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과 마찬가지로 내린 토드.
프롤로그의 강약은 날로 정교해진다. '마지막을 선사하지', '냉혹한 나를 잃은 채'. 높낮이와 부드러움을 달리하여 한 음 한 음을 섬세하게 퍼트려낸다. 론도도 마찬가지. 숨소리조차 내 안에 깊이 '박혀'의 눅신히 내려앉는 음이 꼭 깃털 같았다. 이 마력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박혀 오는 거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다는 단언에서 호기심은 물론, 낯선 감정과 조우하게 된 흥분이 피어올랐다. 잊지 마, 내가 곁에 있어. 거부하기 힘든 속삭임에 엘리자벳도, 내 마음도 흐무러졌다. 어둠이 내릴 즈음 상체를 뒤로 눕히며, 그림자에 기댄 채 짓는 미소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같이 은근하면서도 분명했다. 안으로 부드럽게 말려, 야릇한 곡선을 만드는 입술선이 어둠 속에서 빨갛게 빛났다.
론도와 그림자는 길어지고, 특히 그림자에서 온몸으로 맞을 수 있는 그의 울림소리는 참 황홀하다. 중간에 오케스트라의 속도를 의식한 것처럼 지상으로 곁눈질을 주었을 때조차도 멋있었다ㅎㅎ 그림자는 길어지고에서 그가 들이는 공이 커질수록 이 넘버가 갖는 음산함은 배가 된다. 어두운 대낮에 음울하게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처럼 엘리자벳의 머리 위로 그가 '죽음'을 흩뿌리는 것만 같은 순간이다. 실제로도 그는 이미 죽음을 닮은 절망을 그녀에게 주었고, 그것으로 인해 1차로 무너진 그녀를 보며 예고인지, 당부인지 모를 운명을 노래한다. 죽음을 바로 보기를. 그녀의 삶과 자유는 죽음과 맞닿아 있음을. 이때, 찰랑이는 죽음의 눈동자는 가사만으로는 다 전하기 힘든 앞날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참 좋았던, 언제나 참 좋은 마지막 춤. 시작은 한 번의 숨소리. 엘리자벳에게로 손을 내밀며 은근한 미소를 짓는다. 거절당하자 순식간에 미소를 거두어들이며 정색한 얼굴이 프란츠 요제프 쪽으로 아주 잠깐, 눈도장을 찍었다. 큰 내색은 아니었지만 요제프의 존재에 보다 자극 받은 듯, 으르렁. 그의 입술이 실룩였다. 살랑살랑하면서도 화를 눌러담은 걸음걸이가 지상에 안착하면 비로소 시작된다. 본격적인 마지막 춤.
디테일의 가감이 있을 때도 '미소 짓는 너' 직후의 고개 돌리기나, '나와 함께' 후의 가슴 쓸어내리기는 빠지지 않는다. 엘리자벳에게로 다가서 첫 입맞춤을 시도할 때는 검지를 쓰는 대신 몸을 완전히 밀착하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코가 닿을 거리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오만하게 빛났다. 이어서 포효하기 시작한 그는 과연 사랑하는 여인을 대하는 손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모질었다. 끌어오고 당기고, 밀고, 넘어뜨리고, 일으켜 세웠다가 밀쳐내고, 안았다가 떨쳐버리고. 마지막에 뒷걸음질로 물러날 때는 기존의 빙글빙글 대신 검지로 그녀의 눈앞을 콕콕 찍었다.
