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돌아왔다.

아니, 돌아왔다고 하기에는 초면의 예의를 갖춰야 할 것 같은 죽음을 만났다. 기합을 줘서 올린 검은 머리, 붉은빛 입술. 돌아온 매니큐어. 조명이 닿을 때마다 명멸을 거듭하는 귀걸이와 이어커프. 골반과 허벅지에 딱 달라붙은 바지, 가슴을 완전히 풀어헤쳐 놓은 시스루 셔츠. 오른 소매만 길게 나풀거리는 짙은 빛 코트.

프롤로그에서 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걷는 그가 붉은 입술로 빙긋이 웃어 보였을 때, 정면을 똑바로 보는 깊은 시선과 눈이 맞았다. 그가 웃었다. 붉은 입술이 그리는 미소의 타격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의 잠에서 깨어난 듯 노곤한 얼굴이 초연의 기억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미소를 그려넣는 붉은 입술의 그는 초연과는 또 완전히 달랐다. 엘리자벳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등 위로, 그녀를 향해 뻗은 두 손마저도 같은 듯 달랐다. 제각기 각도를 비틀어 꼬은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가 멎고, 초상화 속 얼굴을 그러쥐다 멎고, 가능한 한 뻗어보다가도 흠칫했다. 시간이 감겨들어 먹먹하게 느껴지는 동작들을, 그러다가도 붉은 입술이 미소를 그리며 아무것도 아닌 양 쳐낼 때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이제 시작인데,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죽음의 일면을 알 것만도 같았다.

외줄 타기 중에 떨어진 엘리자벳을 품에 안은 그를 보는 것은 또 얼마나 오랜만인지. 한 장면 한 장면 모두가 너무 오랜 그리움 끝의 재회였다. 상상하던 그림 속의 그였고, 그 상상으로부터 이탈한 현실의 그이기도 했다.

엘리자벳을 안은 그의 뒤쪽으로 주르륵 늘어선 죽음의 천사들 탓인지, 첫 만남은 초연보다 위압적이었다. 동시에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죽음의 신적인 면모를 부각하기에 좋았다. 무대장치가 반 바퀴를 돌아 죽음이 무대 중앙에 이르면, 그가 걸음을 옮겨 그녀를 내려놓는다. 자신의 무릎 위로 그녀의 머리를 눕혔던가. 이윽고 정신이 돌아온 그녀를 향해 죽음이 입술을 연다. '엘리자벳'. 너무나도 익숙한 음, 너무나도 익숙하게 흐드러지는 결이 많은 음. 이제 너의 차례라며, 그녀의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가사와 함께 그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을 때 다시 그와 눈이 맞았다. 두 눈을 부릅뜬 그의 눈동자에 망설임이나 인간적인 빛은 없었다. 소년스러운 장난기도 없었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듯이,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는 즐거운 듯이 엘리자벳에게로 되돌아간 얼굴이 그녀의 입술을 향해 그대로 나아갔다가, 코앞에서 멎었다.

이렇게 먼저 얼굴이 (혹은 입술이) 다가서는 장면이 많았다. 죽음이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한 번씩은 있었다. 마지막 춤에서도, 침대 위에서도,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도, 전염병과 그림자는 길어지고에서 뿐만 아니라 어린 루돌프와의 첫 대면에서조차도. 어린 루돌프의 침대에 사뿐히 내려앉으며, 몸을 떠는 아이에게로 당장에라도 입을 맞출 듯이 다가서던 얼굴이 멈칫한 동인은 연민이 아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이 설레설레 미소를 그려넣는 옆얼굴에는 인정도 사정도 없었다. 그의 죽음을 거의 처음으로 냉혹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입술을 가져다 댈 때의 그의 턱선, 살짝 벌린 입술의 틈, 패인 뺨이 너무나 섹시해서. 그 입술 위에서 빛나는 붉은빛이 너무나 유혹적이라서 매번 심장이 철렁한다. 입술을 들이미는 동작도, 멈칫하며 서서히 멀어져가는 동작도, 때로는 불시에 얼굴을 거두어들이는 동작도 모두 미끄러지듯 유연해서 꼭 죽음 안에 내재된 동물적인 본능을 보는 것 같았다.

