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아름다움ㅡ너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었다 했지. 너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며 멀어져가는 자의 뒷모습이 말했다. 더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존재적 부정과 함께 혼자 남은 마음. 무너지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었겠지.
 
도리안 그레이ㅡ나, 싱그러웠던. 나, 밝게 빛나던ㅡ의 그가 더없이 아름답고 여리고 가냘픈 순수로, 울음으로 웃는 얼굴로 노래하는 건.. 그 아름답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그래서 그렇게나마, 애써 순수의 소리로 최면을 걸어보는 걸까. 나 지금, 여전히, 아직 아름답노라고.
그러나 그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순수의 목소리에서 짙게 그을린 저음으로 되돌아오는 음성은ㅡ'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ㅡ, 그래서 더 아팠다. 더는 없는 여름날의 순수.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시간. 돌아갈 수 없는 자신.
회한이 솟구치기 시작하는 음성ㅡ그림 속 저 사람 도대체 누군가ㅡ에서 끝내 죽음을 결심하는 빛을 보았다.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얼굴이 비장한 동시에 초연했다. 그 공허한 얼굴에 왈칵 서러움이 밀려왔다.
 
털썩 무너져 쓰러진 육신이 평소와 다르게 요동쳤다. 떨구어진 고개에서 똑, 똑 흘러내리는 물기는 꼭 몇 남지 않은 잔가지의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려 시드는 것처럼 보였다.
 
눈앞의 허상을 붙잡아보려는 안간힘의 무릎걸음이 자꾸만 무너져내렸다. 따라주지 않는 몸을 멈추어 세우고, 무릎으로 일어나서, 황금 빛깔 천국과 아름다운 소년을 그리는 얼굴이 서글프게 젖어들었다.
 
오늘의 얼굴은 어제, 그제와는 달랐다. 텅 비어 무엇도 존재하지 않던 공허한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안에 그가 소망하던 구원이 있었으리라고는 확언할 수 없다. 그저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일순간 반작이던 눈이, 그 무언가를 놓치지 않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 스러졌다. 그뿐이었다.
 
*
 
다시 새하얗게 돌아온, 백금발의 그.
 
 
1. 등장
쇼팽이 흐르는 얼굴에서 별무리를 헤아리는 눈. 이를 일러 사랑의 얼굴이라 하자.
 
2. 찬란한 아름다움
배질이 말한 나쁜 영향에 대해 더 듣고 싶어요ㅡ에서 흘렀던 사랑스러움. 사랑받고 자란 소년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피력하는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태도였다. 천진한 순수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졌어.
헨리 워튼이 남기로 한 후, 오늘도 배질에게 꽂히는 시선을 보았다. 다만 오늘은 흘긋이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아예 머무르며 배질을 탐색하는 것 같았어. 괜찮겠지~ 하는 느낌으로.
그나저나 여기서 배질이 그렇게 웃는 얼굴로 (도리안이 원한다면 별 수 없지 하는 그런 웃는 얼굴로) 손까지 으쓱해가며 헨리 워튼의 잠류를 승낙하는 줄은 몰랐네..
 
후반부. 자신의 턱을 쓸어내리는 헨리 워튼을 보는 눈동자가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일렁였다. 촉촉한 두 눈이 거의 글썽이다시피 할 정도로. 그것은 아마도 감격, 경외, 찬탄. 그를 사로잡은 정체불명의 매혹 앞에 일렁이는 눈동자가 한가득 꿈결이었다.
 
3.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시간과 영혼을 맞바꾸는 순간, 왼쪽 귀걸이가 주홍빛으로 반짝였다. 기이한 빛이었고,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의 서막을 알리기에 손색없는 불길하고도 아름다운 징조였다.
 
4. 당신은 누구일까
당신은 누구일까ㅡ라는 넘버를 종잡을 수 없어졌다. 그와 그녀가 만나는 듀엣의 멜로디는 일부러 이렇게 의도한 걸까? 난해하여 어울림을 애초에 예정하지 않은 것만 같은 넘버다. 의도된 것만 같은 부조화스러움이, 꼭 곧 끝나버릴 사랑을 암시하는 것일까 싶었을 정도로.
 
애드립은 헨리, 정말 그렇게 안 봤는데.. 쓰레기. 어조가 새로웠다. 거의 울먹울먹해져서는, '그렇게 안 봤는데..' 동심이 파괴당한 듯한, 순수한 사랑을 모욕당한 것 같은 가냘픈 충격이 느껴졌다. 어어어엄청 귀여웠어.
 
5. 최악의 줄리엣
도리안 그레이팀, 팀의 분위기가 좋구나. 뜻밖의 화기애애함을 느꼈다. 새로운 시빌 베인의 주연 데뷔 무대를 축하하기라도 하는 듯이, 발코니의 네 사람이 아주 시끌벅적했다. 오늘처럼 시빌 베인의 충격적인 연기에 망연자실한 그를 세 사람이 연신 웃는 얼굴로 '놀린 적'이 없었다. 그래도 늘 그를 생각하여 웃음을 삼키거나, 시선을 회피하거나, 어처구니는 없지만 그래도 짐짓 태연한 척해 보인다거나, 브랜든 부인만이 간혹 참아지지 않는 웃음을 손으로 막아 보이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세 사람 전부 대놓고 그를 놀렸다. 어머 어머, 어쩜 저러니. 저런 연기를 보러 오자고 한 거니? 하는 얼굴로.
그도 매우 분주했다. 잔뜩 처진 눈매가 한껏 시무룩해졌고, 오랜만에 (굉장한) 분노의 난간 내려치기가 돌아왔다. 실연당한 사람처럼 팽, 의자에 상체를 묻어버리고 마는 비련미 역시 무척 절절했다.
여기에 더하여 애드립까지. 브랜든 부인의 시빌 베인을 흉내낸 '그래서 내가 맨날 놀-잖-아-요.'와 그의 '보는 내내 웃겼어요.' 새로운 시빌 베인을 격려하고, 축하해주기 위한 것 같은 일련의 센스 있는 마음씨들이 상냥했다. 보는 나 또한 덩달아 따듯해졌을 정도로.
어쩐지 마음이 간지러웠다. 그가 몸담고 있는 크루의 화기애애함을 두 눈으로 목격한 듯한 그 순간에 왠히 미소 지어졌어.
 
