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에 she-at last-loving you keeps me alive의 삼연곡이 있었다면, 도리안 그레이에는 너를 보낸다 reprise-사라진 아름다움-도리안 그레이의 삼악장이 있다. 오로지 이 셋만으로 한 시간, 두 시간을 채워도 좋아. 이 삼악장이라면 내 눈물을 모두 앗아가고 심장을 덜어내어 가도 좋다. 그러니 영원히 흘렀으면. 이 시간, 이 노래, 이 눈물 계속 머물렀으면.
 
첫 악장, 너를 보낸다 reprise 부터.
 
"난 그녀를 용서해주었어요." 붉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인 그가 말했다. 배질을 향하여 뻗어진 손바닥이 조심스럽게 그 어깨 부근에서 원을 그러쥐었다. 어르듯 매만지듯 닿은 손길이 말했다. 내 말을 들어요, 배질. 그러나 그 향기롭게 속살거리는 음성에도 변화 없는 공허한 눈동자.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걸음을 돌리며, 그가 날카롭지만 마른 웃음을 쥐어짜냈다.
"비로소 진-정-한 선행을 베푼 거예요."
풀썩 제 몸을 내던지듯 소파로 내려앉은 힘에 의해 가느다란 다리가 달랑이며 허공으로 살짝 들렸다. 정제되지 못한 제멋대로의 거동과 깔깔깔 연신 뱉어내는 웃음이 빚는 어그러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이얗게 아름다운 외양에서 위화감이 일었다. 그런 그를 향한 공허한 이의 눈이 읊조렸다.
"그런데 너 왜 이렇게 힘들어 보이는 걸까."
그 말에 태연을 가장하던 가면의 웃음이 비로소 멎었다.
"배질,"
적막한 방 안으로 서늘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제발 내 선행을 폄하하지 말아줘요."
정색한 억양이었으나, 묘하게 떨리는 음성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느냐는 듯이, 추궁하는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프랑스로 갈 거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러 왔어."
자신이 들은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치켜 올라간 눈썹이 반문했다.
"다신 날 보지 않겠다고?"
늘어진 상체와 축 처진 어깨에서 고개만 든 얼굴이 자신의 곁으로 나란히 와 앉는 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오는 손길에 움찔인 눈썹이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 너를 지켜보는 것이 두려워."
최후의 인사를 말하는 순간에서야 자신의 눈을 찾아와 마주하는 배질의 눈동자를, 그가 똑바로 응시했다.
 
"이렇게 떠나는 나를 용서해줘."
이 순간, 그를 보는 배질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림자진 눈이 글썽이듯 촉촉한 채 만 마디를 대신한 눈으로 하염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마지막 모습을 눈으로 그려 간직하겠노라는 듯이, 깊은 시선이 마침내 그로부터 옮겨가 떨구어질 즈음에는 그와 나란히 앉았던 소파로부터 몸을 일으켜 그에게 등을 보인 배질이 서 있었다.
그 뒷모습을 향하여, 하지만 바라보지는 않는 눈으로 그가 말했다.
"난 완벽한 인간이 되고 싶었어."
온통 과거형의 문장이 담담했다. 응어리질 대로 응어리져 굳은 흉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가 새까맸다. 여름날도, 이상향도 전부가 먼 옛날의 이야기. 누군가의 기억에서만 살아 숨 쉴 지나간 옛일을 또박또박 씹어뱉듯 말하는 그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배질을 비껴간 시선이 저 먼 어딘가에 못 박힌 채 서글프게 이글거렸다.
"영혼과 육체의 아름다움이 겸비된 그리스 신화의 이상적 인간."
결연한 목소리와 달리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그가 움직였다.
"하지만,"
저 먼 곳을 향하여 못 박혀 있던 시선이 갑자기 번득이다, 배질에게로 내리꽂혔다.
"난 그렇게 살지 못했어."
 
