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숙 엘리자벳 불패의 넘버 〈추도곡〉. 처창한 목소리의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엘리자벳의 시선을 따라 죽음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카메라의 앵글이 바뀌는 것처럼 엘리자벳의 얼굴에서 죽음의 모습으로 시야가 뒤바뀌었을 때, 명치를 찔린 듯했다. 죽음을 가리키는 손과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고개 위로 그녀의 슬픔을 꼭 닮은 얼굴의 죽음이 서 있었기에. 1막, 소피의 죽음에 입꼬리를 올린 채 노래하던 죽음은 더는 없었다.
파도치는 감정선의 공연이었다. 신영숙 엘리자벳과의 공연은 항상 2막 후반부에서 격정의 온점을 이루지만, 오늘은 더욱 특별했다.
베일에서 망설이는 죽음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오늘의 그는 마치 노래를 시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브릿지 위로 조심스러운 한 걸음, 이어 숨을 고르고 소리를 가다듬는 시간이 억겁과 같았다. 꼭 뜸을 들이는 것처럼, 그래서 이 시간을 멈추어두고 싶은 것처럼 시분이 느릿하게 흘렀다.
망설이는 그는 그녀를 원하면서도 영원히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죽음처럼도 보였고, 62회 공연이라는 대장정의 마무리를 앞에 두고 감회에 젖은 시아준수처럼도 보였다. 어느 쪽이든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덜컹거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몇초 남짓한 시간에 흐르는 머뭇거림이 부지불식 간에 초연 막공의 울음기 묻은 첫 소절을 불러일으켰다.
느릿한 걸음걸음, 감정을 삭이는 듯한 얼굴, 하지만 코끝으로 뭉쳐 든 울컥함까지는 차마 삼키지 못하여 찡그린 콧등.. 그 모습들이 나의 시선 안에서 그렁그렁 번져갔다. 오직 그녀만을 위한 백색의 연미복을 차려입고 그녀를 기다리고 선, 말이 없는 왕자님. 그에게서 반사된 것이 분명한 하얀 빛이 아지랑이처럼 번지며 시야를 간지럽혔다. 감격과 회한의 눈물은 그의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것이었다.
마침내 자신에게로 이끌려오는 그녀를 바라보는 눈의 일렁임과 그림처럼 내밀어지는 손, 최후의 포옹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상 위에서 한 몸처럼 끌어안은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되뇌었다.
부디 세상 따위는 가라앉게 두고 영원과 안식만을 얻기를.
사랑을 위하여 기꺼이 혼자 되기를 택한 그의 죽음이 천천히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서히 닫히는 베일에서 재연의 막공에 “준수 씨,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라 하였다던 김소현 엘리자벳의 음성이 떠올랐다.
죽음이여,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막이 모두 닫히기 전, 언뜻 마주친 것만 같은 마지막 순간의 눈은 소리없는 대답을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
깐토드.
여러모로 재미있는 공연이었다. 낮과 밤이 번갈아 말썽을 피웠지만 크고 작은 사고가 독이 되기보다는 배우들의 투지를 불태워주는 듯 보였다. 공연중단이라는 15분의 틈을 메꾸기 위한 낮공의 열연을 보지 못하였다면 아쉬웠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무대장치: 리프트의 고장과 더불어 막공이라는 특수한 요인이 더하여져 전례 없이 기합 가득한 공연을 이룩해낸 밤공 역시.
밤공의 프롤로그. 빽빽한 앙상블의 소리 위로 음절마다 최선을 다하여 불어넣는 기합의 죽음을 느꼈다. 그리고 놀라우리만치 그윽한 소리를 들었다. 마지막 춤 레코딩 초반부에서 들을 수 있는 바로 그 음성을.
좋은 음향과 넉넉한 단차로 탁 트인 시야. 시작은 분명 날개를 달고 있었는데, 복병은 론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리프트가 올라오지 않았다. 분명 몇 시간 전의 낮공에서는 제 역할을 하였건만 밤공에서만 감쪽같이 론도부터 나는 나만의 것, 2막의 침몰하는 배 그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리프트 없이 선 채로 진행된 론도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리프트가 없는 텅빈 무대를 바라보는 죽음의 뒷모습에 내가 당황한 사이 넘버가 시작되었다.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럽게. 멀똥히 선 엘리자벳을 향하여 상체를 살짝 기울인 죽음이 원래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속삭였다.
‘엘리자벳, 너의 차례야.’
