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음향은 Against Nature
오늘의 소리는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오늘의 넘버는 Life of Joy
오늘의 기억은 사라진 아름다움, 그리고 도리안 그레이.
1. 배질의 화실
그래, 도리안. 좀 더 연습해야겠더라ㅡ넌지시 끼어든 말에 그가 평소와는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틀어 배질 쪽을 보았다. 묘하게 떨떠름한 빛으로 번진 얼굴이 눈썹을 약간만 들어 올려 반응했다. 물론 금세 아무 대꾸 없이 순순히 '다시 앉아볼까' 주문하는 배질의 말을 따랐지만.
또 새로웠던 것은 그의 걸음. 찬란한 아름다움에 이끌려 액자 밖으로 내딛는 걸음이 평시와 확연하게 달랐다. 걷는다기보다는 빨랐고 뛴다기에는 느렸다. 또각또각하던 예의 일자걸음이라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여덟 자를 그리는 걸음도 아니었다. 헤적헤적 수풀을 헤치듯 벅찬 걸음걸이가 종종종 이어졌다. 걸음마를 처음 시작한 아이처럼 어딘지 묘한 균형 감각으로, 정면에 못 박힌 시선이 이끌려 나왔다.
2.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간사하고 불온함 가득한 소리의 찬란한 아름다움. 그의 상실을 부추기고 나의 안타까움을 증폭시키는 소리. 오늘도 대사보다는 이 배경음에 홀리고 말았다. 그의 숨결을 휘어감은 듯한 은밀한 소리가 조용하면서도 강한 위력을 발산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득한 불온의 소리에 휘감긴 그가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로 귀결하는 모습은, 언제나 마음 시리게 설렌다. 상실을 알아버린 눈동자의 떨림이 좋고, 한꺼풀 한꺼풀 낙엽 바스러지듯 스러지는 음성이 좋아.
3. 당신은 누구일까
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여 일어서는 헨리 워튼을 보던 얼굴이, 푹 고개 숙이며 읊조린 육성의 '이씨'가 이렇게 선명한 건 오랜만. 심통 난 듯한 어린 발음이 귀엽고 귀여웠다.
애드립은 헨리! 딱 보면 모르겠어요? 순수청년이잖아요! 헨리 아저씨.
4. 최악의 줄리엣
오늘도 나타난 오페라글라스 군단. 시빌 베인을 향하여 쪼르르 움직이고, 발연기에 움찔이며 당황해하는 모습들이 재미있었다. 특히 오늘도 팔꿈치에 오페라글라스를 닦는 다급한 그의 손이 너무나 귀여웠어.
5. 찬란한 아름다움 reprise
길고 긴 한숨과 같았던 '헨리...' 마치 의지하여 손을 뻗는 것처럼 흩어진 음성.
'이어서' 부르는 찬란한 아름다움. 찰나의 찡긋!을 보았다. 마치 넌 누구에서처럼 미간을 선명하게 접어 보인 그가 그 얼굴로 웃었다. 왼 어깨에는 주홍빛 낙인을, 오른 어깨에는 헨리 워튼의 손을 짊어지고 완전히 경도된 얼굴이 흠뻑 빠진 채 몽롱하게 반짝였다. 마치 머지않은 미래의 그ㅡ타락한 순결의 그를 미리 본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6. 1막의 또 다른 나의 끝음. 장대하고 풍부하며 날카로웠던 울림. 꼭 잘라서 들을 것.
7. 무엇이 기다릴까
오늘의 그림은 셋.
기이한 황홀한ㅡ의 그가 두 팔을 나비처럼 펼쳐 배질을 향하여 날아드는 찰나, 금발의 앞머리카락이 차르륵 휘날렸다. 공작새의 날개가 차르륵 펼쳐지고, 뱀이 제 꼬리를 사르륵 말아감는 동작처럼 유려하기 그지없는 자태였다.
그렇게 배질의 등 뒤에서 반원을 그리며 포위망을 좁혀 다가선 그가 배질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살그머니 어깨를 매만지는 손이, 그대로 배질의 어깨를 회전축 삼아 몸을 틀었다. 순식간에 배질의 등 뒤에서 눈앞으로 넘어와, 이번에는 얼굴을 한껏 밀착하여 웃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재미있지 않으냐는 듯이.
그나저나 침실 안쪽에서, 오늘 유난히 암전이 늦었다. 배질과 함께 내려앉는 그 맨 등이 선연하게 보였어. 그만 눈을 크게 떠버렸네.
