이케 단장했을 그가 상상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막 웃음도 났고.

이 대목에서 그가 재연에 심은 변화. She Intro에서의 대사톤도 그렇고, 여기에서도 제법 신세대스러운 몸짓이 나타난다. 두 팔 벌려, "과연 그렇군요" 할 때의 제스처가 특히. 첫공에선 정말 놀랐다. 백작님 이런 넉살도 있으셨군요! 싶어서. 짐짓 너스레를 떠는 얼굴에서 되찾은 젊음과 재회의 흥분에 도취되었음이 여실히 보였던 것은 귀여웠고.

그리고 아이 같은 얼굴. 불청객 루시의 난입으로 '토라진 듯'하던 얼굴. 두 눈이 삐죽 사납게 솟아오르고, 입술까지도 단단하게 앙 틀어문 얼굴로 몸을 홱 틀어버린다. 자신에게서 미나의 주의를 빼앗아간 상황에 화풀이를 하듯이. 흥! 


4. Lucy & Dracula 1
그런 사람들에게나 주시죠! 미나의 단호한 거절에 다시 또 아이 같은 얼굴. 그래? 분명 네가 그렇게 말한 거다? 후회하게 될 거야. 벼르는 것처럼, 단단히 토라진 화난 얼굴. 나타나는 표정들이 아이처럼 즉각적이고 직선적이다. 어느 정도는 억누르고, 감추려 하였던 초연과는 달리 언짢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아.

한편 '영혼을 팔아서라도 얻고 싶어 하던' 거야, 할 때는 거의 울먹울먹한 얼굴이었다. 초연 때는 얼마간의 탄식과 이해 못할 안타까움이 주를 이루었다면, 재연에서는 절규. 잔뜩 일그러지는 얼굴이 처절하기까지.


5. She
재연의 변화일까? 제단 위에서 포효했다. 마치 신에게 보란 듯이. 첫공 때도 제단에서 곧바로 내려오지 않고 약간 지체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오늘은 아예 제단에 머물렀어. 칼침을 맞은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올려다보는 뒷모습은 마치 그가 그것을 '받아마시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제단 위에서 그는 신이 흘리는 피를 고스란히 맞았다. 뒷모습이었으나, 신을 올려다보는 그의 원망 어린 눈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울음과 증오로 신을 쏘아보던 등이 쓰러질 듯 부서질 듯하면서도 꼿꼿했다. 결국 저주받은 생명으로 흠뻑 젖어버린 그가, 두 팔 벌려 쏟아져 내리는 피의 폭포에 몸을 내맡기며 괴물의 비명을 토해냈다. 괴롭고도 고통스럽게.


6. At Last
당신은! 결혼했어. 사이의 정적. 그의 드라큘라가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그녀를 향해 매달리듯 기울어진 상체의 익숙한 각도에서, 발 동동 구르는 것 같은 익숙한 뒷모습에서. 조나단과의 결혼을 선택한 미나의 모습에 무력감에 던져진 울음을 그저 내뱉기만 하는, 그 익숙한 얼굴에서. 


7. Lucy & Dracula 2
어제는 참, 베개에 머리를 콩 박았는데 오늘은 무사히 피해갔다. 암전이 초연보다 느린 편이라 흡혈을 하며 고개를 살짜기 비트는 모습까지도 보았네. 


8. The Master’s Song (Reprise)
렌필드의 볼 위로 핏물이 똑! 그것을 부드럽게 문질문질해주는 다정한듯 차가운 손길을 보았다.
그런데 재연의 렌필드는 영 충신스럽지가 않다. 첫공 때는 기분에 따라 반말도 하고 말이야. 정신병자이기는 하지만 순진한 면이 있다 싶을 정도로 우직하게 충신인 점이 매력인 인물이었는데, 반말을 듣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와장창 깨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렌필드라면 반항도 공손하게, 아닌가요.


9. Intro to Please Don't Make Me Love You
"미나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새 사랑을 만났다. 어르듯 화내듯 다급하고도 억눌린 '미나'에서부터 악센트와 떨림을 함께 섞어 넣은 '거-짓말'까지. 완벽하다. 여기 이 대목의 대사톤 전부가 사랑이지만 가장 아름답다. 가장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10. It's Over
장풍 사운드와 오빠 몸놀림의 합이 이 넘버의 새로운 백미가 되었다. 그의 손짓에 감겨드는 소리가 쾌감을 선사해.


11. Loving You Keeps Me Alive (Reprise)
줄리아의 죽음 이후 쏟아지는 반헬싱의 힐난이 이 넘버의 반대급부라면, 기꺼이 용인할 의사가 있다. 촌극 같은 상황을 단번에 상쇄시키는 그의 세 마디 소절.

그런데 이 직후 삼총사의 재습격은 왜 필요한 거지? 감정선을 이렇게 배려 없이 파괴해도 되는 건가? 불필요하고 쓸모없기만 한 장면이다. 러빙유 리프라이즈로 그가 불러일으킨 모든 감각이 소거될 것을 강제받게 돼. 다음 장면을 위한 쉼표가 필요하다면, 그저 그가 조각조각 난 마음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관 안으로 터덜터덜 몸을 숨기면 되는 일이다. 요란법석을 떨며 흐름을 깰 필요가 전혀 없다. 이런 식이면 관객은 그로부터 전해 받은 감정을 삼총사가 물러가고 미나가 다시 등장하여 안개를 걷어줄 때까지 가까스로, 안간힘을 써서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앳 라스트. 울지 마요, 내 사랑. 


12. At Last
삼총사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앳 라스트는 역시 위대하다. 도무지 초반의 조화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어우러짐이야. 감히 환상적이라 표현해본다.

무대 위의 배우로서의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대 안의 인물로서의 두 사람은 정말로 사랑을 한다. 한 사람은 사랑을 해서 떠나고, 한 사람은 사랑을 해서 붙잡지도 보내지도 못하는 그런 사랑을 한다.

이 사랑이 여물어 만개하면 어떤 비극의 모습을 할까. 시작과 마지막을 모두 지켜볼 수 있어 영광이다.



*


개연성을 더한다더니, 오빠의 할 일만 늘었다. 초연도 결국 오빠의 노래와 연기가 극의 교정장치이자 이음새였던 셈인데, 자신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였던 초연 배우들이 전부 빠지고 나니 이젠 전부가 오빠의 몫이다. 재연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극'에 추가된 장면만 보아도 그렇다. 반헬싱의 난을 용서케 하는 건 오빠의 러빙유 리프라이즈, 삼총사의 재습격을 잠재우는 건 오빠의 앳 라스트. 이건 초연을 덜어내는 일과는 무관한 연출의 무책임함이다. 수정이 요원하다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 부분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