그러자 분명 죽음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어야 하는 신영숙 엘리자벳이 선 채로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연신 두리번거렸다. 두리번대면서도 시선은 죽음을 등지고 있어 그를 발견할 수 없도록 각도를 세심히 신경쓰면서.
두 사람이 코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될 즈음에는 푸르스름한 안개 조명에 휩싸인 죽음과 엘리자벳이 ‘서 있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과연 배우였다. 프로의 대처였다. 빠른 상황판단과 순발력이 자칫 사고로 이어질 뻔한 무대장치의 고장을 ‘번외편’에 그칠 수 있게 하였다. 서로를 엘리자벳으로서, 죽음으로서 깊이 신뢰하고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자연스러운 주고받기였다.
이어지는 공연은 하나의 거대한 론도였다. 일단 무대장치 고장이라는 사고를 모두가 인지하자, 상황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리프트가 빠진 무대는 시각적으로는 확실히 왜소해보이고 부족함이 있었으나, 리프트가 빈 자리를 메꾸어넣기 위하여 배우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헤쳐나가는 모습은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느닷없는 불운이 단 한 번의 이벤트처럼 느껴질 수 있게 했던 것은 순전히 배우들의 덕이었다. 밤공의 배우들에게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한편 낮공에서 문제 있었던 조명은, 15분의 공연 중단을 거치고도 다소 아쉬운 부분을 남겼다ㅡ대표적으로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서 죽음이 걸어나올 때 심히 어두웠던 것. 또 밤공의 삼중창에서 거울 속 죽음의 조명을 너무 빨리 꺼버린 것. 마지막이었는데..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이 보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하지만 조명의 문제와는 별개로 〈엘리자벳 문을 열어주오〉와 〈전염병〉에서 연출을 도맡는 조명은 그 흐름이 매끄러워 무척 좋았다. 특히 전자. 죽음의 싸느란 푸른빛과 엘리자벳의 밝은 세상의 빛이 양립하던 무대에서 죽음이 그녀의 빛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엘리자벳을 자신의 싸느란 어둠으로 이끌어갈 때의 조명 연출이 유독 극적이리만치 선명했다.
〈마지막 춤〉은 다른 의미에서 새로웠다. 전주행 버스에서 14년도 일본 콘서트의 마지막 춤을 오랜만에 본 여파였다. 5년이다. 반십년이 흐르는 동안 훨씬 성숙해진 흉성, 손쉬워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능란한 폭발력, 굳세고 단단한 울림통. 오랜만에 본 14년도의 그가 상대적으로 앳되어 보이고, 햇과일처럼 느껴지게 하였을 정도로 오늘의 죽음은 서너걸음을 더 나아가 있었다.
노래적으로는 폭발부의 직전, ‘깨어날 거야~’ 음성이 낮밤 모두 대단히 부드러웠다. 나긋나긋 여유로운 숨결에서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자신감이 느껴질만큼.
그리고 엘리자벳을 끌어당기며,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안을 때의 소절, ‘숨 막히지’의 절도 있던 팔과 손목의 각도. 오늘따라 도드라져 보이는 날렵함이 인상에 깊이 남았다.
〈전염병〉에서의 등장. 몹시 고대한 순간을 목전에 둔 이글이글한 눈을 보았다. 검은 모자 아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어도 가려지지 않는 빛이었다.
낮공에서는 무척 벅차게 들이마쉬는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폐~하를 발음하는 음성이 엄청 나긋했어. 감언이설처럼 듣기에는 달콤하여 좋으나 어딘가 꺼림칙한 위화감이 감도는 신비한 목소리였다.
〈내가 춤추고 싶을 때〉는 낮공이 대단히 조화로웠다. 특히 죽음이 삼삼삼 박자로 뒷걸음질하기 전, 엘리자벳이 뒤돌아 그를 뿌리치면 그가 살짝 까치발을 세우는 타이밍이 가장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신영숙 엘리자벳과는 곧잘 이 타이밍이 어긋나곤 했는데 완벽하게!
마지막으로 키치 리프라이즈. 장막 위의 키치 세트가 일사분란히 멈추는 장면이 아주 정확했다. 잘 없던 일인데, 놀랍게도 낮과 밤 모두.
그리고 짤막한 무대인사의 끝에 엘리자벳을 시작으로 루케니, 요제프와 차례차례 포옹할 때의 환한 미소가 정말 아름다웠다. 극안의 죽음은 혼자되어 남았지만, 배우 김준수는 관객의 환호와 동료들의 애정 가득한 축하 속에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기뻤다.