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토드.
뒷머리까지 전부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오른손의 액세서리는 검푸른 빛을 띄는 커다란 보석 반지로 바뀌었다. 손끝에는 여전히 핏빛 네일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은 극에서 엘리자벳이 차지하는 존재감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여주인공으로서 비중 자체도 압도적이지만, 등장하지 않는 순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엘리자벳의 감정선과 그에 대한 관객의 몰입이 어떤 식으로 다른 넘버와 극 전체를 살리고 다른 배우를 뒷받침할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밤공의 김소현 엘리자벳은 18일 밤공과 비슷하면서도 새로웠다. 엘리자벳으로서의 응집력이 살아있는 것은 같았으나 그때는 막 다듬어져 가는 느낌을 주었다면, 오늘은 전비된 직후의 매끄러움을 보았다. 초연의 2월 29일 공연에서 김선영 배우가 엘리자벳을 완전히 궤도에 올렸을 때와 흡사한 완전체로서의 엘리자벳이었다. 그렇기에 밤공은 확실히 자리 잡은 엘리자벳으로부터 많은 것이 겸전하게 맞물린 공연이었다. 엄밀하게는 18일의 공연이 조금 더 완전했지만 '이것으로 되었다'는 느낌을 준 것은 오늘의 밤공이었다.

공연의 내용으로 보면 다른 날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세부적인 디테일은 같았으나 그것이 표현으로 정제되는 방식과 전달되었을 때의 울림이 달랐다. 항상 자신의 몫을 다하는 초연 엘리자벳의 배우들과 시아준수, 처음보다 꽤 극 속으로 녹아든 앙상블, 큰 기복이 없었던 오케스트라, 그리고 관객들까지.

섬세하면서도 기운찼던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오늘의 낮밤은 전체적으로 파워풀했다. 론도는 단단한 소용돌이 같았다. '감히'의 울림이 길고 진했다. 전에 없던 발견으로 놀라움을 담은 얼굴이, 돌아보지도 않고 손가락만으로 죽음의 천사들을 물렸다. 엘리자벳에게로 고정된 채 미동 없는 고개가 좋았다. 돌아볼 필요도 없는 그의 '수족'들, 손짓만으로 충분한 죽음의 양 날개. 그 위에 태연히 군림하는 그가 신비롭고도 근사했다. 게다가 그때의 손짓. 팔을 들어올리는 동작까지는 잔상이 따라붙을 것처럼 더뎠는데, 접혀있는 손가락을 펴내는 속도는 날랬다. 뭉친 공기를 톡 튕기듯 일시에 촤르륵~ 이렇게 개별로는 사소해보여도 자잘한 손끝의 동작, 옅은 숨결 하나하나가 모여 죽음으로서의 그를 이룬다. 멋있게, 알맞게, 꼭 맞게.

마지막 춤은 낮공도 밤공도 완전했다. 공감각적으로 강렬했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마저 자극당하는 것만 같은 그의 마지막 춤. 특히 '미소 짓는 너' 이후의 고개 돌리기의 순간엔 보고 듣는 것 이외에 피부로 닿아오는 숨소리에 호흡을 멈추게 된다. 날큰한 숨결과 함께 그가 고개를 돌리기 시작하면 뒤로 늘어선 죽음의 천사들이 함께 날개를 펼치는데, 청록빛 조명 아래의 그는 더없이도 그림 같다. 현실에 없는 아름다움이 실재하는 놀라운 광경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낮공에서 가장 좋았던 건 뒷걸음질하는 순간,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는 동작. 허리를 굽힌 채 총 세 번, 엘리자벳의 눈앞 허공을 약 올리는 것처럼 돌렸다. '세상은 늙고 지쳐 죽어가고'하며 목을 조르기 전, 손바닥이 보이도록 두 손을 꽃처럼 활짝 펼쳐 보이는 동작에도 약한 빙글빙글이 들어갔다. 손목을 두 번 빠르게 돌린 다음 손바닥이 보이도록 두 손을 펼쳤다가, 목 조르기로 이어졌는데 뱅그르 돌아가는 손목이 꼭 날갯짓 같았다. 아아, 뒷걸음질 후 브릿지로 돌아가기 위해 달려가면서는 폴짝! 하며 한 번 가볍게 뛰어올랐다. 낮공보단 밤공에서 더 분명하고 가분하게 솟아올랐다. 그리고 밤공의 엔딩, 둘이~서~까지 끝낸 후 오른 무릎을 홱 구부러뜨리며 몸을 쓰러트리다시피 기울였다. 언뜻 보면 넘어졌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풀썩. 그 마무리 덕인지 최후의 최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터트려낸 것만 같은 마지막 춤이었다.

