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그는 '엘'이었으나, 내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감회가 엘로서의 그와 김준수로서의 그 사이를 자꾸만 오가게 했다. 나의 의지였다기보다는 본능이었다. 극으로부터 이탈되어도 어쩔 수 없었다. 끊임없이 그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려 했던 건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었다. 그건, '마지막'이 갖는 무게에 대처하는 생존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

마지막 순간.

낮공. 수사도 전부 내 마음대로 휘젓는 거야ㅡ승리감에 취한 라이토 건너로 눈썹이 내려앉는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 감정은 절망이었다. 놀람이었고, 얼마간의 당황과 분노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또렷한 갈래의 감정은 절망이었다. 이렇게나 역력한 좌절이 묻어나는 얼굴은 처음이었기에 바라보는 나의 심장까지 덩달아 내려앉았다.
그래서였을까. 언뜻 웃음으로 시작한 죽음의 마디ㅡ난 틀리지 않았어ㅡ는 결국 울음이 되어 멎었다.

밤공 또한 그랬다. 언뜻 눈물 줄기를 본 것도 같아 마음이 덜컹했는데, 더욱 믿을 수 없게도ㅡ스러진 후의 얼굴이 보였다. 죽음에 맡겨진 채 어둠 내린 그 얼굴이 선물 아닌 선물 같아 하염없이 보았다. 볼수록 죽음 가까이로 침잠하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계속. 섬뜩하리만치 외로운 어둠 속에 죽어있는 그 얼굴이 '엘'로서의 마지막이었다.
어울렸으나,
훌륭했으나,
가혹했다. 

'엘' 너머의 김준수 또한 함께 바라보고 있던 내게는 그랬다.

*

게임의 시작. 그 이상이 될 수 있을까 했던 소리가 진화했다. 숨을 쉬기는 하는 걸까 싶었다. 몰아치는 음성, 듣는 이의 숨을 조이는 분노. 세상에. 시작하는 넘버가 아니라 종장의 곡이었다면 외쳤을 것이다. 브라보!
밤공, 곧 막공에서는 음향마저도 특별했다. 게임의 시작에서의 이런 음향, 고작 두어 번 들었을 뿐이다. 몰아치는 절정을 뒷받침하는 음향이 기뻤다. 제대로 된 서포트를 받아 물 만난 듯 날개 다는 소리에 벅찼다.
그래서일까. 그도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거의 처음으로 고등학생이야, 읊조림의 선언에서 발꿈치를 세우지 않았으니.
붉은 석양 틈으로 퇴장하는 그를 기묘한 감각에 싸인 채 보았다. 그의 흥분과 나의 벅참이 단단히 맞물렸었음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땅에 머문 발꿈치가 그 반증이었다. 특별하고도 짜릿한 시작이었다.

*

정의는 어디에 reprise. 다른 어디에서도 추종할 수 없는 이 넘버만이 선사하는 희열이 있다. 모든 것을 밟고 선 그를 올려다보는 감각. 이건 정의는 어디에의 전유물이다. 지상으로부터 한참은 솟아나 있는 것 같은 그를 올려다보는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보는 내내 곱씹었다.
키라를 외치는 지상의 소리를 밟고 선 반키라의 유일한 존재.
고독하나 외롭지 않고, 자신하나 오만하지 않은 의지.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소리기둥ㅡ진정한 정의란 과연 무엇인지.
무수한 음을 헤치고 가장 곧고 굳세게 들려오는 소리ㅡ내가 바로 정의.
이 모든 팽팽함을 잊지 않기 위해 눈으로 새기고, 심장으로 새겼다. 재연이 선사한 카타르시스의 반할이 이곳의 소리에 있었으니. 오래오래 기억하자, 생각했다.

*

남은 반할이라 한다면 역시 변함없는 진실. 사실상 재연을 이끌어 간 구원투수가 아니었나. 예술의 전당의 극악한 음향 기복과 난항을 거듭하는 듀엣 사이에서 홀로 굳건하였던 넘버다.
갖추어진 음향에서라면 훨씬 더 날개를 달고 비상하였을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지. 음향은 번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서포트는커녕 소리를 깎아 먹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렇게 '변함없는 진실'은 진공관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연주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악을 그는 매번 되살려내었다. 때로는 성량으로, 때로는 경륜과 기술로, 때로는 무대장악력으로. 종종은 그 전부로. 넘버 하나를 기어코 살려내며 그때마다 온몸을 바르르르 떨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목울대와 미간은 항상 백 퍼센트의 전력이었다.
그래서 재연의 변함없는 진실을 향한 박수는 언제나 경탄과 탄식의 박수였다. 경외가 된 마음의 찬사였다.
마침내의 종장에서 어느 때보다 만감이 교차했던 건, 그러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임을 염두에 둔 듯 폭발하는 그가 무척이나 느리게 눈에 담겼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감각이 절로 시간을 쪼개어 초 단위로 그를 쫓고 있었다.
'사신의 그림자 뒤에서'
그림자를 헤치는 듯한 손동작이 절정이었다. 세찬 손짓이 꼭 파열음처럼 날카롭게 흩어졌다. 노랫소리는 그보다 더 쨍했다.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곧 이어진 최후의 음성,
'너의 존재'ㅡ는 포효 같기도 하고 절규 같기도 했다.
폭발음 후 찰나의 정적은 이질적일 만큼 고요했다. 어딘가의 허공ㅡ조금은 먼 위로 시선을 둔 채 그가 숨을 쌕쌕이며 몰아쉬었다. 가로 잔뜩 펼친 두 팔을 거두어내기까지의 찰나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1초도 되지 않았을 영원 같은 정적을 깬 소리는 청중의 것이었다.
최후의 박수는, 당연하게도 어느 때보다 우렁찼다.
수많은 의미가 내포된 박수갈채가 빗소리처럼 연이어 떨어졌다. 갈채는 길었다. 그 사이 예의 구부정한 자세로 돌아간 그가 어둠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소리를 헤치고 걷는 그의 앞길로 박수가 헌화를 대신하여 쏟아졌다. 꽃길을 대신한 소릿길을 성큼 또 성큼 그는 거침없이 걸었다. 김준수로서의 여운은 등 뒤에 남겨둔 채 엘로서 직진하는 걸음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무대로 모든 것을 말한 뒤에는 그저 제 갈길을 가는 뒷모습. 그 한결같음에서 나는 다시 엘 너머의 김준수를 보았다.

이별은 여전히 서글프나 그래도 참 그답게 아름다운 안녕이라 생각했다.
천천히, 퇴장하는 굽은 등을 향하여 목례했다. 최대한 경건하게. 할 수 있는 한의 진심으로.
변함없는 당신을 향한 변함없을 나의 안녕을 그렇게 고했다.

*

이렇게 넷. 사랑했고, 사랑으로 기억하는 재연 데스노트의 마지막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