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은 내린샤큘, 2막은 깐샤큘.
그리고 재연의 드라큘라로서는 처음으로 둘로 나누어 쓰는 후기.


1. 드라큘라의 성
뼈대는 이미 그의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으니 이제는 그날그날의 감정에 맡기며 연기한다 하였던가. 이 변화, '재연'이 불러온 대사의 생명력이란 실로 대단하다. 탄력적으로 모습을 달리하는 대사에는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이 가득하여, 매일매일을 드라큘라로서 살아가는 그가 느껴져. 덕분에 재연에서 유난히 그의 대사 연기를 보는 것이 즐겁다. 신기할 정도로 노련하면서도 흔히 말하는 ‘쪼’가 깃들어있지 않은 말투에 생동감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 재연의 그를 보다 보면, 정말이지 세상 어딘가에서 그의 드라큘라가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

오늘 기억에 크게 남았던 대사는 둘.

‘내일 저녁에는 저와 함께 만찬을 들면서 더 많은 얘기를 나누도록 할까요?’
꿈결을 걷는 목소리였다. 살며시 구름 위로 발을 들여놓은 소리가 감춤을 모르고 부풀어 있었다. 억눌린, 그러나 숨기지 못한 떨림과 함께. 내일 저녁이면 미나는 성을 떠나고 없을 텐데 꿈에 부푼 그 소리가 안타까워 마음이 저렸다.

‘결례를 범할 만큼 급한! 일이었답니까.'
윗 문장의 마음이 부풀수록 이 대목의 그가 안타까워져, 멋진 좌우대칭의 균형을 이룬다. 오늘은 다소간의 시무룩한 느낌도 있어서 귀여웠어. 노백작님, 섹시하신데 귀여우시기도 하세요. 완벽하시네요.


2. Fresh Blood
30일 공연의 변화를 오늘도 이어갔다. 소프트 블러드! 나직하고, 깊고, 어떤 순간에는 그윽하다는 느낌까지 주었다. 갑자기 이렇게 다른 소리를 듣게 되니 어리둥절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선사 받아 짜릿하다. 흡혈 후의 목소리와의 대비ㅡ특히 다시 챠-즌 내 힘!므아앙ㅇ! 과의 도드라지는 대비 역시 황홀하고.

그나저나 뱀파이어 슬레이브의 관이 쾅 닫히는 소리가 자꾸만 거슬린다. 드라큘라 성의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에 큰 기여를 하는 관 연출인데, 쿵 소리는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달까. 연출의 섬세함이 더 필요한 부분.


3. Lucy & Dracula 1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미나.’
초연과 재연의 다른 점은 이름에 앞서 쉼표를 꼭 넣는다는 것. 여기서의 분명한 쉼표가 매우 좋다. 당신을 만나러 왔다는 앞 문장을 그녀에게 정확하게 인지시킨 후, 나직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부름하는 이름에 담긴 악센트도. 다른 누구 아닌 바로 당신, 이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부르는 ‘미나’라는 음성 안에 그 모든 의미가 전부 담겨있다.


4. 삼연곡
왼블에서의 She는 나에게 가장 익숙한 그림이자, 가장 좋아하는 그림. 죽어가는 엘리자벳사를 끌어안고 울부짖을 때의 얼굴을 왼블의 각도로 바라보는 것이 좋아. 아프게 울며 애원하는 얼굴과 엘리자벳사를 보듬어 안은 그의 전신을 전부 바라볼 수 있어서. 오늘의 그 역시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극을 그는 매일매일 이렇게 써내려가고 있어.

악마에게 팔아서라도는 계속하여 진화한다. 역시 단순히 하고, 하지 않는 개념의 애드리브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정복해버려의 계보를 잇는 디테일로 발전해나갈 듯하다.


포효는 어제에 이어 오늘 역시 지상의 것이었다 하는데.. 스르륵 무너지듯이 제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그림 같았다고도 하는데.. “피눈물"에 모든 것이 리셋되어 버린 나머지 앞부분을 망각해버린 내가 놀라울 뿐이야....

At Last
그의 입맞춤에 화들짝, 고개 숙여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와 얼굴 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아예 엎드리다시피 숙인 그를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하자 자신이 더 어쩔 줄 몰라하던 것도,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거의 본능적으로 삽시간에 수그러진 허리도 전부 너무도 애틋하여서. 그가 얼마나 그녀를 향하여 필사적인지, 그 순간 절절하게 느껴져서.

당신은 결혼‘했’어. 30일 낮공에서와 같은 지점의 강세. 과거형의 셋째 음절에 강세가 박힐 때, 그 조화가 너무도 적절하고 알맞기에 마음을 때렸다.

Loving You Keeps Me Alive.
다시 돌아온 해돋이. 디셈버 스치다에서 '해돋이'라 여겨 사랑하였던 그 모습을 오늘의 러빙유에서 만났다. 미나를 향하여 옆모습으로 노래하던 얼굴이, 그녀의 동선을 따라 서서히 방향을 틀어 비로소 그 얼굴의 정면을 허락하는 순간. 애끓는 눈물의 얼굴을 바로 보게 되는 감격이 오늘따라 왜 그리도 컸던 건지. 범람하는 그의 감정에 폭 휘감긴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그의 오랜 사랑에 들끓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 정도였다. 오늘의 러빙유는 해돋이를 불러일으켰을 만큼이나 좋았다. 재연 들어 가장, 단언할 수 있다.

