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2 엘리자벳의 시간을 사는 동안 내 자신이 꽤 멍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 이면의 부조리와 설명할 수 없는 악의를 무수히도 목격한 시간이었다. 괴로웠던 건 그것들이 내게 유형의 타격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시아준수를 사랑하면서 내가 다친다는 감각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사랑은 아름다우며 상냥하고 따뜻한 존재인데, 사랑하면서 아프게 된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처음 겪는 일이었고, 두 번은 없을 경험이었다. 엘리자벳이 유일했다. 그래서 엘리자벳은 멍울이 되었다. 

 

돌아온 금발, 그대로인 연보랏빛 섀도우(초연의 필터로 연보랏빛으로 인지하였으나, 푸른빛이었다), 여전한 내린 머리, 까만 네일.. 공연을 하는 동안 그는 차근차근 시간을 되돌려 갔다.
하나둘 떠올랐다. 이날엔 이랬지, 저 날엔 이랬었지. 어린 루돌프에게는 저렇게 너털너털 웃었지, 장례식에선 이렇게 포효했었지.. 온몸으로 그가 노래하고 온 마음으로 내가 사랑했던 기억이 도처에 있었다.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극과 건조한 공기마저 그대로인 공연장에서 오늘의 그와 6년 전의 그가 공존하는 것 같았다. 마치 평행세계의 존재처럼 초연의 얼굴이 그림자가 되어 그를 따라다녔다. 같으면서도 달랐지만, 다르면서도 너무나 닮은 둘이었다.

 

종내에는 시간을 끝끝내 5월 2일로 되돌린 것 같았다. 하얀 옷을 입은 금발의 죽음이 혼자만 새하얀 조명을 받고 선 그림을 보는 순간부터였다. 

초연,

금발,

신기루,

아프게 헤어진 사랑..

분명하게 깨달았다. 나는 초연의 〈베일은 떨어지고〉가 보고 싶었던 것이구나. 아팠던 기억이 여타를 매몰할 만큼 거대하여 그저 외면코만 싶다 여겼는데, 아니었다. 오직 그만이 슬프도록 아름답게 홀로 선 최종장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 장면이 그리워 오랜 시간 사무쳤던 것이다. 오로지 죽음으로만 가득한 순간을 다시 한번 순수하게, 티끌 없이,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돌아올까 싶었던 순간의 재현에 마음이 울렁울렁했다. 

 

공연을 앞두고 자문했었다. 흑발일까, 금발일까부터 노선은 어떠할지, 어떻게 변주를 줄지. 변주가 가능할지.
덧없는 의문이었다. 
눈앞의 죽음은 초연과 같았지만 초연이 아니었다. 금발이지만 도리안이 아니었고, 재연의 의상과 같았지만 재연의 죽음이 아니었다. 6년의 시간은 배우로서의 그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고, 돌아온 금발의 죽음에게는 그 ‘시간’이 함축되어 있었다. 
눈앞으로 그 모든 시간이 교차했다. 만감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한정된 자원과 엇비슷한 출발점을 두고도 이렇게 분명한 변주를 해낼 수 있는 그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의 그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약속을 받은 느낌이었다. 같은 듯 다른 얼굴로 돌아온 그는 기적처럼 또 한 번의 사랑의 기회를 선사하고 있었다. 초연인 듯 초연이 아닌 그는 지난 시간이 한 줌의 재가 될 만큼 새로이 사랑하게 해주겠노라, 공연으로 말했다. 웃으며 헤어지지 못했던 초연과 도피하듯 사랑했던 재연 위로 새로운 사랑을 덧칠할 기회를 주겠다고. 그렇게 이 극으로 지난 멍을 지워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확언했다. 다시 돌아온 금발이 그렇게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의 할 일은 정해졌다. 당신이 나를 부르는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 이번에야말로 원 없는 사랑으로 당신과 나를, 우리를 지킬 것. 

 

그렇게 또 나의 영원을 당신에게 헌정한 밤이었다. 

 

*


초재연과 달라진 장면:
1. 〈론도〉에서 멈춘 엘리자벳의 시간을 일깨우는 유려한 손동작이 추가되었다. 엘리자벳의 팔선을 따라 물흐르는 듯한 손의 맵시가 고혹적이다.
2. 〈어머니와 아들씬〉. 양날개로 아들을 폭 감싸는 동작에서, 한쪽 날개로 아들을 휘감은 뒤 날개 안에서 죽음의 입맞춤을 연출하는 장면으로 변화하였다.
3. 〈마지막 춤〉 1절의 새로운 안무! (커튼콜에서도) 2절은 기존과 같은 발구르기 동작을 세게 쾅쾅쾅.
4.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에서도 새로운 안무가! 침대 끝자락에서 상체를 일으킨 채 엘리자벳을 향해 손을 뻗는 것에서, 품안의 엘리자벳을 조종하듯이 뒤에서 감싸안으며 죽음의 입맞춤 시도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엘리자벳의 양팔을 조종하듯이 끌어안으려는 시도는 〈내가 춤추고 싶을 때〉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한데, 반복되는 매혹의 동작이 죽음의 캐릭터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주어 좋았다. 
5. 〈볼프살롱〉 막바지에 잠깐 등장한다. 

6. 〈말라디〉에서는 소파 위로 훌쩍 올라탄다!
7. 〈마이얼링〉에서 박자를 노니는 동작이 추가되었다. 또 총을 오블이 아닌 중앙을 향해 쏘았고, 퇴장하면서는 총구에 손가락을 끼워넣고 총을 빙글빙글 돌렸다. 어둠으로 사라질 때까지 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