6. Against Nature
22번은 '죄악의 황홀한 절정'의 번호인가 봐. 오늘도 눈맞춤을 선사 당했다. 그 사납게 치켜뜨는 눈이 정확한 빛으로 꽂혀오는 순간, 말 그대로 황홀한 절정이었다. 아. 울먹울먹.
 
7. 넌 누구
방향을 트는 맵시가 아름답다고 말한 적 있던가. 어깨에 회전축을 두어 부드럽고도 앙칼지게 방향을 바꾸는 몸이 기품있는 한줌이다. 자칫 닿으면 종이에 베일 것처럼 날카롭게 아름다웠다. 마침 그가 대립하는 존재도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들. 시각적으로도, 존재적으로도 절묘한 대치라 생각했다.
 
8. 무엇이 기다릴까
무엇이 두려워'서' 그 그림을 보고 싶은 거죠? 에 오늘도 아름다운 한숨결을 불어넣었다.
성스러운 퇴폐의 와중에 귀여움도 있었지. 마리화나를 야무지게 눕혀 쓰러트린 손가락이 한 번 더 그것을 굴려 소파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더불어 가운에 폭 싸인 한쪽 발목이 일어서며 자락을 톡 쳐내는 동작이 매우 귀여웠네.
 
당신이 만든 '나'가 오랜만에 강해졌다. 역시 강할수록 좋아. 이 탓하는, 민감한 소리가 그리웠어. 자주 들을 수 있었으면.
 
찬란한 아름다움은 28일의 퇴폐를, 아지랑이는 구름처럼 뭉게뭉게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또 오랜만에 또렷하게 보았다. 유혹의 대사로 쐐기를 박은 후 모든 것이 뜻대로 되었음을 직감하며, 돌아서기 전. 배질을 올려다보며 아름답게 이지러지던 눈썹을. 웃는 듯 쓰린 듯 결연한 듯 비웃는 듯 여러 갈래의 감정으로 범벅된 그 눈을.
 
가운은 요즘 매번 한 박자 빠르다. 박자를 당기기로 한 걸까.
어깨의 빨간 자국은 왜 더 진해졌을까.
 
9. 또 다른 나
이렇게 고통과 환희가 동일한 비중으로 찾아오는 노래가 또 있을까.
이중막은 이제 그 의도를 이해했고, 받아들였고, 때로는 필요성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의 퇴장만큼은 적응되지 않는다. 그가 퇴장만 하지 않는다면.. 퇴장의 순서만 없어진다면..
 
10. Life of Joy
입가를 훔치고, 탁 잡혀버린 손목을 거세게 풀어내고. 육탄전은 어제 있었던 자그맣고도 큰 변화를 이어갔다. 특히 완력으로라도 그를 멈추어 세우려는 듯이 손목을 탁 잡아오는 배질과 그것을 뿌리치는 그의 대치가 치열한 것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그 상황이, 두 사람의 호흡이.
 
그리고 너무도 신성하고 장중하게 아름다웠던 절창부의 첫 '황홀했던 기-억'. 장대한 파동이었다. 오늘 여기 소리 너무 좋았네.
그런데 첫 life of joy 후에 실제로 웃음소리를 섞어 넣었던 게 맞나? 어서 다시 들어봐야징.
 
11. 너를 보낸다 reprise
이로써 진-정-한 선행을 베푼 거예요. 고통의 웃음은 어제보다도 확연해졌다. 웃음을 멈추고도 일그러진 그대로인 얼굴에서 그의 균열된 정신상태가 엿보였다.
하아, 다신 날 보지 않겠다고? 의 한숨결 역시 또렷하게 흘러갔다.
 
균열된 정신으로도 애써 가면을 벗어내지는 않는 그인데. 초상화가 화두로 오르면 표정부터 달라진다. 여기에서도, 사라진 아름다움에서도. 언제 가면을 쓰고 있었냐는 듯, 허물어진 얼굴이 아이 같다. 정처 없이 떨리기 시작하는 동공이, 호흡부터 달라지는 음성이 그런다.
 
12. 앨런의 죽음
'그러면 경찰에게 넘길 거예요.'에 색다른 음성이 스며들었다. 다소 잠긴 목소리였다. 나도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어쩐지 비통하게도 들리는. 인간적인 목소리였다.
 
13. 사라진 아름다움
오늘의 가사는 아름답게 남겨진 나약한 존재, 그게 인간인 것을. 자기 자신의 처지를 서럽게 노래하는 목소리가 서글펐다. 부들부들 떨리는 눈동자가 좀처럼 한곳에 시선을 두지 못하다가, 끝내 헨리 워튼에게로 회귀하는 것(나를 시험한 건 너의 위선)까지 슬펐다.
 
오늘의 소리는 사무치도록 아름다웠던 회한의 듀엣. 끝없는 나락으로 하염없이 수렴하던 소리들. 듣는 마음이 먹먹하여 견딜 수 없게 하였던.
 
 
(+)
Beautiful World. 오늘의 사운드가 매우 좋았다.
세상이 바뀐 시간. 브랜든 부인은 오늘 남자 앙상블의 머리를.. 쿠션으로 가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