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등장
아, 웃는 얼굴을 어쩌면 좋지. 세상 제일 사랑스러워. 원래 지상에 닿는 넷째 손가락을 가장 사랑했는데 그의 미소가 드리워진 이후부터는 별무리를 헤아리는 눈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얼굴인걸. 다짐했다. 꼭 위층에서 이 얼굴을 마주 볼 것이다.
 
2. 찬란한 아름다움
헨리 워튼의 노래에 몸을 맡긴 얼굴. 그 노래를 따라가는 표정. 혼탁하게 휩쓸려가며 탁한 빛을 띠던 눈. 섬세한 연기에 늘 감탄한다. 그에게서 이런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이 없어서 매번 놀라기도 하고.
 
둘이 되게 안 어울린다는 오늘 배질의 말에는 공감했다. 어울리지 않으니 어울리지 말아 주시죠.
 
3.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도입부의 음이 유독 성스러웠다. 푸른 여름날의 소년이 이럴까. 때 묻지 않은 순수를 청각화하면 이렇까. 곱고 곧은 미성으로 별을 빚듯 조심스러워 성결한 소리. 도리안의 순수를 이 노래로써 표현하고자 했다면, 옳은 선택이다. 그의 소리가 그것을 가능케 하니까.
 
4. 당신은 누구일까
오늘 청혼할 생각이에요, 선언하기 전. 소파에서 몸을 일으킬 때 앙 다물리며 비죽이는 입술을 보았다. 중대발표를 앞두고 초조한 부리가 사랑스러웠어. 헨리 워튼의 무심한 '축하해'에는 그만 더없이 시무룩해졌지만.
시빌 베인과의 계단에서 무대로 되돌아오면서는 거의 날아왔다. 두 팔을 활짝 벌려내며, 음을 휘젓듯이 자유롭게. 사랑스러이 팔랑이는 양팔이 순풍에 돛을 단 것 같았어.
 
5. 최악의 줄리엣
추해ㅡ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얼굴을 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눈. 이 나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최악의 모욕을 들은 얼굴이었다. 단 두 음절로 사랑의 몰락에 쐐기를 박았다는 걸 그 순간의 헨리 워튼은 알았을까.
 
오늘의 줄리엣은 대사마저도 틀려버려서 굉장히 리얼하게 연기를 '못' 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다시피 한 상체로 난간을 내려쳤고, 끝내 좌절한 얼굴이 되어 의자 한쪽으로 무너져내렸다. 충격에 싸인 그 등에 얹어지는 헨리 워튼의 토닥임은 오늘도 얄미웠다.
 
6.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시빌 베인은! 헨리 워튼의 일갈에 젖은 눈이 부푼 채로 멎었다. 솔깃한 눈동자가 동아줄을 붙잡듯 헨리 워튼을 쫓아가면, 이어지는 찬란한 아름다움의 사사. 이어 부르는 그는 신세계를 만난 얼굴이 되었다. 경련이 이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 이런 경지가 있나. 경도된 얼굴이 이질적인 색채를 띠며 빛을 냈다.
 
7. 무도회. 브랜든 부인을 향하여 살짝 눈인사하며 끄덕이는 고개가 근사하다고 적은 적이 있나. 이 대목만 오면 마음이 콩닥콩닥. 잘생긴 웃음 그린 눈이 너무 신사라서. 너무나 왕자님이라서.
 
8. Against Nature
Against Nature에서의 음향이 나날이 좋아지는 것 같아. 오늘은 특히나 도입부의 소리가 속삭이는 것 같아서 황홀했다. 죄-악-의 날개를 펼쳐내는 음성이 귀를 확 잡아채기에 시름시름.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이 끝없는 욕망 속 (착) 삶의 환의 (착) 두 팔을 벌려내기 전 손목 웨이브도 정확한 엣지와 함께 돌아왔다. 빠르게 휙휙 감긴 손목의 스냅이 아주 분명하고도 그림 같았어.
 
