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eautiful World
하늘하늘 열대어 같은 움직임은 볼 때마다 좋다. 교육받아 정제된 아름다움의 틀 안에서 유영하는 세계의 단면을 보는 것만 같아. 화음에 화음이 더해져 소리가 폭포수가 되어 떨어지는 순간이 되면, 아, 쏟아지는 음악을 있는 그대로 맞는 느낌. 기분 좋은 감각.
 
2. 등장
별무리가 흐드러져 그에게 닿으면, 그것을 부드러이 쓸어모으는 섬세한 손가락. 그러쥔 별들의 향연을 우수수 흩트려내어 대지를 적시듯 스치는 아름다운 손가락. 역시 좋다. 숨도 쉬지 않고 바라만 보게 해.
 
3. 찬란한 아름다움
더듬더듬 따라 불러보는 아이 같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쾌락을 배제한 순결함. 때 묻지 않은 순수. 마치 아직 한참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립스틱을 몰래 발라보는 것 같은 위화감. 아, 이렇게나 깨끗한 그였는데.
 
4.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레드와인을 적신 촉촉한 입술이 음절마다 눈에 일렁일렁. 탄식에 잠겨 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붉게 아름다워, 불멸을 바라는 그 입술을 오래도록 보았다.
 
5. 당신은 누구일까
꿈틀대는 푸른 핏줄ㅡ의 도입부가 오늘의 소절. 사랑의 태동 그 자체. 한음 한음 공들여 생명을 불어넣는 목소리가 너무도 잘생긴 건 물론. 드문드문 발하여지는 소리가 꼭 그의 심장 박동 같아서 그렇지 않아도 사랑의 왕자님을 기다리며 터질 것 같은 심장이 주체를 못 하게 돼.
그리고 아이컨택 성취☆
 
6. 최악의 줄리엣
오늘의 왕자님은 정말 달랐다. 시빌 베인의 실망스러운 연기에 실의에 빠진 얼굴이 아니었다. 발코니에서 이미 그는 화가 난 것 같았어. 톡톡톡 난간을 내려박는(속상할 때는 콩콩콩 두드려 당혹감을 표현하곤 했는데 오늘은 톡톡 내지는 쿡쿡쿡 내려쳤다!) 손가락에서 화가 역력했다. 심지어 ‘시빌 베인이 아픈 것 같아요.’도 단호함이 묻어나는 정색이었어.
 
시빌 베인에게는 더욱 냉정했다. 아니, 냉혹하다고 할까? 이미 완전히 정을 뗀 얼굴이 완벽하게 남을 보는 얼굴이었다. 이제까지의 내 삶과는 전혀 달라졌다는 사랑의 속삭임에는 웃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을 비웃었어. 내게 이런 수치를 주고 뭐? 그런 말을 해? 하는 듯이.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그녀를 지나쳐 ‘내가 사랑했던 시빌 베인은’,을 더듬어 그릴 때는 또 꿈결처럼 사르르 녹던 눈동자가.. 와.. 돌변한 태도만큼이나 확연한 온도차가, 세상에나.
 
7.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헨리의 두 번째 찬란한 아름다움을 다시 만난 그의 묘하게 뒤틀린 눈동자. 그 자신도 자각 없이 지어 보인 것만 같은 찰나의 비릿한 미소.
그리고 리프라이즈의 엄청난 변화. 달콤한 망각을 깊이 받아들이며 한결 단단하고 단호해진 목소리.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의 순수와, 1막의 또 다른 나의 쾌락을 좇아 대담해진 목소리의 연결다리가 되어주는 이 변화가 굉장히 설득력 있었다.
 
개인적으로 눈에 꽂힌 얼굴은 오페라를 보러 가자는 제안에 순간적으로 배질을 보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조,좋아요.’ 하며 웃음을 뱉어버린 얼굴.
 
8. 1막의 또 다른 나의 귀에 꽂힌 가사: 새로운 쾌락, 끝이 없는.
 
9. 1막 무도회의 신난 얼굴. 모든 것이 흥미롭고 새로운 미소. 2막의 무도회와 확연하게 대비되는 생기. 눈 앞에 펼쳐진 모든 세계를 향하여 호기심을 열고 반짝거리던 눈.
 
10. Against Nature
오늘의 소절은 역시 ‘후회 속에 핀 죄-악-의 황홀한 절정!’ 여기 이 죄-악을 나만 좋아하는 건 아닐 거야.
끝 무렵. 땀방울 맺힌 오른 볼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마치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려 그어진 선 같았어. 끊임없이 새로운 쾌락을 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그의 모순과 더없이 어울렸다.
(근데 조명이 바뀐 건가.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새로웠던 느낌이지. 아무리 처음 보는 느낌으로 봤다지만..)
 