마지막 춤에서의 그는 분명 화가 났고, 언짢음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는 죽음 자신도 그 감정에 기꺼이 동조하며 엘리자벳을 조롱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엘리자벳을 다루는 그의 손길이 거칠수록 죽음만이 할 수 있는 위험천만하고 매혹적인 장난에 빠져들게 된다. 세차고 격한 손길은, 너를 이렇게 다룰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죽음의 암묵적인 강요와 확신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 그리고, 음. 사실 거칠수록 섹시하기도 하고 >.<
내가 춤추고 싶을 때는 오늘따라 그의 걸음걸이에 사로잡혀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원을 그리는 걸음걸이가 어찌나 황홀하던지. 불현듯 축구할 때의 그가 겹쳐졌다. 평소의 그를 떠올려보면 걸음걸이조차도 분명하게 계산된 연기인데 이렇게 숨 쉬듯 자연스럽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놀라울 정도로 사람을 매혹시킨다. V자 안무 대형을 갖추기 직전 약간 휘청했던 것조차도 안무 같았다. 대형을 갖춘 후 엘리자벳을 몰아갈 때는, 맨 첫걸음이 꼭 달려드는 것처럼 재빠르고 신속하여 독수리를 연상케 했다. 앙 다문 채 힘이 가득 들어간 턱에선 으르렁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이 넘버에서의 옥주현 엘리자벳은 항상 강하다. 조화를 위해 그도 자연히 강해진다. 강 대 강으로 맞부딪히는 절정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첨예하게 어우러진다. 내가 없이 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라며 포효하는 그의 목소리! 날 찾게 될걸!! 하며 할퀴어내는 고음! 생의 정점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엘리자벳이 그에게 꼬박꼬박 맞서는 기고만장함도 가경할 볼거리지만, 그녀가 그렇게 하는 대로 내버려 두면서도 '넌 내가 필요해'를 꿋꿋이 주입하고자 하는 그도 흥미롭다. 가사만 들으면 분명 그녀를 찍어 누르려는 것만 같은데, 주고받는 안무와 엘리자벳을 대하는 그의 다양한 표정을 보면 그녀를 꽤나 '봐주고 있다'는 또는 '받아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죽음과 엘리자벳의 관계, 죽음에게 있어 엘리자벳이 갖는 예외로서의 유일무이함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아아, 맨 처음. 이제는 인형이 아니라며 미소짓는 엘리자벳을 독수리 동상 위에서 내려다보는 죽음은 그녀를 가상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네가? 하며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신기할 정도로 복합적인 웃음. 입꼬리를 올려 웃는 베이스는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웃음마다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는지..
고양이를 쏘아 죽였다는 어린 루돌프를 바라볼 때의 표정은 기존의 무표정에서 조금 더 다양해졌다. 오호라. 먹잇감이지만 제법 맹랑한걸. 하는 듯이 몇 초간 빤히 바라보았다. 퇴장 역시 평소보다 흥청망청했다. 꼭 저 아이를 잡아먹을 미래가 기대되어 죽겠다는 듯이.
재연의 전염병은 초연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초연 때는 전염병이 이렇게 즐겁고 신 나는 넘버인 줄 미처 몰랐다. 여자로서의 엘리자벳의 인생을 파괴해놓고, 그것으로써 그녀와 자신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를 보는 것이.. 즐겁다. 정말, 보는 나조차도 순수하게 흥이 난다. 그밖에 기억 나는 것은 '이건 바로~' 하며 물러날 때의 손의 디테일.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는 간단한 동작이었는데 왼손의 엄지와 검지를 가위처럼 활짝 편 채로 두 손을 포갰다. 두 손을 풀어낼 때도 유지되었던 그 가위에서 손끝 처리 하나에도 세심한 그를 느꼈다. 오른손과 완전히 분리되어 떨어진 후에도 한동안 가위 모양을 유지하던 왼손이, 연기처럼 서서히 가위 모양을 헤쳐내며 곧게 펴졌다. 죽음의 모든 동작이 이런 식이다. 날래면서도, 쉽게 떨치기 힘든 여운을 남긴다.
어김없이 미소로 마중한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는, 늘어진다는 느낌을 주었음에도 좋았다. 우선 계단에서 내려오던 그의 걸음걸이. 오늘 왜 이렇게 유독 하반신의 움직임을 쫓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자꾸만 그의 보태에 시선이 갔다. 그가 동선, 숨연기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직접 디테일을 지칭한 이후로 모든 것이 새롭고 각별하게 주목되기 시작했는데 걸음걸이도 그중 하나였다. 흥청망청한 취객의 것이 되다가도 금세 기품을 찾고, 또 곧장 살랑이는 변화무쌍한 품을 보며, 그냥, 새삼. 죽음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참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통일된 큰 바탕 그림 안에서 매일매일의 디테일과 표현이 새로워지는 그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생각이고 계산이며,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본능 또는 즉흥인 걸까. 도무지 그 구분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없는 자연성이 놀랍고, 신기했다.