'꿈틀대는 푸른 핏줄'의 그를 건너보는 브랜든 부인의 표정은 다시 보아도 소름이 끼친다. 꼭 그런 눈이어야 했나.
 
9. 넌 누구
'두 눈에 번지는 위-선'에서 허공을 빚는 손, 그 반대방향으로 희번덕이며 또르르 구르던 눈동자.
'금-발'에 새긴 미소.
시시각각 고혹적으로 변하는 이 모든 표정을 온전히 새길 수 없어 애통하다. 얼마나 초단위로 다르며, 그 모든 다름마다 아름다운지 몰라. 소망하건대 이 표정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기까지 그가 꺼내보았을 모든 표정들을 다 보고 싶을 만큼 다 아름다워.
 
라일락 향기를 그리는 눈동자는 늘 저 먼 곳을 향한다. 허공 위로 던져진 채 저 멀고 먼 곳을 향한 시선. 그곳에서는 보이나, 아름다웠던 순수.
 
참. 오랜만에 문을 닫는 소리가 깔끔한 쾅! 이었다. 그간 못내 신경 쓰였던 소리라 적어둔당.
 
10. 무엇이 기다릴까
너의 영혼 나의 영혼! 절규하는 배질을 보는 눈썹이 팔자로 이지러지며 웃었다. 네가 뭘 아냐는 듯이. 대수롭지 않은 일에 유난이라는 듯이. 평온을 가장하며 그렇게.
날 사랑했던-의 동그란 발음에는 더욱 명료한 웃음이 깃들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예뻤다. 예뻤어. 이 어절의 음성 이제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애틋하기까지 해.
곧이곧대로 인정하는 배질에게 내뱉는 웃음은 오늘도 매정하게 공기를 가르며 흘렀다. 깔깔깔.
 
대망의 찬란한 아름다움. 시작은 12일로, 마무리는 13일로. 12일을 닮은 도입은 거의 폭주였다. 귀에 박혀드는 할큄음이 가시가 가득했어. 그의 심장에서 피어나 배질의 마음을 찌르고 내 신경을 황홀하게도 곤두세우게 하는 그런 음성이었다.
 
유혹의 대사를 속삭인 후, 배질의 뒷머리를 쓸어내린 손이 허공을 베일처럼 가르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배질을 훑어내리는 찰나의 시선이 눈에 콕 박혔다. 이 단어는 한 번도 쓴 적이 없는데, 여기서 써야지. 치명적으로 유혹적이었어.
앞서 밀착하여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빛을 내는 눈망울로도 내내 위험했는데, 훑어내리는 그 마지막의 시선이 절정이었다.
 
입술이 닿은 상태에서 자신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부딪쳐 내는 입맞춤의 소리는ㅡ오늘은 매우 또렷했다.
 
11. 또 다른 나
오늘의 웃음은 '내 얼굴을 똑바로 봐'에 있었다. 그러나 모종의 꿍꿍이가 있는 그때의 웃음이 아니었다. 오늘은 결백을 가장하는 웃음이었어. 허물없음을 주장하는 그런 겉웃음.
 
오늘의 소리는 마지막 음절. 음을 걸어 잠그는 끝음이 대단히 파괴적이었다. 밀어 올리며 내치는 절정, 이런 건 여태 없었어. 아아, 최고야.
 
12. Life of Joy
다그치며 몰아붙이는 배질에게서 아예 떨어져나온다 싶더니, 글쎄 배질이 닿았던 팔을 툭툭 털어냈다. 왼팔 먼저, 오른팔 그다음. 그리곤 홱 뒤돌아 등을 보인 채로 멀어져갔다. 포기하지 않고 그의 뒤를 쫓는 배질의 팔이 뻗어졌지만, 닿지 않는 등을 향할 뿐이었다.
아예 추가된 디테일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다소간의 멸시가 깃든 고통의 얼굴이 배질의 손이 닿은 팔을 툭툭 털어내는 모습, 또 보고 싶어.
 
타락의 건배는 오늘도 신성하고 서글펐다. 어엿하게 나란한 찬란한 아름다움은 세상에서 가장 배덕한 천지창조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해.
 