그림자는 길어지고는 폭발하는 어둠이었다.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그의 성량과 깊은 울림이 어둠의 화수분에서 이글이글 솟아났다.

침대 위에서는 오늘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폭신히 누운 자세에 눈까지 감고 있으면, ㅎㅎ 너무 위험한데 또 그림처럼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스르륵 비밀스럽게 떠지며 드러나는 눈동자는 눈을 감고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고 선정적으로 빛난다. 그 눈으로 엘리자벳을 마저 부르면, 널 사랑해~ 하면 ㅎㅎ.. 극 중의 엘리자벳이 가장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다.

아아, 행복한 종말에서 신문을 걷어내고 웃는 그를 향해 죽음의 천사들이 다 같이 경례하는 모습을 재연 들어 처음으로 보았다. 그녀는 여기 어울리지 않아에서 무대 바깥 금색 프레임에 녹빛 테두리가 어스름히 지는 것도 처음 보았는데, 결혼식을 올리는 바로 그 순간 곁에 머무는 죽음의 색이라니! 루케니의 대사 중 '왕실의 풍족함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건'을 떠오르게 했다. 

밤공의 내가 춤추고 싶을 때는 더 이상의 경지가 없을 정도로 완전했다. 내가 춤추고 싶을 때야말로 재연에서 김소현 엘리자벳과 시아준수의 죽음이 가장 완전하게 어우러지는 넘버다. 우선은 두 목소리의 어울림이 좋고, 신장 차이를 비롯해 외형적으로도 꼭 맞는다.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의 김소현 엘리자벳은 도취된 얼굴로 도담한 매력을 발하지만, 작은 체구와 반경이 넓지 않은 움직임 탓에 모든 동선이 죽음의 날개 안으로 완전히 삼켜지고 만다. 엘리자벳이 제 아무리 자유와 승리를 향해 날아가고자 해도 결국은 죽음의 그림자 안이라는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죽음의 천사들로 둘러싸인 원 안에서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힘껏 펄럭일 때, 그 모습 자체만으로 '내가 춤추고 싶을 때'가 말끔히 완성된다.

그와 그녀의 완전한 조화로움은 그들이 함께 외치는 내가 결정'해'!에도 있다. 두 사람이 함께 '해'를 높이 꽂는 것으로 인한 카타르시스! 더불어 그들의 관계성이 피부로 생생히 닿아온다. 자유를 찾아 승리했다는 엘리자벳과 그 자유조차도 자신이 준 것이라는 죽음. 닿을 듯 닿지 않는 평행선처럼 각자의 판단에 사로잡힌 그들이 서로 주도권을 잡겠다는 듯 나란히 소리를 지를 때, 극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두 배우 모두 상대를 배려한 성량과 강약 조절을 통해 누구 한 사람의 목소리가 다른 한 사람을 삼키거나, 또는 묻히거나 하지 않는다. '부딪힘'이 조화로 귀결되는 순간이다. 

죽음과 엘리자벳의 합만큼이나 또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좋은 것은 시아준수의 둥근 파동음이다. 원을 그리기 시작하며 부르는 '이제부터 난'에서 특히 도드라지는 소리다. 동그랗게 퍼지는 울림이 무척 견고하고도 깊다. 아아, 그리고 마지막에 엘리자벳에게로 시선을 두며 두 눈을 부릅뜨는 얼굴에서는 그물망처럼 그녀를 낚아채는 집착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부터 시작되어 그녀에게로 갈고리처럼 얽혀드는 눈빛. 벗어나고자 해도, 죽음은 네 곁에 있어..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전염병의 마지막, 목걸이를 따라가는 시선은 언제나와 같았다. 다만 낮공 때는 어둠 속에서 이를 드러내며 그르릉 거렸다. 전염병은 항상 얼굴보다 몸매를 보게 되는 넘버인데 점점 늘어나고 있는 바지가 안타까웠다. 늘어났다고만 하기 충분하지 않은 게 어떤 때는 헐렁해보일 정도라, 그새 살이 더 빠진 건가 싶기도 하고..