11. 무엇이 기다릴까
다락에서 내려오며 ‘요즘 너무 힘들어요.’ 할 때마다 짠하다. 고통스러울 걸 알면서 다락에는 왜 갔어요. 가지 마요, 가뒀으면 그냥 잊고 살아..
 
찬란한 아름다움의 변화는 여기서도 있었다. 중간 어느 소절 즈음ㅡ기이한 황홀한 고통ㅡ에서 굉장히 부도덕한 음성을 자아냈는데, 청각을 산산이 일으키는 소리였어. 더 흥분되는 건 앞으로도 진화할 것 같다는 예감을 주었다는 것. 확실해. 더욱 아름답고 더욱 부덕하게 번져갈 것이다. 아, 이런 과정의 소리를 목격할 때마다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
 
입맞춤 이후 배질을 유인하는 얼굴이 뜻대로의 미소를 그리며 혀를 날름거렸다(충격). 거의 다 되었어, 혹은 역시나 하듯이.
 
근데 소파에서 오빠 쩍벌하며 일어나는 건 부러 하는 걸까? 9월 8일부터 일어날 때의 디테일을 조금 더 도발적으로 바꾼 느낌인데.
 
12. 넌 어디로. 데빌 역할의 남성이 마리화나를 문 그에게로 다가와 속닥거리듯 기댄 건 오늘 처음 보았는데, 배덕하고 좋았다.
 
13. 또 다른 나
계단을 전부 올라 문을 열기 직전 정면을 향한 건 대체 무슨 표정이었지. 깜짝 놀람을 선사한 찰나였다. 씩씩거리는 것도 같고 벼르는 것도 같은 오기? 독기?
 
14. Life of Joy
자꾸 ‘나의 선택’임을 강조하는 건 왜일까. 시작은 헨리의 인도였으나 결국 내가 만든 나의 선택이란 걸 누차 강조하는 이유가 뭐지. 도리안의 주체성? 혹은 자기확신을 가장한 자기 연민? 알듯 말듯 아리송하다.
 
타락의 건배는 늘 그랬듯 여물어 아름다웠다. 합주 끝에 결심한 듯 주먹 쥐어 부르르, 결의를 다진 건 오늘도 역시 비장하게 아름다웠고. 그 기세로 배질을 몰아갈 때는 배덕하여 아름다웠다.
 
15. 너를 보낸다 reprise
배질? ‘제발’ 내 선행을 폄하하지 말아줘요. 숨결과 한숨의 중간 어딘가의 ‘제발’이었다. 당부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음성이 굉장히 오묘했다. 오늘의 즉흥이었을까. 다음에도 들을 수 있을까?
 
배질의 죽음 앞에 무너진 얼굴에선 좌절 이상의 상실이 보였다. 처음으로 영혼의 추함이 아닌 고통을 봐준 사람. 그런 사람을 잃었다는 깨달음. 아, 그러나 어쩌나. 그가 빚은 비극인 것을.
 
16. 사라진 아름다움
오늘은 자조가 아닌 고통이었다. 공허한 쾌락, 남겨진 추함, 사라진 아름다움. 자전적 노래이기도 했고. 껍데기뿐인 자신을 더듬어 그리는 그를 보노라니 나까지도 허망해지는, 그런 노래였다.
 
‘헨리’를 거듭 부르는 목소리는 아이 같은 날 것의 울음이었다. 그것도, 버림받은 아이의.
 
17. 도리안 그레이
아무래도 오늘 A의 각도로 가장 사랑하는 <도리안 그레이>를 만난 것 같다. 비스듬한 옆얼굴이 슬픔으로 깎여 촉촉해진 채 내어 부르는 ‘도리안’의 순간. 이때 힘겹고도 공허하게 텅 빈 눈앞을 가르는 두 팔까지. 살짝 비틀어 옆면인 얼굴에서 빚은 듯이 솟은 코끝과 입꼬리에 맺힌 울음이 얼마나 사랑의 각도였는지. 그의 울음에 숨 막히고 그의 아름다움에 숨 막혀 호흡을 어찌할 바 몰랐던 오늘의 도리안 그레이.
 
마지막은 힘겨운 울음이었다. 참지도 뱉지도 못하고 그저 얼굴에 가득 고여 머무는, 그런 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