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토드. 

붉은 네일. 산주 없이도 육안으로 구분될 만큼 또렷한 핏빛이었다. 작은 손에 핏방울이 망울망울 다섯. 그 손을, 오늘따라 유난히도 세심하게 다뤄주었다. 마지막 춤에서 넘어진 엘리자벳을 향해 빙그르 원을 그리며 내밀어 지던 손, 계단 꼭대기에서 루돌프를 향해 부드럽게 다가서던 손. 손을 내미는 동작 자체는 항상 같되,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내밀어 질 지는 노래와 연기의 흐름에 따라 매번 자연스럽게 바뀌고 조절되는 것이 그답다. 그에게 있어 연기와 노래는 매 순간 그가 창조한 샤죽음을 표현하는 매개로써 그 안에서 자유자재로 융화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언제나 경탄스럽다. 

가볍고 날래 보였던 프롤로그는, 베일을 생각나게 했다. 이상할 정도로 시작과 끝이 함께 느껴졌다. 그의 가슴을 뜨겁게도 하고 얼핏 아프게도 하는 것 같은 사랑이란 감정에서 오늘 그가 맞이할 베일에서의 표정이 벌써부터 보이는 것 같았다. 신기한 경험. 아, 시아준수는 하물며 이제는 시간을 조율하기도 하는 것인가.. 

오늘의 그는 부드럽고 자비로웠다. 현혹되는 것이 당연할 정도의 자비로움. 때로는 자애로움.

론도의 그가 그랬다. 엘리자벳을 향한 감미로운 얼굴에 다사로워 이질적인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를 가상히 여기는 듯도 한 부드러운 미소에 곧은 울림을 간직한 저음의 시너지란! 초록빛이 반사되어 빛나던 귀걸이까지 합세하여 그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했다. 원형 무대 위에 혼자 앉은 엘리자벳 위로 쏟아지던, 그녀의 둘레를 따라 경계선을 그려내는 것 같던 녹빛 조명은 죽음의 슬하에 휘감긴 생명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죽음의 안에서, 죽음이 기약하는 소리에 응답하는 작고 여린 새. 자신의 그늘 아래에서 키워갈 전리품을 바라보는 그의 지긋한 시선이 너무도 좋았다. 시아준수는 단순하게 '빤히 바라보는' 연기조차도 매 순간 다르게 표현한다. 때로는 탐미적이고 때로는 집요하며 때로는 즐거워 보이기도 하는 여러 갈래의 감정이 '바라보는' 한 가지 연기에서 비롯된다. 아, 한 가지 공통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시선을 고정하고 집중할 때의 그가 온몸으로, 모든 소리로 전달하는 아름다움의 크기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정도가 항상 일관된다는 것만이 같다.

마지막 춤은 두 번(!)의 숨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하는 나른한 긴장감. 그의 강림을 알리는 고유의 청각 신호는 언제나 신경을 곧추세운다.

지상의 땅을 밟은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엘리자벳의 코앞까지 다가서 보는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 조금의 멈춤도 없이, 꼭 시작부터 입을 맞출 것처럼 직진해 그녀의 얼굴로 스르륵 돌진하던 얼굴에 놀랐다. 달려들었다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달려듦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분하면서도 빠른 보폭이었다. '걸음'이었는데도 돌진한다는 인상을 준 까닭은 그 걸음걸이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서였던 것 같다. 망설임은커녕, 내가 내 것에게로 향한다는 마땅하고 당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녀에게로의 직진 이외의 다른 길은 없는 것처럼 곧장 다가섰다가, 딱히 취할 마음은 없다는 듯, 그저 존재를 확인할 뿐이라는 듯 입술이 닿기 직전에 물러서던 그의 치고 빠지기는.. 와, 그 성큼성큼 걷던 순간의 공기가 너무도 팽팽해서 자릿하기까지 했다. 엘리자벳이 그를 거부할 수 없으리란 걸 확신하는 걸음걸이가. 그녀의 거부조차도 어디까지나 그의 용인하에 이루어지고 있을 뿐임을 말해주는 것만 같던 보폭이.

나와 함께~ 직후 웨이브 직전에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손은 또 볼때마다 어찌나 좋은지. 농염하고 위험한데 중독적이기까지 해서 이제는 없으면 섭섭할 것 같다.

공긴 습하고 '탁'해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대신(대신이란 말이 적절치 않은 것 같긴 하지만) 직전에 목을 조르던 안무와, 탁해에서 손을 그러 모으며 엘리자벳을 끌어오는 안무의 어우러짐이 환상적이었다. 그의 동작은 유기적이고 앞뒤가 자연스럽고도 빈틈없이 맞물려 있다. 