박수 없이 고요한 긴장을 이어갔던 그림자는 길어지고 reprise-음모의 절정은 오늘도 참 좋았다(낮공은 완전한 침묵, 밤공은 몇몇의 약한 박수가 있었다). 낮공과 밤공 모두 가장 귀에 박혔던 가사는 회전하는 무대장치 위에서 '인간은 "절대" 볼 수 없지'하며 일갈하던 것.

기억에 남는 표정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복합적인 것이다. 어떤 특정한 표정을 짓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중간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그렇게 오묘하게밖에 얼굴 위로 떠오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두 넘버에서 내내 그랬다. 루돌프를 뜻대로 움직이고자 손짓하고, 회유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며 어르는 그지만 흥미롭게도 정작 루돌프가 그의 꾀임에 넘어오는 순간이 되면, 쯧쯧 혀를 차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루돌프가 아닌 정면의 허공 어딘가의 점을 응시하는 듯이 못 박힌 찰나의 눈동자에서 '하란다고 또 하다니 어리석구나' 꼭 이렇게 말하는 그를 보는 것 같았다.

아, 밤공에서는 쎄! 상을 구원해!의 쎄가 높고 독특했다. 탁해~를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또 할까? 그렇지 않다면 오늘만의 레어가 되겠다ㅎㅎ

민영기 요제프와 김소현 엘리자벳의 조합이 좋은 점은 행복은 멀리에부터 베일은 떨어지고까지 유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감정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넘버 배치상, 연출상 눈과 귀를 사로잡기 힘든 여건의 곡을 조화롭게 살려낸다. 드라마와 아픔, 체념과 엇갈림의 슬픔이 형체를 알아볼 수 있도록 생생하게 전달된다.

마이얼링의 그는 차가웠다. 특히 밤공에서는 간결할 정도로, 웃음도 거의 없었다. 죽음의 순간이 되었을 땐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죽을 자의 생명을 머금곤, 그대로 멎었다. 5~10초 정도 흘렀을까. 입을 맞춘 상태로 영혼을 남김없이 음미하는 것 같은 그가 어둠 속에 있었다.

마이얼링에서 일말의 감정도 없을수록 추도곡의 동요는 극적이 된다. 재연의 추도곡은 항상 요동친다. 처음으로 대면하는 깎아지른 절망 앞에 멈칫하여 당혹스러워하는 죽음이 있다. 어쩌면 그 순간 그는 론도에서 말한 바 있는 그녀의 '차가운 심장'을 목도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몇십 년 전 그가 그녀의 따스함을 얻기 위해 포기했던 바로 그것을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 마주한 것일지도...

그렇기 때문인가. 밤공의 베일에서 그는 울고 있었다. 눈물만 흐르지 않았을 뿐, 얼굴과 목소리가 그랬다. 죽음과 엘리자벳이 단단히 얽혀들어 하나가 되는 순간, 그는 그것이 마지막 포옹임을 직감한 듯했다. 끝을 예감한 그의 팔과 두 눈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김없이 하게 되는 말, '네 주인은 영원히 나야'. 확신에 찬 목소리가 무색하게도 공허한 얼굴이, 비장한 빨간빛 입술이 그녀와 만났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가 염원하던 단 하나를 허락하고자 그가 그녀를 거머안았다. 찰나. 그녀가 죽음을 통해 영원한 안식으로 떠나버린 후 남은 것은 오로지 죽음뿐. 그도 그것을 존재 깊이 알고 있었다. 혼자였던, 다시 혼자가 된 그가 두 눈을 감고 막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