그의 두 눈을 스친 순간적인 광채가 희번덕인다 싶더니, 그가 날아올랐다. 저 위, 저 먼 곳. 자신만이 간직해온 비밀을 격리해둔 다락으로.
"니가 그린 초상화 때문에!"
이 순간 방안의 적막을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그의 마음이 깨지는 소리였을까. 배질의 심장이 무너지는 소리였을까. 귀를 먹먹하게 하는 거대한 고통의 소리를 타고 그가 계단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멈추어 섰다. 하얗게 나폴나폴 무게 없는 움직임이 아름답기에 더욱 기묘했다.
"어때, 아름답지 않아?"
짐짓 자랑스레, 두 팔을 펄쳐 보이며 묻는 얼굴에 구겨진 웃음이 만연했다. 대답 없이 처참히 웅크린 등을 보던 그의 눈이 일그러졌다.
"이십 년 전, 니가 그려준 그대로야."
자 봐, 하나도 다르지 않잖아. 허리를 기울여 대답 없는 등을 쏘아보며, 실룩이는 입술이 화를 감추지 못하며 추궁했다. 그러나 대답은커녕 초상화를 마주하는 것도 벅찬 듯 몸부림치는 배질의 모습에 그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똑바로 봐, 똑바로 보라고!"
아무렇게나 배질을 움켜쥔 두 손이, 손에 잡힌 이를 마구잡이로 흔들어대며 외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 그림이 내 눈에 어떻게 보일 것 같아!"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던 배질이 돌연 그의 손을 뿌리쳐냈다.
"도리안, 말해봐, 저 그림이 니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도리어 바락바락, 몸을 떨며 추궁해왔다. 울음인지 고통인지 분간할 수 없게 흐려진 얼굴로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 기세에 몰린 그가 잠시 휘청, 뒷걸음을 짚었다. 놀란 듯 당황한 듯 파르르 경련하는 등이 주춤했다. 마른 어깨가 황망함에 잠시 늘어졌다가, 부르르 떨며 재차 배질의 멱살로 달려들었다.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
그의 추궁이었는데, 분명히 몰아세우는 어조였는데, 어미에서는 애원이 되어버린 목소리에 흐느낌이 선연했다. 궁지에 몰린 채 매달리듯 윽박지르는 그의 기세를 쳐낼 듯이 받아치는 배질의 목소리가 강하고, 강하여 더욱더.
"그래 아름다워!"
원하던 대답이었으나,
"여전히 젊어!"
바라던 대답이었으나,
"여전히 아름다워!"
그가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니 심장은!"
지푸라기를 찾듯 두리번대는 고개가 조급했다.
"니 영혼은!"
끝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 영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간주. 앨런의 죽음. 등장하면서의 밭은 숨소리. 정신적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던 고르지 못한 호흡. 그리고 점점 더 애달파지는, 나를 아리게 하는 '비밀은 꼭 지켜주세요.'의 지친 그.
 
 
2악장. 사라진 아름다움.
"배질이 그려준, 그 아름다웠던 너. 넌 어디로 사라진 거야."
헨리 워튼의 외침에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그 아름다웠던 자신'은 이제 없으므로. 대답할 길 없는 물음에 그저 울음하는 얼굴이 아프고 또 아팠다. 하염없이 처진 눈썹 끝에 눈물처럼 아롱진 고통의 땀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눈물로 빚어 아름다운 그 모습이 더욱 처량했다. 껍데기인 그는 여전히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그 이면의 감추어둔 심장은 꼭 그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그 누구도ㅡ그 자신도 바로잡을 수 없고, 설혹 바로잡는다 해도 다시 보아줄 이 없으므로.
 
 
3악장. 도리안 그레이.
'다 사라지나.' 한숨결처럼 퍼트려져, 차마 온전한 맺음이 되지 못하고 흐드러진 '다'가 시작이었다.
'나 밝게 빛나던 그 날,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
한없이 여리고 가냘프게 지난 '그 날'을 퍼트려낸 음성이 '남아있지 않아'에서 응어리진 채 무너졌다. 역시, 10월 8일의 고조. 사무치는 울음 속에서 '모두가 사랑했던 도리안'을 노래하며 두 팔 벌리는 그를 보았다. 허공의 어둠으로 안겨들듯, 눈앞의 모든 것을 안아 담듯 벌려진 두 팔이었다. A의, 멀고 먼 각도로 두 팔을 보는 것은 이제 오늘로 마지막.
날개를 펼치듯 양팔로 공간을 가르며, 날아갈 것만 같은 육신을 꼼꼼히 새겨 그렸다. 허공의 어둠에 맡겨진 옆얼굴을 천천히 오래오래, 두 눈으로.
 
팔을 거두어낸 그가, 죽음의 결심을 굳힌 걸음으로 차츰차츰 다가왔다. 무대를 가로횡단하며 터덜터덜 걸어오는 얼굴에 결연하게 번진 체념이 있었다. 이젤 앞에 무너져 그림을 쓸고, 더는 없는 자신을 매만지는 얼굴을 보았다.
'더 이상, 기억이 안 나.'
생을 그어내기 직전, 최후의 마디를 한 번에 이어 가지 못하고 잠시 고개를 떨구고만 서글픈 정수리는 오늘의 가장 짙은 아픔이었다.
 
정확하게 칼날면으로 생을 그어낸 그의 두 번째 걸음에서 마지막 숨결이 터져 나왔다. 흡사 헨리 워튼이 그의 심장에 심어둔 얼음조각이 그제서야 스르르 빠져나온 것처럼, 허공으로 퍼트려진 보석 같은 숨 방울이 그를 떠나 공기 중으로 사라져갔다. 마침내 눈의 여왕의 최면에서 벗어난 육신이 두 눈을 부르르 떨었다. 옅어져 가는 생명의 얼굴이 풀썩 쓰러졌다. 최면의 허물과 타락의 속박을 벗고 비로소 본연의 자신이 되어, 황금 빛깔 천국을 펼쳐내는 힘없는 두 팔을 보았다. 아름다운 소년을 마주하여 손을 뻗는 의지로, 그가 웃었다. 그러나 끝내는 허황의 낙원을 깨우친 눈이 울음으로 스러지고, 죽음에 내맡긴 몸은 혼자 되어 남았다.
 