앞서도 말한, 넘어진 엘리자벳을 향해 내밀어 졌던 손의 디테일도 너무나 좋았다. 빙그르르 한 바퀴 원을 돌리며 내밀어 졌던 손. 그에 깃든 부드러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회유의 동작이다. 자석에 이끌리듯,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것 같은 엘리자벳이 홀린 것처럼 그의 손안에 자신의 손을 포개면 그녀의 손을 마저 거머쥐는 손가락에 단단한 힘이 실린다. 손을 내밀 때만 해도 부드럽고 자애롭기까지 했는데, 막상 엘리자벳이 그의 손을 마주 잡자 그녀를 일으키는 동작에 실렸던 힘은 화들짝 놀랄 정도로 거칠고 드셌다. 사소하고도 순간적인 부분에서 발휘되는 강약의 조절마저도 연기의 느낌이 없이 자연스럽다.

브릿지로 돌아가기 전, 뒷걸음치면서는 허리를 한껏 숙이고 엘리자벳을 향해 검지로 꽤 오래 손짓했다. 마치 소리 없는 웃음처럼, 관성에 의해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처럼 한참을 기억하라는 듯, 명심하라는 듯 그녀에게 자신을 주입하는 듯한 자세와 그 순간 그의 집요함이 낯설고도 신기했다. 그 후 그가 브릿지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죽음의 천사와 잠시 부딪히는 바람에 잠깐 버벅였던 건 오늘의 스페셜 에피소드. 

1막의 그림자는 길어지고에서의 그의 노래는, 엘리자벳을 향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운명에게 건네는 말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속세와 속세가 아닌 곳 양쪽에 걸쳐 존재하는 그에게만 보이는 생사의 회오리 같은 것이 있는가, 했다.

행복한 종말에서는 박은태 루케니가 손님으로 위장한 그를 발견하고 제법 오래 어라? 하는 눈빛으로 응시해줘서 좋았다. 내내 보고 싶었던 장면이었는데 도통 보질 못했어서.

침대 위에서도 가탄의 빛을 보았다. 엘리~자벳을 부르며 노래 중간에 고개를 뒤로 빼더니 한껏 더 느즈러진 자세를 취하고는, 그녀를 가상히 응시하는데.. 아.. 엘리자벳은 대체 그런 그를 어떻게 버텨내는 거죠..? 엘리자벳이 용케 거절할 때의 표정에서 호오? 싶게 꿈틀거리던 미간에 분노의 기색이 크지 않았던 것도 오늘의 그가 얼마나 나긋하고 부드러웠는지를 말해준다. 그래,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괘씸하긴 한데 화를 내진 않는다. 그가 용인할 수 있는 선에서라는 듯, 어디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라는 듯 다가서려다 멈추어 선 그가 끈질기게 그녀를 응시한다. 호기심 내지는 구미가 더욱 당기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둠 속에 완전히 잠긴 다음 퇴장하던 걸음걸이에서 묻어나던 정색도 아름다웠다. 어둠 속의 그를 찾는 게 왜 이리도 좋은지.


그리고 오늘 가장, 가장 좋았던 내가 춤추고 싶을 때.

독수리 상 위에서의 그의 말쑥함이 좋아 바라보는데 그를 향해 승리했다고 말하는 엘리자벳을 향해 그가 지어 보인 표정이, 아,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가상히 여기는 자비로운 미소에는 대견함도 있었고 다소간의 비웃음도 있었지만 살풋 그려지던 웃음은 분명할 정도로 인자했다. 자꾸만 지어지는 찰나의 미소 속에서 엘리자벳에게로 집중된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시작부터 전율이 일었다. 허공에서 부딪히던 두 시선의 팽팽함도 한몫을 했다. 주고받는 눈빛 속에서 나누어지던 그들만의 은밀한 미소와 대화가 유달리 다부졌다. 시작부터 그랬다. 두 사람의 합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맞물리고 있었다.

내가 결정해! 하면서 그가 끝음절을 세게 내지를 때, 김소현 엘리자벳도 그와 발맞추어 같이 고음으로 응대하는 것은 첫공부터 보아 온 것이지만 참 좋았다. 마지막 춤이 생명에 대한 죽음의 절대우위를 보여준다면 내가 춤추고 싶을 때는 그의 죽음과 그녀의 삶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극명하게 표현된 장면 중의 하나였다. 누구 한 사람도 튕겨 나갈 수 없게 대치하는 원이나, 그가 그녀의 뒤에서부터 세심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두 팔을 조종하고 감싸 안으려 들 때나, 내가 없이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거나 날 찾게 될 걸 하며 저돌적으로 그르렁대는 가사에서도 그렇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독수리상을 조종해 지상으로 내려온 그가, 엘리자벳과 원을 그리며 대치할 때 그에게서 울려 퍼지던 둥근 파동도 잊지 못한다.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의 그는 마지막 춤과는 달리 견고하고 단단한 원형 기둥 같은데, 둥글게 퍼지는 파동이 일조하는 바가 큰 것 같다. 그 둥근 울림 안에 갇히고 싶단 생각을 했다. 