다시 엘리자벳과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자면, 그를 멈추게 한 '알 수 없는 마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죽음이 예고한다. 네 스스로 나를 찾게 되리라. 앗아가는 대신 불러들이는 편을 택한 그가 천천히 그녀로부터 멀어져 간다. 그러나 모습을 감추지는 않는다. 어둠 가까이에 몸을 숨긴 채 끝까지 엘리자벳에게로 시선을 둔다. 암전될 때까지 웃는 듯 아닌 듯 그의 미간에 약간의 주름이 잡혀 있다. 그 순간의 그가 남긴 잔상이 내내 마음에 감돌았다.

도입부의 반주가 극을 관통하는 특유의 침잠하는 느낌과 꽤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었던 사랑과 죽음의 론도는, 결과적으로는 좋았다. 엘리자벳의 결혼식에 죽음의 종을 드리우며 사납게 웃는 모습이나, 침대 위에서 그녀를 꾀어내려는 죽음의 동인, 무엇보다도 루돌프의 장례식에서 매몰차게 엘리자벳을 내밀어 버린 죽음의 행동이 론도를 통해 하나의 인과관계로 맞물렸다. 론도가 없었던 초연에서는 이 모든 인과를 죽음의 연기와 노래를 통해 상상할 여지를 주었다면, 재연에서는 극에서 모두 풀어 설명해준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더불어 죽음이 엘리자벳을 그녀의 존재 자체로서-영혼이든, 여자로서든 그 자체를 갈망하고 있음을 훨씬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기껏 삶을 줘도 그녀는 죽음을 떠난다. 그리고 죽음은 화가 났죠, 차인 거니까. 그녀의 결혼식장에 종치기로 모습을 드러낸 죽음이 사납게 웃으며 허공을 마구 휘젓는데, 줄을 잡은 한 손으로만 몸을 지탱한 채 어찌나 자유자재로 그 위에서 움직이는지.. 능숙하고 세련된 몸놀림이 그답기는 했지만 순간적으로 너무 위험하게 느껴져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간에 두 손으로 줄을 잡고 몸 전체를 마구 비틀어가며 분노를 표현할 때는 입이 떡 벌어졌고...

아, 프롤로그에서의 가사 중 '차갑고 냉혹한' 그를 엿볼 수 있는 변화가 중간에 하나 있었다. 잡혀 온 아들의 구명을 비는 어머니에게 눈길도 주지 않던 그는, 무대의 최정점에서 오로지 죽음을 내릴 순간을 기다린다. 인간사가 그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이란 없다. 죽음의 순간이 확실히 정해지면, 죽음을 줄 뿐이다. 초연처럼 즐거워도 보이던 얼굴은 없다. 일상과 같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집행의 수순만이 있을 뿐이다. 죽을 자를 삼킨 롱코트 위로 그의 무던한 얼굴이 어둠 속에 잠긴다.

그리고 마지막 춤.

아, 마지막 춤은 언제나 왕자님 같은 곡이다. 그의 죽음의 시작점과 끝점에 놓인 상징성을 지닌 곡이다. 브릿지에서부터 시작되는 그의 옆걸음, 공기를 헤치는 부드러운 팔. 우아한 고갯짓과 음영까지 연기하는 미간의 주름.

아아, 그다.

옆으로 걷는 그의 곧은 다리를 보는 순간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일 년 만에, 죽음만의 공간으로 그가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그가 왼팔을 가슴께로 올리더니, 가볍게 꺾어 엘리자벳을 향해 인사했다. 처음 보는 모습. 옅은 숨소리가 몇 걸음 더 지상으로 다가온 그로부터 흘러나왔다. 꿈에서도 보았던 익숙한 숨결.

지상으로 내려온 죽음은 놀라우리 만치 뇌쇄적이었다. 붉은 입술이 프롤로그에서처럼 새빨갛게 웃었다. 짙은 눈가가 고혹적으로 일그러지며 웃음이 순식간에 생겼다가, 없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초연의 그가 웃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때도 이처럼 날래게도 웃었다가, 사악하게도 웃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색하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뭘까. 뭐지. 분장 때문일까? 훨씬 더 가차없는 그의 모든 움직임 탓일까? 색기라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위험한 분자로만 이루어진 페로몬이 그를 온통 휘감고 있었다. 그뿐인가. 무대 앞쪽 가까이 나와 춤을 출 차례가 되어서는 자신의 배에서부터 허벅지를 쓸어내리던 농염한 손짓. 팔을 쓰는 안무와 유기적으로 이어지며 가슴을 훑어 내리던 오른손..