나빗짓으로 루돌프를 꼬여낼 때 손을 풀어내는 동작이 물안개처럼 유연하고 아련했던 것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을 접어 나빗짓을 하는 순서는 어제와 달리 새끼손가락에서부터 검지로 순서대로. 다만 손가락을 모두 접고 나서 다시 반쯤만 손 전체를 갈퀴처럼 오므려 펴곤, 줄을 당기는 것처럼 팔 전체를 안으로 끌어당겨 루돌프를 견인하는 새로운 동작이 있었다. 계단으로 올라서도 '무너지는 이 세상'까지 부른 후 루돌프를 잠깐 돌아본 다음, 또 이어서 견인하듯 계단을 마저 올랐다. 루돌프와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을 당겼다가 느슨히 풀었다가 하는 것처럼 부추기고, 끌어오고, 농락하는 디테일이 치밀하도록 세심했다.
이어지는 절정, 계단이 회전하는 동안 가장 귀에 박혔던 소절은 '너만이!!' 였다. 귀를 할퀴는 음성이 갈고리처럼 꽂혔다. 생채기를 낼 것처럼 강렬하게.
전쟁과 학살에 반응하여 아이처럼 웃는 얼굴은 봐도 봐도 좋으니까 볼 때마다 써야지. 이 단어에서 분명하게 반응하는 그가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새빨간 입술과 전쟁, 학살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
요즘은 마이얼링에서도 옅게 웃는다. 시작부터, 가볍게 웃었다가 무대 왼쪽으로 걸어가서도 마저 조금 웃는다. 다만 오늘은 유독 무대 위가 온통 어둡고 까만 가운데 새하얗게 빛나는 그의 살빛이 눈부실 정도라 넋을 잃고 보았다. 그야말로 창백하게 하얗고, 나락처럼 어둡고, 고통과 같이 새빨간 미혹의 존재로서의 그였다. 최후의 순간이 되었을 땐 그르렁, 맹수처럼 입을 벌려 죽을 자를 머금었다. 어제와 같이.
추도곡은 담백하고 신속한 마이얼링과 대조되는 만큼 극적이다. 그도 미처 예상치 못한 절망의 계곡으로 잠겨드는 엘리자벳을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보다 감아버리는 눈꺼풀. 다시 그녀를 보고, 어루어 만질 듯 손을 뻗어도 보지만 닿지는 않는다. 그는 연기 위에, 그녀는 겨우 지상 위에. 그들의 간극은 그를 휘감은 청록빛 조명의 광채와 엘리자벳을 둘러싼 어둠의 차이와 같이 아득하다. 그가 의도한 끝은 그녀가 목전한 절망이 아니다. 그는 결국 외면한다. 찬주하는 것도 같다. 그녀로부터, 또 어쩌면 그 자신으로부터. 꼭 U자 모양의 곡선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친다. 가..
마음을 무겁게 하는 베일. 다문 입술이 비장했다. '끝'이 내포한 의미를 이해한 것만 같은 얼굴에서 각오의 빛이 드러났다. 침잠하는 눈이 일렁이며 그의 공간으로 들어선 엘리자벳을 본다. 기다렸다는 듯 격한 포옹과 함께, 그녀의 오른팔을 소중히도 쓸어내리는 손. 닿으면 부서질세라 소중하고 또 소중하게 어루어 만지는 손에서 숨겨지지 않는 애틋함을 보았다. 마지막은 거의 엉겨붙었다시피, 그와 그녀가 일시에 끝을 향해 돌진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안식을 위해, 그는 그녀를 위해. 입맞춤 후에는 설마 설마 했던 끝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자 망연한 그의 두 눈만이 황황히 빛났다. 그 빛을 거두어 감는 그의 고개가, 정면을 향한 채 추켜 올린 고개가 하늘을 보고 있음에도 땅으로 떨어질 듯 무겁고 먹먹했다.
(+)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 시작 전, 문장 너머로 움직이는 그의 다리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가 부산스레 다리의 위치를 바꾸는 타이밍이 종종 오면, 왜 그렇게 마음이 간지럽고 웃음이 절로 나던지.
(+) 정신병원에서 루케니 만세! 빨리 감기 하는 줄 알았던 밀크 후반부. 마지막 춤이 끝난 후의 오랜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