곡 말미에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는 으르렁, 실룩이던 입술이 꼭 엘리자벳을 위한 한발 물러섬인 것 같아서 화를 표출하고 있는데도 애틋해보였다. 마지막에 엘리자벳에게로 회귀하던 얼굴과 고개의 각도도 특히.

어린 루돌프에게도 대단히 저돌적이었다. 키스하려고 다가설 때 무척 은밀한 동작으로 오~래 얼굴을 대곤 음미하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입술부터 들이대는 그는 여전히 냉혹했지만 물러나는 순간의 그에게서는, 그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건네는 루돌프를 잠시 보던 그에게서는 오늘따라 아이를 귀여워하는 것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전염병에선, 와. 여전히도 참 나쁜 남자. 아니 무서운 존재! 선악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는 그 너머의 실체로서의 그가 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방관자적이고도 즐거운 태도로 일관했다. 오늘도 무척 즐거워 보였는데, 심지어 진찰 도중 흫흫하고 웃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마지막 기회라며 그녀에게 선심 쓰듯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모습이라니.. 죽음님 너무하잖아요.. 싶다가도 곧바로 그의 몸매에 정신 못 차리게 되어 그를 더 탓할 수도 없었다.

오늘도 장한 엘리자벳은 친히 마지막 기회임을 인지시켜주는 그의 친절함에도 불구하고 뿌리치고야 말았는데, 그때 살짝 굳어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자신의 페이스로 돌아와 보여주었던, 그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네 선택이다 라는 것 같던 표정. 어떤 일이 생길지 그 스스로도 기대하고 있는 것 같던 얼굴에 분노보다는 기대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엘리자벳을 향한 감정에는 순순히 죽음을 택하지 않는 그녀에 대한 분노가 기저에 깔려 있기는 하지만 그 위로 기쁨과 조소, 바람과 박해, 자비와 심술, 기대와 배신, 즐거움과 같은 여러 감정이 다층을 이루고 있어 항상 다르고 새롭다는 인상을 준다. '죽음'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표정이 얼마나 다양하고 무궁한지! 

아아, 성병을 들어서도 좋았다. 말라디보다도 성병이 더 임팩트 있고 좋다. 성병을 발음할 때 그의 발음이 좋아서이기도 하고. 

그림자에서는 여전히 미소로 마중한다. 기억 나냐며, 자신을 상기시키던 순간 뒤로 빠지며 나른하게 풀어졌던 몸놀림부터 새로웠다. 이어 오늘따라 귀에 깊이 박혔던 난간 위의 약속'을'의 짙은 울림. 시작은 날카로우면서도 나긋했는데, 루돌프를 다루는 동작들은 여전히 거침없었다. 아니 때로는 유난스레 흉포하기도 했다. 생각대로 감겨들지 않는 루돌프를 격하게 잡아 끌어당길 때가 특히 그랬다. 루돌프의 저항이 거셌던가, 좀체 당겨오지 않자 두 팔에 실린 심이 육안에 포착될 정도로 도드라져서는 루돌프를 갈퀴 듯 움켜쥐고 거머당겼다. 그리고는 그 반동으로 떨쳐지던 손이란! 부들부들 떨리고 꺾이며 그에게 휘둘리던 루돌프의 저항은 빛도 보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승돌프와의 밀고 당기기가 문맥 그대로 읽힐 수 있었다면 삭돌프와는 일방적 희생양을 요리하는 느낌이 강하다. 주고받기보다는 일방의 밀어붙이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난간 위를 오르던 잘생긴 눈썹. 빚은 듯하던! 오늘따라 눈썹이 왜 그리도 잘생겼던지;

음모에서는 난간 위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동시에 방조했다. 루돌프의 행동을 지그시 바라보며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모양을 감상하던 얼굴이, 학살과 전쟁이란 단어에는 반응하여 생긋 웃었다. 내도록 무표정이었던 탓에 작은 입술의 빨간빛이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다시 등장할 차례가 되어 폭풍 앞으로 루돌프를 인도하기 직전 지어 보였던, 살며시 웃고 들어가던 얼굴. 즐겁지만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을 차례야 하는 듯이 설레설레. 약간의 아쉬움은 더 큰 즐거움을 위해 접어두리란 것 같던 몰인정함!