8. Life of Joy
하얀 셔츠 차림의 그를 다시 만났다. 계단을 내려오며 자켓을 걸치는 걸음이 휘청휘청, 제멋대로였다. 흐트러진 차림새의 단정치 못한 모습이 정신의 균열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듯하여, 역시 다시 보아도 좋았다. 더없이 어울리고, 더없이 절묘하다니까.
균열은 내내 이어졌다. 오랜만에 배질의 어깨에 두 손을 탁, 얹어보인 그가 이어간 문장이 매끄럽지 못했다. 그 초상화에 대해서, 왜 그렇게 집착하시는 거죠?
나아가 그 초상화가 나를 망쳤어! 의 변형까지. 평상시와 확연히 다른 모습에서 송두리째 혼란인 그가 느껴졌다.
소리적으로는 정말로 오랜만에(개인적으로) 강함의 연속이었다. 기도하고 사랑하라 짜릿하게, 부터 결국 내가 만든 나의 선택의 끝까지. life of joy의 강강강이 이렇게 와 닿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라, 기뻤다.
9. 천사의 추락
순간적으로 삐끗, 열 곳을 잘못 짚은 손이 귀여웠네.
10. 너를 보낸다 reprise
베푼 거예요, 뱉어낸 음성이 마이크가 꺼진 후에도 고통의 웃음을 쥐어짜냈다. 이어 쿵, 쐐기처럼 내리박힌 발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배질ㅡ나지막히 부르는 음성은 오랜만에 아주 강한 경고조였다. 소리 없는 으르렁거림이 싸늘했다.
영혼의 비밀을 들추어낸 계단 위 다락 앞에서 오늘은 웃음을 그리는 얼굴을 보았다. 섬뜩하게 끌어올린 입꼬리가 애써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제 고통의 치부를 전부 드러내어 놓고 웃는 얼굴이 잔혹하다 싶을 정도로 섬뜩했다. 동시에 저렇게 웃음 짓게 되기까지 대체 얼마나 저 끝으로 내몰린 걸까 싶어 먹먹하지 않을 수 없었어.
여전히 젊어! 여전히 아름다워!
이렇게 강한 배질이 되면, 늘 그가 안쓰럽다. 발을 구르고, 그를 노려보고, 소리치고, 몰아세우듯 다가서서 추궁하는 배질 앞에서 그가 말을 잃었다. 시선의 갈피를 잃은 눈이 오늘도 좌, 우 차례로 쓸며 두리번거렸다. 홱 소리가 날 것처럼 다급한 고개가 황망했다.
돌아와 배질을 찌르기 전, 칼을 쥔 손이 달달 떨렸다. 이 역시 오랜만. 제 손에 쥔 지푸라기에 의지해보려는 듯한 그 떨림이 눈에 박혔다.
11. 사라진 아름다움
허무한 쾌락 남겨진 추함 사라진 아름다움ㅡ이상할 정도로, 오늘은 나를 위한 노래인 것만 같아서. 오늘은 그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버거워 힘들었다. 모든 것이 내게로 수렴하는 것 같아서.
남겨진 연-민, 깊은 고통의 파열음조차 그를 위한 것인지 나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라지고 싶었다. 그 생각뿐이었다.
12. 도리안 그레이
'다' 사라지나의 서글픈 도입. 유난하였던 울음의 소절ㅡ나 싱그러웠던 나 밝게 빛나던. 그리고 이어진 10월 8일의 고조. '도대체 누군가'의 파열음. 서럽고 서러웠던, 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좌우로 내젓듯이 흔들리는 고개가 아팠던 '모두가 사랑했던 도리안'.
오늘도 정확히 칼날면으로 목을 그어낸 그를 보았다. 정확히는 죽음을 불러오기 직전 내 눈을 찾아왔던 그 젖은 눈동자의 잔상을 좇았다.
쓰러져, 자그마한 콧물 고드름 맺힌 얼굴이 힘없이 노래했다. 표정이 없어 서늘한 얼굴이 오로지 한 곳만을 보았다. 오늘도 황금 빛깔을 두 팔로 펼쳐내지 못한 육신이, 아름다운 소년을 향하여서야 겨우겨우 손을 뻗었다.
오늘 역시 아는 눈이었다. 결코 자신의 현실이 될 수 없는 소망을 똑똑히 아는 빛이었다. 차라리 끝이 어서 오기를 바라는 듯이 허망한 눈이 서글펐다. 그가 바라는 '끝'이 죽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목을 따갑게 했다.
소망의 환상. 갈구의 죽음. 허황의 낙원 앞에 그려진 쓰라린 울음의 미소가, 소리죽여 스러졌다.
죽음에 묻혀 쓰러지는 소리조차도 오늘은 한없이 가냘프고 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