2절. 무릎으로 무너지는 그는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심장을 너무도 아프게 때려. 오늘은 특히나 두 손을 빌듯이 모아 하염없이 그녀에게로 뻗어보며 애구했다. 왼블이라 그의 얼굴을,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순간이었어. 왼블은 사랑이라고, 이 순간 그렇게 정했다.


5. Lucy & Dracula 2
유혹적이지만 사무적이다 싶을 정도로 차가웠던 여느 때와는 조금 달랐다. 차분하고도 처연함 가득 감도는 얼굴에서 언뜻 상처받은 기운까지도 느껴졌다. 상처 입어 잔뜩 예민해진 감각으로, 가장 최소한의 움직임만 취하려 하는 듯한 느낌도 주었고.

그런데! 처음 보는 표정! 먹잇감에게로 닿은 눈이 일순 반짝이더니 치아를 보이며 씩, 웃음을 머금었다. 사르륵 심어졌다 화르륵 사라진 미소였어. 엄청나게 예쁜!


6. Life After Life
오늘의 Life After Life는 한 폭의 거대한 울림. 소리의 진폭이 놀라울 정도였다. 크고, 풍부하고, 웅장했어.

그나저나 오늘의 루시는 너무나도 그에게 폭 안겨들어서 깜짝. 그의 품 안으로 완벽하고도 깔끔하게 안착한 그녀를 그가 품속에서 대번에 돌려세워 떨쳐내는 모습은 덕분에 보게 된 새로운 그림이었다. 다시 한 번 달려드는 2차 시도에서는, 아예 한 팔을 높이 올려 가드하는 그를 보았고. 완벽한 철벽이 되어. ㅋㅋ 차가운 주인님이셨는데 왠히 귀엽기도.


7. It’s Over
오케스트라가 어찌나 내달리는지, 그간은 제대로 인지할 틈조차 없었던 순간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다시 보았다. ‘총알에 피격되는 순간의 그’. 초연 프레스콜의 사진을 기억한다면 여기서의 그가 얼마나 그림처럼 아름답게 비틀이며 땅을 짚는지 알 것이다.

오늘 역시 내달리는 오케스트라의 박자에 맞추어 쏜살같이 흘러가는 것은 같았으나, 시작과 마무리의 동작이 분명하였던데다 알맞은 각도여서 짧은 찰나라도 충분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생각할수록 드라큘라에는 참 많은 것이 있다. 울음으로 번지는 감성, 황홀함을 선사하는 몸놀림, 강약을 한데 버무린 박자의 노래와 아름답고도 순결한 소리, 고혹적으로 치명적인 유혹, 처절하게 애절한 몸부림까지. 이런 ‘그’의 드라큘라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8. Train Sequence
1층에서도 트레인 시퀀스에서 눈이 맞았던가? 초연에서는 이런 기억이 없다. 무대, 미나가 선 곳이 아닌 다른 아래ㅡ그러니까 좀 더 관객석에 가까운 아래를 훑어 보는 모습은 기억에 없어. 그런데 오늘은 그랬고, 덕분에 그 눈을 보았다. 플라잉 관 속의 그와의 눈맞춤이라니. 색다른 기분.


9. At Last
28일, 동상을 스쳐 가는 찰나의 눈물기 어린 눈을 보았었다. 오늘은 달랐다. 흘긋이는 시선이 아니었다. 젖은 눈이 동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한동안 그 상태로 멎어있었다. 두 눈이 촉촉한 일렁임을 거듭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이었다. 질끈, 감겨든 것이. 살짝 고개를 가로젓는 것도 같던 얼굴로 통흔이 스쳐 갔다. 고통, 번민, 포기와도 같은 것들. 동상처럼 두 사람이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으리란 걸 안다는 얼굴이었다.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로 굳어버린 동상과 같이는, 절대로.

그렇게 시작부터 찌르는 아픔을 선사한 오늘의 앳 라스트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아이처럼 서럽게도 울던 그녀. 그녀가 아이처럼 울먹일수록 그는 죽음을 향해 스스로 걸어가야 한다. 그래서 오늘의 걸음걸음이 너무 아팠다. 죽음으로 직진하면서도 그녀 걱정에 마음 쓰는 저린 얼굴이 슬펐다.

그 누가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의연한 것처럼 보였다. 결심을 굳힌 듯 비장하여 단단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그가 울음은 섞였으나 흔들림은 없이 말했다. 내게 밤을 허락해요. 나는 괜찮으니, 안식을 줘요.

그녀 때문이다. 그녀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럽게 울어서, 그의 몫까지도 전부 그녀가 울어버려서 그는 마음 편히 울음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어르고, 달래고, 안아주고, 보듬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덜덜 떨리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지금의 내 삶은 그저 고통일 뿐이니 구원의 끝맺음을 허락해달라고,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매달리듯 안겨오는 그녀를 마주안으며, 작별의 포옹을 나누며 괜찮다고, 고맙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눈으로 입으로 노래로 속삭이는 사랑의 말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남은 생의 전부를 남김없이 그녀를 위하여 쓰겠노라 작정한 사람처럼 그렇게. 칼을 맞아 관으로 박혀들듯이 스러진 몸으로는 자신의 고통을 가누지 못하여 마지막 한 팔을 그녀에게 뻗어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면서..

남겨진 그녀의 머리로, 어깨로 고독하게 내려닿는 눈마저도 그였다. 소멸하는 그의 영혼이 그녀에게 건네는 마지막 위로. 사랑과 감사의 인사.

헌신적일 정도로 지독한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