그렇게 즐거워 보였던 그가 정작 추도식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그조차도 예감하지 못했던 동요를 느꼈다. 그 어느 때보다 엘리자벳의 감정을 깊이 흡수하는 그를 보았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슬픔과 절망의 감정을 모두 들이키곤, 이것이 뭐지? 되묻는 듯했던 얼굴. 그 얼굴 속에 일어나던 약간의 혼란스러움과 싸우는 그를 보았다. 하지만 곧 어림없다는 듯 쳐내 지던 그녀의 감정들이 스스로에게 동요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죽음을 보는 것 같았다. 그에게 미처 완전히 흡수되지 못하고 공기 중으로 떨쳐지는 엘리자벳의 감정들이 그의 일갈과 함께 그녀에게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이때의 의상은 벌써 다섯 번째인데도 볼 때마다 의미심장하다. 초연의 추도식에서 그가 입고 있었던 검은 코트가 의사로서 등장했을 때처럼 보통 사람들 틈으로 섞여들어 엘리자벳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던 반면, 검은 코트를 걷어낸 그는 사람들 틈이 아닌 그 자신의 공간에서 엘리자벳을 위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본연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가 보여주는 일말의 혼란은, 그래서인가 더욱더 죽음 그 자체의 동요로 다가온다. '죽음'으로서의 그가 유일하게 그녀의 절망에 공명하여 흔들리는 순간이다.

질문들은 던져졌다는 특별할 정도로 쫄깃했다. 첫 가사인 '침몰하는 배'부터 장난 아니었다. 처음 듣는 순간 귓가를 쳐 내는 팽팽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광용 요제프와의 주고 받기도 탄력적이었지만 그 자신이 유난히 팽팽했다. 훌륭하십니다~의 비아냥거림은 재연 들어서 가장 차지고 귀에 박힐 정도였다. 완전할 정도로 당겨진, 팽팽하기 그지 없는 침몰씬이었다!

아, 기울어진 브릿지 위로 성큼성큼 등장하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을 똑바로 응시하던 얼굴도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만든 작품에 스스로 매료된 표정이었다. 침몰하기 직전의 위태로움에 홀린 것 같은 그는 언뜻 황홀해 보였다. 그러다 프란츠 요제프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고개를 돌리는 얼굴에선 기다리던 먹잇감을 발견한 기쁨이 흘렀다. 내가 만든 작품의 가장 크고 거대한 노획품. 산 제물의 값을 매겨보며 음미하는 것만 같던 몰인정한 얼굴! 소리쳐보았자 내 안의 세계, 너의 악몽일 뿐이라며 비웃던 그가 소름끼쳤다.

베일에서는 그보다도 내가 먼저 울컥했다. 오늘의 그에게 엘리자벳은 수단이라기보단 목적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 찬찬히 나타나는 복합적인 감정이 아릿했다. 그리고 프롤로그에서부터 예감했던 대로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평행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결코 만날 수 없는 그와 엘리자벳의 수평선을 마침내 당겨본 그가, 이윽고 깨닫게 되는 무상함에 내 마음이 다 공허해졌다.

재연의 그는 언제나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는다. 눈꺼풀이 감기기까지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그의 동요와 떨림이 눈빛이 잦아들며 더욱 혼탁해지고 무거워진다. 마침내 그가 눈을 닫아 거는 순간 모든 것이 땅 아래로 곤들어 박히고 만다. 그의 어깨마저도.

파열음처럼 튀는 실수가 군데군데 있었지만 스토리를 따라가게 되는 힘이 있는 공연이었다. 무엇보다 김소현 엘리자벳이 오늘로서 원전히 궤도에 오른 것 같았다. 처음으로 당신처럼이나 날 혼자 두지 말아요가 듣기에 불편하지 않았고, 완성된 면모를 보이는 그녀의 2막에는 특유의 응집력이 있다.

18일에 이어 좋은 공연이었다. 그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좋은 공연에 기뻤다.


(+) 키스신에서는 김소현 엘리자벳이 더 적극적인데, 보고 있으면 아 그녀가 진짜 죽음을 원하긴 했구나 싶다. 죽는 순간만. 하지만 그 마지막에서조차도 죽음 그 자체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는 느낌이 더 크기에 마음이 아프다. 어느 정도 그녀의 시선에서 그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마지막 순간의 엘리자벳은 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