13. 천사의 추락
무정한 달빛을 홀로 받아 빛나는 존재. 천사의 얼굴을 쓴 영혼 없는 심장.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서서히 덮어가는 웃음은 자신이 베푼 선행에 의한 최면이었을까.
 
14. 너를 보낸다 reprise
배-질. 악물고 타이르는 음성이 낮았다.
제발. 짙어진 한숨 역시 나지막했다.
 
어때, 아름답지 않아? 묻는 웃는 얼굴이 점차 파르르 떨리더니 이를 악물고 배질에게 달려들었다. 넌 내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해. 토해내는 음성마저 매끄럽지 못했다. 온갖 감정이 복받친 소리가 마구잡이로 쏟아져 내리며 배질의 목덜미를 뒤흔들었다.
애원이었다. 네가 날 버릴 수는 없다는 절규였다.
이어진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 역시.
울음 흥건한 애원에 심장이 서걱대는 것이 느껴졌다. 마가복음을 읊조리는 순간의 배질이 그를 보지 않는 것도 차마 그 애원을 똑바로 마주하고서는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15. 사라진 아름다움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가악. 지나치게 선한 발음으로 끔찍한 가정을 입에 담는 모순. 순백의 악마인 그 자체를 표상하는 것과 같던 대사. 아무래도 이 대사의 그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지나치리만치 쫓기는 햄릿의 대사. 오늘은 말이 말을 먹었다. 다급함이 소절을 타고 흘렀다. 이 대목의 그가 언제부터 이렇게 서글퍼졌지. 언제 이렇게, 제발 이런 나를 알아봐 달라는 것 같은 호소가 되었지.
 
초상화 어딨느냐는 질문과 함께 힘없이 돌려지는 상체가 무기력했다. 잔뜩 소진 당한 육신이 결국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러니 막지 못했지. 다락을 향하는 헨리 워튼을 막아서지 못한 몸에 체념의 울음이 고였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상실에 무너져 웅크린 몸이 참 작았다.
'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동그란 등이 움찔거렸다. 이다음에 무엇이 들려올지 두려운 듯이. 소리를 좇는 두 눈이 황급히 요동쳤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아.'
부풀대로 부푼 눈동자가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으나, 떠나는 이를 잡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렇게 무너져내렸다.
 
16. 도리안 그레이
A의 각도로 바라보는 '모두가 사랑했던 도리안'은 신성할 정도다. 두 팔을 벌려내며 자신의 소리에 몸을 맡기는 찰나의 상체가 가엾고도 아름다워. 회한하는 몸짓이 처연하다. 무엇보다 팔자로 내려진 눈썹과 울음 맺혀 뭉친 콧등, 애상진 입매가 빚어내는 옆얼굴의 끝없이 하향하는 모든 곡선이 끝없이 아름답다.
드라큘라의 마지막 얼굴도 이 각도로 기억했지. 도리안의 마지막 얼굴 또한 이 각도로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을 그어낸 팔이 그 상태 그대로 멎은 찰나. 짓이겨진 육신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조명에 맡겨진 몸. 그 1초가 정지화면이 되어 눈에 박혔다. 실제로 어느 정도로 그가 정지된 그대로 멎어있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두 눈에 깊이 박혀 들었다.
 
풀썩, 마치 누가 끌어 내린 것처럼 무너진 육신이 오늘도 부르르 떨었다. 온몸을 감싸는 죽음의 한기에 떨듯이 파르르. 생기가 사라진 파란 입술이 더듬더듬 움직였다.
아름다운 소년이 나를 부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울음으로 빚은 애수. 죽음에 잠긴 미소. 무엇이든 오늘의 당신에게는 당신이 바랐던 그다음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헨리! 플라토닉스 러브거든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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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24

기분이 조가 되어 후기도 술술 써진당. 이 기분 이어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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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16.09.24

오늘 커튼콜 그냥 하염없이 울고 싶어서 기분이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