음미하는 듯한 걸음걸이는 고양이보다는 이제는 표범의 것과 흡사했다. 살랑살랑, 때로는 장난스러웠던 느낌에서 악랄한 치고 빠지기가 강화되었다.

치밀하면서도 섹시한 매력에는 바뀐 안무도 큰 몫을 했다. 손목을 휘둘러 엘리자벳을 끌어 왔다가, 빙그르르 돌리기도 하고, 저 멀리로 내치기도 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가서서 잡아먹을 듯이 얼굴을 가져다 댄다. 새 신부를 거의 가차 없을 정도로 휘두른다. 멋있다. 손바닥에 착 감겨드는 조종술. 멋있고, 섹시하다. 망설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조종하는 손과 내립뜬 두 눈의 시너지가 짜릿할 정도로 크다. 모든 운명이 그의 손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이 명명백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마무리는 언제나와 같이 브릿지 위에서, 엘리자벳을 향해 내던지듯 꽂은 시선과 함께 거품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가 긁어 내지르는 소리로 맺었다. 혹시나 고정 안무로 추가될까 싶었던 프란츠 요제프를 의식하던 동작은 없었다. 대신 엘리자벳 본 공연에서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꺾는 애드립이 있었다. 우왕.

행복한 종말에서 정체를 드러낼 때는 과격해졌다. 펼쳐 보고 있던 신문지를 순식간에 반으로 탁 탁 접어 탁자 위로 홱 내리꽂곤 정면을 보고 있던 얼굴을 격하게 틀어다가, 말 그대로 루케니를 향해 꽂는다. 퇴장할 때까지도 연기한다. 고개를 위로 젖혔다가, 그 젖혀진 옆얼굴이 사르르 미소를 그렸다가, 피곤함을 털어내는 것처럼 어깨와 고개를 으쓱으쓱하기도 했다가. 세상만사가 그에게는 딱 그 정도 의미일 뿐이라는 듯한 제스처다.

대망의 침대 위에서는. 여전히 몸을 폭삭 누인 채다. 가슴 역시 훤히 풀어 헤쳐진 상체가 언뜻만 보아도 탄탄하다. 자켓을 벗어 훤히 드러나는 몸의 라인은 누워 있어도 숨겨지지 않는다. 길게 뻗은 다리를 발목 즈음에서 꼬아놓고, 편안한 자세로 잔뜩 이지러진 그가 속삭이듯 그녀를 부른다. 공기처럼 몸을 일으켜 또 한 번 부드럽게 그녀를 불러본다. 본능적으로 그에게 이끌려온 엘리자벳의 얼굴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오고 둘의 입술이 거의 맞닿을 듯한 순간 그녀가 멀어진다. 채 앗지 못한 입술과 그녀의 생명에, 침대로부터 몸을 일으킨 그의 입매가 미세하게 으르릉, 일그러진다. 내내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얼굴에서 보였던 유일한 균열이었다.