 
최종장, 레퀴엠
앨런이 떠난 자리에 남아 고개를 숙이는 볼로 눈물이 한 방울 똑, 떨어졌다. 쉬이 들지 못한 채 떨군 고개에서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울음을 삼키는 그였다.
"아름답던 젊음의 향기 잊혀져 버리고,"
글로스터의 목소리에 퍼득 고개 든 얼굴에 선명한 눈물 자국이 반짝거렸다.
"날 사랑한 그대여"
시빌 베인을 마주하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던 그가,
"눈물을 거둬요"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소중히 그러쥐어 간신히 마주하더니,
"그 빛나던 미소를 보여줘요"
온 힘으로 울음의 웃음을 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오랜 목소리에 돌려진 고개가 한동안 그대로 멎었다. 다가오는 존재를 두 눈으로 더듬어 확인하는 것 같은 부동자세로, 그가 배질을 보았다. 일렁이는 눈이 믿을 수 없어 하다가, 이내 온갖 회오리의 눈물로 범벅되어버렸다.
 
아, 오늘로 마지막일, 다시 볼 수 없을 각도의 이 눈을 잊지 말자. 배질의 어깨에 묻었다가, 조심스레 든 고개에서 그렁그렁 여울진 그 눈을. 깊이로 가늠할 수 없는 빛을 띠고 하염없이 울음하던 그 눈빛을.

이제 단 4회차를 남겨두고, 이렇게 한 차례의 이별을 했다. 안녕, A의 도리안 그레이.
 
 
*
 
1. 배질의 화실
뿌리염색으로 다시 샛노란 금발의 그. 더불어 오늘따라 불그스름한 눈가가 분홍분홍하여, 딱 문장 그대로의 도리안이었다. '상아와 장미꽃잎으로 빚은 아도니스'.
 
그래 도리안, 조금 더 연습해야겠다. 생각지도 못하게 허를 찔린 그의 눈이 웃지도 찡그리지도 못하고 잠시 멍하게 부유했다. 그 찰나의 고요함이 재미있었다. 동시에 살짝 욱했네. 도리안에게 그러면 안 돼..
 
그리고 A 사이드에서 보이는 각도ㅡ액자 곁을 떠나지 않고 가드하듯 지키는 배질의 각도가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헨리 워튼을 경계하는 것도 같고 영역 표시하는 것도 같은 위치선정이었어서. 그럴 거면 끝까지 지켜내지 그랬어요, 싶기도 했고.
 
2.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너의 이 아름다움도 사라져 버리는 거야. 헨리 워튼의 속삭임에 경도된 얼굴이 흘려보낸 숨결을 들었다. 작으나 명확한, 상실의 숨이었다.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마는 숨결처럼, 그의 젊음 또한 매 순간 시간을 타고 사그라지는 것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뇨, 헨리 말이 다 옳아요ㅡ에서는 새로운 억양. 조금 더 쐐기를 박는 느낌이었다. 여지를 주지 않는, 완전히 함몰된.
 
3. 최악의 줄리엣
시빌 베인을 마주한 그의 얼굴. 곱게 빚어 아름답게 여문 아도니스. 그러나 비련에 젖고 상실에 진 슬프고 화난 눈. 정면으로 볼 수 있어 황홀했다. 이 각도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4.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피아노에 맡겨진 등이 일렁일렁. 애도의 춤을 추듯 흔들렸다. 아름답고, 고요하게. 아도니스다운 방식의 추모가 아닐 수 없었다.
 
5. 넌 누구
마무리의 대사가 가사로 바뀌었다. 헉. 계단 끄트머리에서 시작하여 원래의 지점으로 도달하는 순간 마무리되는 넌 누구 reprise였다. 바뀐 걸까? '넌 누구'를 흘려보내었던 첫 음성을 듣는 순간에는 어쩐지 애드립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정말로 바뀐 건지 궁금하다. 내일이면 알 수 있겠지.
 
6. 무엇이 기다릴까
당신이 만든 '나'의 타격음. 찰나의 눈찡긋. 그리고 향기로웠던 목소리를 완벽하게 반전해내는 '내 영혼의 비밀'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전신으로 본 무엇이 기다릴까. 전신에 대하여 쓸 말이 있었는데 삼악장에서 모든 기억을 소진해버렸어...
 
7.
당신은 누구일까. 연기에 아주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요. / 헨리! 저 딱 보면 모르겠어요? 순수청년이잖아요. 어우 헨리, 노 순수.
Against Nature에서 오랜만에 죄악이의 강력한 파괴력, 그리고 또 다른 나에서 돌아온 내 속죄는 진실로 내 뜻인 걸-까의 미는 음♡
악의 꽃. 문을 여는 순간 샬롯 베인을 향하여 고개를 까딱해 보였던 찰나의 근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