한숨처럼 내뱉은 '이겼어'로 서막을 연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가장 그리웠던 건 원을 그리는 그의 움직임이다. 엘리자벳과 대치하며 그가 그리는 원은 언제나 팽팽하다. 팔을 뻗으면 닿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 다가설 듯 물러날 듯 긴장을 주무른다.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그리고 마치 그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선사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죽음이 그녀에게로 감겨든다. 초연 때도 너무나 사랑했던 V자형 군무로 엘리자벳을 몰아세웠다가, 그의 손짓 한 번에 죽음의 천사들이 그녀의 주위로 엉겨든다. 엘리자벳은 제법 앙칼지게 그들을 쳐내며 거부한다. 얼굴께로 다가온 죽음의 손도 쳐낸다. 튕겨 나온 자신의 손등에 빠르게 눈길을 주는 죽음의 시선에는 동요가 없다. 이런 주고받기조차 죽음이 정해 둔 강약의 조절 속에서 엘리자벳에게 허용된 반항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순간이다. 결국 무대 오른쪽 가장까지 밀린 엘리자벳이 최후의 손짓으로 죽음의 천사들을 물리고, 다가선 죽음을 마주하면. 엘리자벳과 죽음이 함께 같은 음, 그러나 다른 가사로 나란히 끝 음을 긁어낸다. 내가 결정'해!' 이 끝 음에서 죽음이 질렀던 캬악 소리가 귀를 매섭게 때렸다.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도 마지막 춤에서처럼, 엘리자벳을 앞에 두고 죽음이 뒤에서 두 팔을 펼쳐가며 조종하는 듯한 안무가 있었다. 그때 죽음이 정면에 바로 둔 시선과 다시 한 번 눈이 맞았다. 론도에서도, 그림자는 길어지고에서도 그랬지만 정면을 또렷하게 응시할 때의 죽음은, 객석을 본다기보다는 허공 어딘가의, 자신이 점지해둔 미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정면을 향한 부릅뜬 눈동자가 다가올 운명을 정확하게 낚아채곤 끌어당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의사 선생님으로 등장할 때의 의상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모자의 오른쪽 챙을 살짝 접어 맵시를 더했고, 코트에도 라인을 넣었는지 몸매가 제법 드러났다. 이래서야 원, 죽음임을 숨길 수가 없잖아요. 반면 쓰려져 있는 엘리자벳을 휘감는 끈끈한 움직임은 여전했다. 닿을 듯 말 듯한 그 거리감의 조절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그가 연구하여 만들어 낸 이 모든 동작, 모든 디테일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을 확인했다. 스산한 웃음과 숨소리가 뒤섞인 낮은 대사도 그대로였는데 다만, '아마도 남편에게서' 부분의 대사를 할 때 '아마도'에 유달리 섞여든 웃음기가 얄미울 정도로 좋았다.

코트를 벗고 정체를 드러낸 죽음과 엘리자벳이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안무가 짤막하게 추가되었다. 그는 당기고 엘리자벳은 벗어나려 하는 그리 길지 않은 동작이었는데, 안무보다도 이때 그의 전신이 출렁이며 만들어내는 리듬에 시선을 빼앗겼다. 코트를 벗어 몸에 달라붙는 의상이 그대로 드러나니, 눈을 도대체 어디에 두어야 할지... 이때의 걸음걸이는 또 왜 유난히 몸매를 돋보이도록 어슬렁어슬렁한지. 딱 하나 예상치 못하게 귀여웠던 건 오른 소매가 손을 끝까지 덮고 있었던 것 정도.

그리고 바야흐로 돌아온 흑토드의 주전공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시작은 매섭도록 달콤하게, 선명하게 그려지는 빨간 웃음이 때가 왔음을 알린다. 친구라고는 하는데, 그다지 친구 같지는 않다. 시기가 도래하여 계획한 일을 이행하게 될 수 있음을 기뻐할 뿐, 인정 같은 것은 없는 얼굴이다. 황태자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나면 서서히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약~속'을 부르면서는 계단 위로 거의 몸을 눕히다시피 한다. 기울이는 정도를 넘어 두 팔로 난간을 가득 거머쥐고, 몸을 아래로 떨어뜨릴 듯이 난간에 대고 굽히는데 그 격한 움직임에도 시선만은 정확히 루돌프에게 꽂혀있다. 몸 전체를 쓰는 그림자는 이후로도 계속된다. 뜻대로 착착 감겨들지 않는 루돌프를 거칠게 끌어당기는 동작에서부터, 나비처럼 손짓하며 루돌프를 꼬여내는 특유의 동작에서는... 허리를 완전히 젖혀 몸이 거의 C자가 되다시피 하는데, 와 그 곡선. 그러면서 어떻게 앞을 향해 손을 뻗고, 그 뻗은 손은 물결치듯 루돌프를 향해 나빗짓을 하는지. 교태로우면서도 남성성 또한 잃지 않은 양 갈래의 매력에 두 손을 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루돌프의 몸을 쓰다듬는 동작에선 (이때 루돌프의 가슴에 얹은 손에 조명이 반사되어 핏빛 네일이 아주 또렷하게 보여서도 참 좋았다) 상대를 어찌나 스산하게 감싸 쥐는지 연기 내지는 검기, 혹은 검은 오로라를 보는 것만 같았다. 뜻대로 착착 감겨들지 않는 황태자를 윽박지르듯이 잡아당기다가도, 순순히 안겨오면 부드럽게 스르륵 휘감아주고. 당근과 채찍을 쉴 틈 없이 번갈아 쓰는 그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손가락의 섬세함도 일품이다. 계단 난간을 그러쥘 때나, 루돌프의 어깨에 손을 얹을 때나 결코 한 번에 턱하고 올려놓지 않는다. 다섯 손가락이 순서대로 차르륵 감겨들며 부드러움을 과시한다.

마이얼링에서는 앉은 채로 등장한다. 명불허전, 마이얼링에서의 걸음걸이. 몸매. 그런데 왜 이렇게 짧죠? 가지마요 왕자님을 듣지 못하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마이얼링이 반 토막이 나다니. 연출자는 극을 만들기만 하고 감상해본 적은 없는 사람인가.... 아, 그런데 이때 너무도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던 것이 있었으니 그의 골반에 수 놓인 장식? 무늬? 꽃 같기도 하고 태양 같기도 한 그것이 너무나 정확히 골반께에 있어서 순간적으로 웃음이 났다. ㅎㅎ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마이얼링이지만, 다행히 루돌프와 죽음의 입맞춤을 하기 전 가장 위압적이면서도 가장 섹시한 장면의 죽음은 볼 수 있어 기뻤다. 음악이 고조되면서 죽음의 천사들이 그를 무릎에서부터 들어올리는 바로 그 장면. 그때 그 정점에 서서 총을 하늘로 들어올리는 그는, 팔이 이루는 각도까지도 참 고압적으로 아름답다. 아아, 퇴장하면서는 등장하는 장례 행렬을 잠깐 바라보았다. 멀기에 가시는 거죠~ 하면서 퇴장할 때도 잠시 멈칫하며 뒤를 보고 웃었던 게 기억난다.

추도식에 모습을 드러낼 때 더는 상복을 입고 있지 않다. 초연의 검은 코트가 장례식과 아들을 잃은 엘리자벳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내지는 자비심처럼 다가왔었기 때문에 재연에서의 죽음의 무자비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제 발로, 스스로 그를 원하는 엘리자벳을 뿌리칠 때도 초연 후반부에 보여주었던 혼란과 아픔의 감정은 없다. 문맥 그대로 이렇게는 네가 싫다는 거절에 가깝다.

이윽고 순백의 두 연인이 재회했을 때, 엘리자벳을 끌어안는 죽음의 동작이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마침내 죽음에게로 날아든 그녀의 늘어진 몸을 안아 들고, 정면으로 다가오는 그의 시선에 감정이 무량히도 요동쳤다. 그는 미세하게 떨리는 눈빛을 정면에 두었다가, 찌푸려진 미간을 뒤로 젖히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젖힌 고개 덕에 바로 보이는 턱이 고집스럽게 닫혀 있었다.

 

그렇게 첫날의 막이 내렸다.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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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15

아, 맞아. 침몰씬에서 루케니 지금이야! 하기 전에 단도를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 감추는데, 손등이 아니라 손바닥 쪽을 객석을 향하도록 하고 노래하는 바람에 손 안에 단도를 감춘다고 감췄는데도 계속 보여서 ㅋㅋ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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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15

이지훈 루케니는 머리 스타일부터, 목소리 톤까지 용케니를 떠올리게 했다. 용케니의 스타카토 밀크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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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16

당신처럼 등에서 바뀐 어린 시씨의 의상은 초연보다 재연이 훨씬 낫다. 덜 서커스 단원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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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lis

13.08.16

마리오네트 연출이 루케니에서 죽음의 천사들이 하는 것으로 바뀌고, 루케니는 지상에서 설명만 도맡는 것으로 변경된 것도 좋다. 극 중의 모-든 사건이 죽음의 손안에 있음을 훨씬 더 와 닿게 해준다. 죽음의 절대성이 더욱 부각되어서도 좋고.

같은 맥락에서 행복한 종말에서 죽음의 천사들이 종업원으로 일할 때, 카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죽음을 발견하면 간단한 경례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아줬음 좋겠다. 그 장면이 참 깨알같고 좋았는데, 재연에선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Lucy

21.04.03

정말 대담하죠..단도를 드러내면서까지 팔에서 손끝까지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선을 선택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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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21.04.04

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글이네요. 새록새록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